누크의 사선(국어판)

[로망스] 그녀의 방랑벽

열혈연구 2000. 11. 2. 13:40
로망스
-그녀의 방랑벽


@삶의 궤적

삶은 끊임없는 탐구의 여정이다. 대상은 시작과 끝이 있는 인생 자체일 수도, 특정한 사물이나 이념일 수도 있다. 이상을 찾던 철학의 역사를 짚어도, 한 세기를 뜨겁게 달궜던 이데올로기로도 개인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없었다. 결국 삶은 혼자의 길인 것을.

<로망스>는 한 여인의 삶 한 조각을 담고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마리(카롤린 듀세)는 영화 전편에 걸쳐 끊임없이 욕망의 실체를 찾아서 헤맨다. 입으로 애인 폴(사가모르 스테브넹)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할지라도, 의지와 별개로 발기하는 폴의 남근처럼, 그녀 역시 흐르는 육신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기기 힘든 대상 중 첫손에 드는 자신을 안다는 것은 홀로 가야할 구도(求道)의 삶에 동반자를 얻는 격. 여성이 여성을 이야기 한다해서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프랑스 여감독 까트린느 브레이야의 네 번째 연출작 <로망스>는 철학의 깊이보다 표현의 수치로 조명을 받았다. 열일곱의 나이에 유명작가 대열에 오른 그녀는 문학과 영화의 처녀작들 모두에 '성'이라는 의제를 설정하고, 지금에 이르는 이후의 작품들로 그에 대한 부연설명을 달고 있는 듯 보인다.

마리 곁에 머물다 사라지는 남자 둘, 교통사고로 애인을 잃은 지 6개월 된 파올로(로코 시프레디)나, 그녀를 20달러에 사겠다며 강간하고 사라진 건달은 결국 의지와 밀접하지 않게 흘러가는 그녀의 삶에 깊은 궤적을 남긴다.


@의식의 흐름

<로망스>는 투우사 복장으로 분장을 하고 있는 모델, 폴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등장한 마리와 폴의 대화는 섹스에 집중하는 마리와 관계에 초점이 있는 폴의 정체성을 순진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극 중 내내 마리의 독백을 통해 주문처럼 반복되는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자아는 리비도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뀐 성적상대-파올로, 로베르, 건달, 폴-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그녀의 모습은 서로 이가 맞지 않아 삐걱인다.

차례로 보면 외도를 위한 성기 중심의 파올로, 페티쉬를 이용해 구속을 알려주는 로베르, 창녀로 접근해 배설만 하고 떠나는 건달과 생명 창조의 행위자인 폴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마리의 모습은 폴의 금욕에 불평하던 연인에서 간통녀, 탐구자, 창녀, 아내로 변화하지만 발판이 되는 남성과 실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욕이 변화의 근간이 되는 <로망스>는 실제로 마리의 행위보다 성기 자체에 집중한다. 그녀가 폴의 성기에 매달리는 것이나, 로베르의 기구들에 만족하는 것은 프로이드의 '남근과 성욕 중심의 세상보기'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동기술(自動記述)적 의식의 흐름만 있을 뿐, 설득이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파편화된 현상들을 내보이면서 과정의 개연성 없음에 헤매고 있을 관객들에게 마리의 심경변화는 그저 말없이 따라가라고 요구하는 격이다.


@정복의 역사

영화 <로망스>에서는 디스코텍의 씬이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씬은 연인에게 금욕을 선언하고서도 무대에서 춤을 통해 익명의 여성을 유혹하는 폴과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마리의 대립을 보여준다. 이는 바람둥이 대 정절녀의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이후 마리의 일탈을 은근히 비춘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마리와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폴의 자유주의적 경향이다. 이는 전편에 걸쳐 양성애적 코드와 모델이면서도 항상 책에 빠져있는 폴의 모습이 다듬은 대리석으로 존재하는 그리스 남신과 겹쳐지면서 사못 다의적 은유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는 마리가 폴의 춤을 보며 하는 독백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춤->유혹->정복이 남성의 본질이라 규정짓는 곳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두 번째,
임신한 마리, 누나 부부와 함께 디스코텍을 찾은 폴은 일관성-똑같이 춤으로 유혹하는-을 보이지만, 가벼운 자체로 다가선 폴의 행동이 마리에게는 다음날 살의를 실행에 옮길만한 증오로 발전하면서 해방의 결단과 연결되면 겨우 갖고 있던 이해의 여지를 깨뜨리고 만다. 결국 마리 역시 생산을 통한 정복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방랑을 위한 여정

까트린느 브레이야 감독은 한 여성의 여정을 통해 추상적인 사랑과 구상적인 섹스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사용한 여러 가지 표현방법, 즉 성기의 과다노출과 포르노 배우를 기용한 표면적인 이유에서 마리의 의상과 배결들의 색배치를 통한캐릭터 내면적 은유까지 아쉽게도 의도만큼 작용하지 못한다.

마리의 출산과 새 출발은 전편에 걸쳐 동기를 부여받고 변증법적인 차례-연인의 금욕-> 섹스로 일탈->새로운 출발-를 밟지만 논리적 고리를 생략한 귀납법적 표현으로 그저 관객에게 툭 던져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마리의 창녀촌 상상씬은 가장 튀면서도 돋보인다. <로망스>가 한 여인의 성적 상상력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인 기치는 유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로망스>는 다양한 사후 해석의 여지만 남겨놓은 무책임한 열린 구조-'열린 결말'이 아니다.-를 가지고 있다. 마리의 여정이 그저 한 여인의 방랑벽을 위한 늘어 쓰기처럼 보인 건 필자의 과문일까.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서 2 :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