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카우보이
-새로울 손가 우주의 표현이여!
@비상 발생
지구 궤도 밖에 문제가 발생했다. 현역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을 위해 그들을 불러 들여야만 한다. 그들이 참여할 것인가. 팀은 구성될 것인가. 지상에 두고 떠나야할 여인은 어쩌란 말이냐.
<아마겟돈>의 노익장 판<스페이스 카우보이>는 최근에 선보인 <식스티 세컨즈>와 함께 제리 브룩하이머 표 영화들의 소재와 구도를 그대로 따랐다. 다른 것이라곤 제리 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과 그 중심에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선물 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걸출한 배우 겸 감독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깊을 수 없을 정도로 골진 안면 주름과 신체검사에서 여실히 보여준 우글거리는 살은 신경질 가득한 표정으로 새로운 웨스턴과 형사물의 장을 열었던 젊은 이스트우드의 액션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을, 비록 몸 날려 뛸 수는 없어도 계속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영화의 시작은 폭발과 속도에 충분히 익숙한 지금에도 상큼할 정도의 흑백 하늘을 가르는 제트기의 원 샷. 우주 비행을 위해 훈련을 거듭하는 데덜라스팀의 넷, 프랭크 코빈(클린트 이스트우드), 호크 호킨스(토미 리 존스), 제리 오닐(도널드 서덜랜드), 탱크 설리반(제임스 가너)은 불과 10개월만에 3대째 최신형 초음속기를 땅에 쳐 박고 돌아왔다. 혈기 가득한 1958년의 이들 앞에 홍두깨 같은 나사 창립은 첫 우주인의 자리를 침팬지에게 넘기게 했고, 어색한 악수를 강요받아 팀원 모두가 각자의 현실에 안주한 지도 42년이 지났다.
@배우와 감독
"작품성과 세계적인 흥행 사이의 줄타기를 해온 진정한 작가"라는 이스트우드를 향한 베를린의 찬사는 적어도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크게, <미드나잇 가든>에서 작게 반짝였을 뿐이다. 우리의 영화판에서는 푸릇한 정우성이 늙기를 40년이나 기다려야 할까마는 헐리웃의 강점은 거의 무한의 자본과 대규모의 시장, 이미 획득한 세계성 외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자기발전의 배우겸 감독들의 존재가 한 축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구를 이끌고 최고의 도둑을 만들려 했던 <앱솔루트 파워>나, 사진기만큼 낡은 모습으로 로맨스의 가능성을 보여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고희를 넘어선 이스트우드는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그저 영화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려는 듯 보인다.
늙은이들의 우주행을 그린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는 눈물겨운 영웅담에서 벗어난 채로 마무리를 짓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앞서 말한 <아마겟돈>과 <식스티 세컨즈>의 틀은 갖다 붙였더라도 브루스 윌리스의 핫함이나 니콜라스 케이지의 쿨함을 그대로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진 않는다.
구소련의 통신위성 아이콘의 궤도이탈을 수정하기 위한 유일한 기술자 프랭크 일당, 데덜라스팀은 주위의 숱한 난관을 이겨가며 스페이스셔틀 속에서 카운트다운을 센다. 정작 그들이 그렇게 그리던 우주에서 만난 아이콘은 핵탄두 6개가 담긴 군사위성이었고, 이제 위성의 처리는 전적으로 프랭크 손에 달려 있다.
@노년의 유머
젊음과 권력은 서로 손을 잡기 어려운 두 마리의 토끼다. 현실의 반영체이자 이상의 표현물인 영화에서 이들을 맺어 놓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이유. 하지만 <스페이스 카우보이>에서는 젊음은 치기로 권력은 덧없음으로 취급되고, 시간이 흘러 남는 것은 나이든 육신과 젊은 꿈 자체임을 이야기한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임무수행에 뛰어든 이던의 행동이, 아니 불행의 씨앗을 품은 채로 속여온 거슨에 대한 비웃음은 결국 체제 자체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더라도 나름의 위치를 지켜온 이스트우드의 유머 인생관이다.
특히 우주에서 감격을 누리는 프랭크와 호크가 나오는 씬은 개중 백미다. 먼저 카메라는 지구본 같은 지구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프랭크를 클로즈 업으로 잡는다. 당연히 지구 모습을 보이는 리버스샷이 이어지고 멀리 뒤에서 잡은 롱샷은 지구와 프랭크 사이에 있는 우주를 효과적으로 담는다. 여기서 그쳤더라면 그저 그런 씬이었을 터. 이스트우드는 여기에 마초 기운 가득한 호크-그는 텍사스 론스타, 카우보이 복장이다-가 끼어 들어 같은 장면을 투샷으로 변주하고, 임무 수행하자며 "가자 카우보이"하는 둘의 아래에 지구의 자전을 이탈리아에 맞춰놓는다.
영화 곳곳에 들어있는 유머감각과 화면의 짜임새는 손 볼 것 없이 깔끔한 영화 달인의 형태를 갖지만, 아쉽게도 붕붕거리는 캐릭터와 딴죽걸기 식의 이야기하기는 역시 나이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願 溫故而知新 -두 가지 추측.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늙어서 멋진 네 배우를 전면에 부각시켜 중량감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별 급박하지 않은 임무 앞에 실없이 소비되고 만다. 프랭크와 호크는 예전 이스트우드 혼자 했던 배역을 그저 갈라놓은 것에 다르지 않고, 침례교 목사 탱크의 팔뚝에 있는 문신도, 제리의 대물(大物)의식도 영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저 피식거리는 팝콘거리로 남고 만다.
특히 비장미를 모두 짊어진 호크의 췌장암과 젊은 연인은 죽음을 내다보고 떠나는 '달나라로 여행'에 안타까움의 촉매가 되지 않고, 이를 묵묵히 바라보는 남은 팀원 역시 나이만큼 담담한 감정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감상주의를 지양한다고 누선(淚腺)을 막아 놓는 것은 관객과 상호작용을 주체로 하는 대규모 영화에 대입하기엔 너무 메마른 방식이다.
더 이상 영화 만들기의 기술은 진보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저멕키스가 손을 댄 버추얼 히스토리와 리얼리즘 이펙트는 스필버그의 로스트 월드 창조, 루카스의 사가 컨티뉴, 캐머론의 이벤트 강박과 함께 영화에서는 새로운 것 보단 자아와 외부매체 표현의 랩소디로 살아갈 것이다. 굳이 예를 들어 말을 하자면, 우주에 대한 표현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이후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아폴로 13>처럼 현실적이지도, 계속될 <스타워즈>시리즈처럼 풍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이스트우드는 갈 길을 굳혀야한다. 더 이상 줄타기는 그의 영화인생 대미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름기 빠진 인물들을 버무린다고 해서 차분한 인생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구로 힘든 액션은 <사선에서> 놓아두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지 않을 그의 <앱솔루트 파워>가 풍겨 나올 명작을 기다리는 것은 지나친 바램일까. 아니 이스트우드라면 기다릴 만 하리라 믿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새로울 손가 우주의 표현이여!
@비상 발생
지구 궤도 밖에 문제가 발생했다. 현역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을 위해 그들을 불러 들여야만 한다. 그들이 참여할 것인가. 팀은 구성될 것인가. 지상에 두고 떠나야할 여인은 어쩌란 말이냐.
<아마겟돈>의 노익장 판<스페이스 카우보이>는 최근에 선보인 <식스티 세컨즈>와 함께 제리 브룩하이머 표 영화들의 소재와 구도를 그대로 따랐다. 다른 것이라곤 제리 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과 그 중심에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선물 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걸출한 배우 겸 감독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깊을 수 없을 정도로 골진 안면 주름과 신체검사에서 여실히 보여준 우글거리는 살은 신경질 가득한 표정으로 새로운 웨스턴과 형사물의 장을 열었던 젊은 이스트우드의 액션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을, 비록 몸 날려 뛸 수는 없어도 계속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영화의 시작은 폭발과 속도에 충분히 익숙한 지금에도 상큼할 정도의 흑백 하늘을 가르는 제트기의 원 샷. 우주 비행을 위해 훈련을 거듭하는 데덜라스팀의 넷, 프랭크 코빈(클린트 이스트우드), 호크 호킨스(토미 리 존스), 제리 오닐(도널드 서덜랜드), 탱크 설리반(제임스 가너)은 불과 10개월만에 3대째 최신형 초음속기를 땅에 쳐 박고 돌아왔다. 혈기 가득한 1958년의 이들 앞에 홍두깨 같은 나사 창립은 첫 우주인의 자리를 침팬지에게 넘기게 했고, 어색한 악수를 강요받아 팀원 모두가 각자의 현실에 안주한 지도 42년이 지났다.
@배우와 감독
"작품성과 세계적인 흥행 사이의 줄타기를 해온 진정한 작가"라는 이스트우드를 향한 베를린의 찬사는 적어도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크게, <미드나잇 가든>에서 작게 반짝였을 뿐이다. 우리의 영화판에서는 푸릇한 정우성이 늙기를 40년이나 기다려야 할까마는 헐리웃의 강점은 거의 무한의 자본과 대규모의 시장, 이미 획득한 세계성 외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자기발전의 배우겸 감독들의 존재가 한 축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구를 이끌고 최고의 도둑을 만들려 했던 <앱솔루트 파워>나, 사진기만큼 낡은 모습으로 로맨스의 가능성을 보여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고희를 넘어선 이스트우드는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그저 영화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려는 듯 보인다.
늙은이들의 우주행을 그린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는 눈물겨운 영웅담에서 벗어난 채로 마무리를 짓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앞서 말한 <아마겟돈>과 <식스티 세컨즈>의 틀은 갖다 붙였더라도 브루스 윌리스의 핫함이나 니콜라스 케이지의 쿨함을 그대로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진 않는다.
구소련의 통신위성 아이콘의 궤도이탈을 수정하기 위한 유일한 기술자 프랭크 일당, 데덜라스팀은 주위의 숱한 난관을 이겨가며 스페이스셔틀 속에서 카운트다운을 센다. 정작 그들이 그렇게 그리던 우주에서 만난 아이콘은 핵탄두 6개가 담긴 군사위성이었고, 이제 위성의 처리는 전적으로 프랭크 손에 달려 있다.
@노년의 유머
젊음과 권력은 서로 손을 잡기 어려운 두 마리의 토끼다. 현실의 반영체이자 이상의 표현물인 영화에서 이들을 맺어 놓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이유. 하지만 <스페이스 카우보이>에서는 젊음은 치기로 권력은 덧없음으로 취급되고, 시간이 흘러 남는 것은 나이든 육신과 젊은 꿈 자체임을 이야기한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임무수행에 뛰어든 이던의 행동이, 아니 불행의 씨앗을 품은 채로 속여온 거슨에 대한 비웃음은 결국 체제 자체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더라도 나름의 위치를 지켜온 이스트우드의 유머 인생관이다.
특히 우주에서 감격을 누리는 프랭크와 호크가 나오는 씬은 개중 백미다. 먼저 카메라는 지구본 같은 지구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프랭크를 클로즈 업으로 잡는다. 당연히 지구 모습을 보이는 리버스샷이 이어지고 멀리 뒤에서 잡은 롱샷은 지구와 프랭크 사이에 있는 우주를 효과적으로 담는다. 여기서 그쳤더라면 그저 그런 씬이었을 터. 이스트우드는 여기에 마초 기운 가득한 호크-그는 텍사스 론스타, 카우보이 복장이다-가 끼어 들어 같은 장면을 투샷으로 변주하고, 임무 수행하자며 "가자 카우보이"하는 둘의 아래에 지구의 자전을 이탈리아에 맞춰놓는다.
영화 곳곳에 들어있는 유머감각과 화면의 짜임새는 손 볼 것 없이 깔끔한 영화 달인의 형태를 갖지만, 아쉽게도 붕붕거리는 캐릭터와 딴죽걸기 식의 이야기하기는 역시 나이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願 溫故而知新 -두 가지 추측.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늙어서 멋진 네 배우를 전면에 부각시켜 중량감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별 급박하지 않은 임무 앞에 실없이 소비되고 만다. 프랭크와 호크는 예전 이스트우드 혼자 했던 배역을 그저 갈라놓은 것에 다르지 않고, 침례교 목사 탱크의 팔뚝에 있는 문신도, 제리의 대물(大物)의식도 영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저 피식거리는 팝콘거리로 남고 만다.
특히 비장미를 모두 짊어진 호크의 췌장암과 젊은 연인은 죽음을 내다보고 떠나는 '달나라로 여행'에 안타까움의 촉매가 되지 않고, 이를 묵묵히 바라보는 남은 팀원 역시 나이만큼 담담한 감정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감상주의를 지양한다고 누선(淚腺)을 막아 놓는 것은 관객과 상호작용을 주체로 하는 대규모 영화에 대입하기엔 너무 메마른 방식이다.
더 이상 영화 만들기의 기술은 진보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저멕키스가 손을 댄 버추얼 히스토리와 리얼리즘 이펙트는 스필버그의 로스트 월드 창조, 루카스의 사가 컨티뉴, 캐머론의 이벤트 강박과 함께 영화에서는 새로운 것 보단 자아와 외부매체 표현의 랩소디로 살아갈 것이다. 굳이 예를 들어 말을 하자면, 우주에 대한 표현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이후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아폴로 13>처럼 현실적이지도, 계속될 <스타워즈>시리즈처럼 풍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이스트우드는 갈 길을 굳혀야한다. 더 이상 줄타기는 그의 영화인생 대미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름기 빠진 인물들을 버무린다고 해서 차분한 인생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구로 힘든 액션은 <사선에서> 놓아두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지 않을 그의 <앱솔루트 파워>가 풍겨 나올 명작을 기다리는 것은 지나친 바램일까. 아니 이스트우드라면 기다릴 만 하리라 믿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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