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적비연수
-흔들리는 제작의 힘
@피와 육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생명을 떠올릴 만큼 풍부한 감성이라면 몰라도 피와 살점이 보인다고 공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적비연수>는 월식을 앞두고 천검에 바칠 마지막 생명을 낳고 있는 수(이미숙)의 출산장면을 그 시작에 두고 있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신산(神山)과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비(최진실)는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에 아버지 한(조원희)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한다.
멀리 유태인의 조상, '첫 번째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아흔 아홉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고통의 길을 떠난다. 아들을 묶고 칼날을 치켜세울 찰나, 순종의 포상으로 그는 예수의 직계 조상이 되고, 물론 아들의 목숨도 건진다.
수는 멸절을 위한 복수의 제물로 자신이 낳은 비를 바치려 한다. 생명이 죽음을, 죽음이 생명을 낳는 <단적비연수>의 관계 맺음은 부족의 한(恨)으로 모성을 배제한 수를 통해 어머니와 애인으로 양분되어 있던 국내 영화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것만은 사실이다. 화산족 역시 왕족인 연(김윤진)이 혈통의 중심이고, 단(김석훈)을 누르고 족장에 오른 적(설경구)을 제쳐놓고, 실질적인 제정일치의 지도자는 해아(이현순)가 남아 있는 식으로 모계 중심의 고대사회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의 집착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은 극과 배경의 중심에 서있으면서도 별다른 생명감을 전해주지 못한다. 이는 영화 전편에 걸친 비극이기도 한데, 주인공들과 더불어 숱한 생명을 내어놓으면서도, 애절함은 빠지고 핏자국만 남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에 한 몫을 하는데, 한없이 착한 표정을 짓는 김석훈과 전편의 연기를 그대로 재생하는 설경구와 김윤진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후 나아갈 줄 모르는 최진실과 함께 극중 내내 배우의 깊이를 생각나게 한다. 갈수록 더해 가는 이미숙의 연기 진폭과 짧은 등장 시간이 아쉬운 조원희의 중후함은 영화를 받치고 있는 힘겨운 기둥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담은 영화는 실제만큼 자연스러움을 알맞게 보여줘야 한다. 무채색 계열이거나 화려한 원색을 담은 도시와 달리 자연은 녹색이나 황색계열의 통일성 안에 서로의 빛을 덮으면 안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제현 감독의 첫 작품 <단적비연수>는 숲 속을 다룬 초록빛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선명하다. 숲 속에 만든 세트를 테마 파크로 만들 예정이라는 말이 오히려 아쉬울 정도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도록 하는 모습을 놓아두는 게 더 낫다.
화산족과 대립에서 잔인한 매족은 신산의 저주로 수 백년에 이르는 재앙의 날을 이어왔다. 천명의 죽음을 통해 신산의 맥을 끊어 놓을 천검은 마지막 제물로 화산족의 한과 수 사이에서 막 태어난 비의 피를 원한다.
<단적비연수>는 미지의 과거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자연을 인물들의 활동무대로 소비하고 있다. '신산'이라는 정령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신(神)'이라는 정신적 추상성과 '산(山)'이라는 물리적 구상성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런데, 이를 맺어 놓는 고리는 허약하기 그지없어, 그를 찾아 떠나려는 혹은 대립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환난을 일으키듯, 상황의 흐름보다 숲의 어느 한 쪽에서 헤매고 있는 그 순간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는 것이 보다 아름답다.
영화에는 자연에서 보일 수 있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산과 바다, 나무와 동물, 비와 눈, 그 안에 있는 사람까지. 하지만 이들의 어울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장한 사랑, 복수의 집념을 향해 큰 줄기를 그리지 못한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예를 들자면 성인식을 치루기 위해 불씨를 얻으려 떠나는 적과 단 일행의 앞길에는 푸른 숲 속과 날리는 눈발이 혼재한다. 짙은 녹색의 풀숲에서 뛰쳐나와 습격을 가하는 미지의 원시인이나, 눈 속의 야영장면은 서로 맛 대어 이들의 고난을 얘기하려 한다 짐작할 수 있지만, 단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편안히 놀라는 표정 같은 감정의 변화만 선물할 뿐이다.
@기억의 유전자
속편은 연속극에 익숙한 관객들의 열망이기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업가들의 잇속일 수도 있다. 이것보다 앞서야 하는 게 감독의 완성도를 위한 열정이라면 속편에선 적어도 전편의 낯설음이 주는 신선함을 낯익음으로만 변환시켜서는 안 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속편을 혹은 시리즈 물 속에서 손꼽을 정도로 기억나는 영화들 몇몇이 우리에게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단적비연수>는 <대부>의 세대를 넘는 비장한 흐름이나 <터미네이터>의 놀랄 만큼 진보한 기술 보단 <스타워즈>처럼 과거의 이전으로 방향을 잡았다. <은행나무 침대>가 담고 있는 천년전 생의 연인을 그 이전의 천년까지 올라가 '태고'라 이름짓고 인연의 수레바퀴를 기획했다.
전편 <은행나무 침대>의 인물들은 대략 중문(한석규)가 단과 선영(심혜진)이 연과 황장군(신현준)이 적과 미단(진희경)이 비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영화가 먼 훗날 침대가 된 은행나무의 굵은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바로 이점, 생은 시절을 넘어서 변했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억의 유전자를 담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황장군의 집착만이 적과 수를 통해 남아 있을 뿐, 대책 없이 넓은 단의 사랑과 운명에 무릎 꿇는 비의 순종이 애절한 균형의식, 연을 불쌍하게 할뿐이다.
한이 매족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 위기에 처한 비를 돕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이가 한인지 단인지, 아님 그 둘 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영화 이전의 인물 설정은 명확하지만, 혼란한 극 속에서는 힘을 잃고 만다. 끝내 주인공들의 목숨으로도 이는 보상받지 못한다.
@지휘자의 역할
영화에서 감독의 위치는 모든 결과물의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커다랗다. 제작이 다수 영화인들의 필연적인 공동작업일 지라도 결국은 크레딧의 마지막에 오르는 감독이 짐을 진다.
첫 작품를 들고 온 박제현 감독에게 조율의 중요성을 반복한 다는 것이 다소 잔인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군중씬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 영화의 디테일 문제는 여전히 완성도의 당락을 좌우하는 몇 안 되는 잣대다. 임권택 감독이 <춘향전>에서 보여 준 매끄러움을 경험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혼란하고 어색한 군중들의 움직임은 감독의 역량을 드러내는 표지 같다.
<단적비연수>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각각의 위치에서 잡아낸 색감을 독특하게 보여준 조명이라 하고 싶다. 안타까울 손 카메라는 칼만 들었다 하면 칼과 함께 고개를 저어대고 인물들은 태연함에도 위아래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지진이라 주장하는 식의 뻔뻔함을 내내 반복한다. 부유하던 카메라가 투샷(Two Shot : 인물 두 명을 담은 샷)으로 변할 때마다 돌아가는 이유 없는 원형 트래킹 샷 (Tracking Shot : 카메라를 바퀴 위에 얹은 상태에서 레일 위를 이동하면서 촬영하는 샷)은 개중 백미다. 그래도, 카메라가 액션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으면 자연을 다룬 색감이나 원근감이 조명과 함께 보기 드문 기름진 비쥬얼을 선물한다.
<단적비연수>는 각본과 연출을 겸한 박제현 감독의 작품이라기 보다 '강제규 필름의 2000년 첫 작품'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제작자 강제규씨의 전작인 <은행나무 침대>의 설정을 입어 '2편'이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카메라의 속도가 변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악과 인물들의 전형은 <쉬리>의 것과 조금도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강제규 감독이 바라보는 길은 스필버그와 비슷한 듯 싶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이 감독보다 크게 걸린 책임을 질만큼 사업보다 잡품에 역량을 쏟아야 할 것이다.
<비천무>를 용서한 너그러운 한국 관객이 혹시 받아 주더라도 말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 : 2)
-흔들리는 제작의 힘
@피와 육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생명을 떠올릴 만큼 풍부한 감성이라면 몰라도 피와 살점이 보인다고 공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적비연수>는 월식을 앞두고 천검에 바칠 마지막 생명을 낳고 있는 수(이미숙)의 출산장면을 그 시작에 두고 있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신산(神山)과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비(최진실)는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에 아버지 한(조원희)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한다.
멀리 유태인의 조상, '첫 번째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아흔 아홉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고통의 길을 떠난다. 아들을 묶고 칼날을 치켜세울 찰나, 순종의 포상으로 그는 예수의 직계 조상이 되고, 물론 아들의 목숨도 건진다.
수는 멸절을 위한 복수의 제물로 자신이 낳은 비를 바치려 한다. 생명이 죽음을, 죽음이 생명을 낳는 <단적비연수>의 관계 맺음은 부족의 한(恨)으로 모성을 배제한 수를 통해 어머니와 애인으로 양분되어 있던 국내 영화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것만은 사실이다. 화산족 역시 왕족인 연(김윤진)이 혈통의 중심이고, 단(김석훈)을 누르고 족장에 오른 적(설경구)을 제쳐놓고, 실질적인 제정일치의 지도자는 해아(이현순)가 남아 있는 식으로 모계 중심의 고대사회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의 집착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은 극과 배경의 중심에 서있으면서도 별다른 생명감을 전해주지 못한다. 이는 영화 전편에 걸친 비극이기도 한데, 주인공들과 더불어 숱한 생명을 내어놓으면서도, 애절함은 빠지고 핏자국만 남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에 한 몫을 하는데, 한없이 착한 표정을 짓는 김석훈과 전편의 연기를 그대로 재생하는 설경구와 김윤진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후 나아갈 줄 모르는 최진실과 함께 극중 내내 배우의 깊이를 생각나게 한다. 갈수록 더해 가는 이미숙의 연기 진폭과 짧은 등장 시간이 아쉬운 조원희의 중후함은 영화를 받치고 있는 힘겨운 기둥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담은 영화는 실제만큼 자연스러움을 알맞게 보여줘야 한다. 무채색 계열이거나 화려한 원색을 담은 도시와 달리 자연은 녹색이나 황색계열의 통일성 안에 서로의 빛을 덮으면 안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제현 감독의 첫 작품 <단적비연수>는 숲 속을 다룬 초록빛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선명하다. 숲 속에 만든 세트를 테마 파크로 만들 예정이라는 말이 오히려 아쉬울 정도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도록 하는 모습을 놓아두는 게 더 낫다.
화산족과 대립에서 잔인한 매족은 신산의 저주로 수 백년에 이르는 재앙의 날을 이어왔다. 천명의 죽음을 통해 신산의 맥을 끊어 놓을 천검은 마지막 제물로 화산족의 한과 수 사이에서 막 태어난 비의 피를 원한다.
<단적비연수>는 미지의 과거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자연을 인물들의 활동무대로 소비하고 있다. '신산'이라는 정령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신(神)'이라는 정신적 추상성과 '산(山)'이라는 물리적 구상성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런데, 이를 맺어 놓는 고리는 허약하기 그지없어, 그를 찾아 떠나려는 혹은 대립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환난을 일으키듯, 상황의 흐름보다 숲의 어느 한 쪽에서 헤매고 있는 그 순간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는 것이 보다 아름답다.
영화에는 자연에서 보일 수 있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산과 바다, 나무와 동물, 비와 눈, 그 안에 있는 사람까지. 하지만 이들의 어울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장한 사랑, 복수의 집념을 향해 큰 줄기를 그리지 못한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예를 들자면 성인식을 치루기 위해 불씨를 얻으려 떠나는 적과 단 일행의 앞길에는 푸른 숲 속과 날리는 눈발이 혼재한다. 짙은 녹색의 풀숲에서 뛰쳐나와 습격을 가하는 미지의 원시인이나, 눈 속의 야영장면은 서로 맛 대어 이들의 고난을 얘기하려 한다 짐작할 수 있지만, 단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편안히 놀라는 표정 같은 감정의 변화만 선물할 뿐이다.
@기억의 유전자
속편은 연속극에 익숙한 관객들의 열망이기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업가들의 잇속일 수도 있다. 이것보다 앞서야 하는 게 감독의 완성도를 위한 열정이라면 속편에선 적어도 전편의 낯설음이 주는 신선함을 낯익음으로만 변환시켜서는 안 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속편을 혹은 시리즈 물 속에서 손꼽을 정도로 기억나는 영화들 몇몇이 우리에게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단적비연수>는 <대부>의 세대를 넘는 비장한 흐름이나 <터미네이터>의 놀랄 만큼 진보한 기술 보단 <스타워즈>처럼 과거의 이전으로 방향을 잡았다. <은행나무 침대>가 담고 있는 천년전 생의 연인을 그 이전의 천년까지 올라가 '태고'라 이름짓고 인연의 수레바퀴를 기획했다.
전편 <은행나무 침대>의 인물들은 대략 중문(한석규)가 단과 선영(심혜진)이 연과 황장군(신현준)이 적과 미단(진희경)이 비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영화가 먼 훗날 침대가 된 은행나무의 굵은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바로 이점, 생은 시절을 넘어서 변했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억의 유전자를 담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황장군의 집착만이 적과 수를 통해 남아 있을 뿐, 대책 없이 넓은 단의 사랑과 운명에 무릎 꿇는 비의 순종이 애절한 균형의식, 연을 불쌍하게 할뿐이다.
한이 매족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 위기에 처한 비를 돕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이가 한인지 단인지, 아님 그 둘 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영화 이전의 인물 설정은 명확하지만, 혼란한 극 속에서는 힘을 잃고 만다. 끝내 주인공들의 목숨으로도 이는 보상받지 못한다.
@지휘자의 역할
영화에서 감독의 위치는 모든 결과물의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커다랗다. 제작이 다수 영화인들의 필연적인 공동작업일 지라도 결국은 크레딧의 마지막에 오르는 감독이 짐을 진다.
첫 작품를 들고 온 박제현 감독에게 조율의 중요성을 반복한 다는 것이 다소 잔인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군중씬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 영화의 디테일 문제는 여전히 완성도의 당락을 좌우하는 몇 안 되는 잣대다. 임권택 감독이 <춘향전>에서 보여 준 매끄러움을 경험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혼란하고 어색한 군중들의 움직임은 감독의 역량을 드러내는 표지 같다.
<단적비연수>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각각의 위치에서 잡아낸 색감을 독특하게 보여준 조명이라 하고 싶다. 안타까울 손 카메라는 칼만 들었다 하면 칼과 함께 고개를 저어대고 인물들은 태연함에도 위아래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지진이라 주장하는 식의 뻔뻔함을 내내 반복한다. 부유하던 카메라가 투샷(Two Shot : 인물 두 명을 담은 샷)으로 변할 때마다 돌아가는 이유 없는 원형 트래킹 샷 (Tracking Shot : 카메라를 바퀴 위에 얹은 상태에서 레일 위를 이동하면서 촬영하는 샷)은 개중 백미다. 그래도, 카메라가 액션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으면 자연을 다룬 색감이나 원근감이 조명과 함께 보기 드문 기름진 비쥬얼을 선물한다.
<단적비연수>는 각본과 연출을 겸한 박제현 감독의 작품이라기 보다 '강제규 필름의 2000년 첫 작품'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제작자 강제규씨의 전작인 <은행나무 침대>의 설정을 입어 '2편'이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카메라의 속도가 변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악과 인물들의 전형은 <쉬리>의 것과 조금도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강제규 감독이 바라보는 길은 스필버그와 비슷한 듯 싶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이 감독보다 크게 걸린 책임을 질만큼 사업보다 잡품에 역량을 쏟아야 할 것이다.
<비천무>를 용서한 너그러운 한국 관객이 혹시 받아 주더라도 말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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