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공동경비구역 JSA] 총알 끝의 이데올로기

열혈연구 2000. 9. 16. 14:09
공동경비구역 JSA
-총알 끝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비밀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더 이상 미소(美蘇)의 군비경쟁을 볼 수 없다는 말의 뻔뻔한 표현이다. 그 안에는 체첸의 학살, 사라예보의 비극은 물론 세상 한구석 한반도의 대치상황은 끼어 들 수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총격전을 유발한 공동경비구역 내 북측 초소에서 발생한 두명의 북측 군인이 살인 사건을 해결하러 찾아온 중립국 감독 위원회 소령 소피(이영애)수사관의 첫 번째 방한으로 문을 연다. 남한측 생존자 이수혁(이병헌)병장의 진술서와 주변인물들을 조사하던 소피는 감춰진 무언가를 인식하고 처음부터 사건을 재구성해 간다.

이 땅에 그어진 휴전선의 구획설정은 지리적임과 동시에 반세기를 끌어온 이데올로기의 분할 지속이다. 마르크스가 펜을 세워 쓴 자본론에는 산업혁명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국의 빈부에 대한 역류가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발생과 더불어 혁명의 국가로 탄생한 구(舊)소련은 '좀더 낮은 사회'에서 '보다 높은 사회'로 도약을 꿈꾸던 이상국가였던 것.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아 그들의 꿈은 접혀 과거가 되었고 대립이 남긴 비극만 존재할 뿐이다.

스위스는 지형학적 이유가 요구한 생존의 중립선택을 오래 전부터 이어왔다. 소피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송환을 거부했던 인민군 출신 장교 포로였다는 것과 그가 택한 나라가 중립국 스위스였다는 것은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데올로기의 변방에 위치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약점을 그대로 대입해 설명을 할 수 있게 한다.

양국의 첨예한 대립 속에 사건을 해결하러 온 소피의 흐릿한 위치는 이 영화가 갖는 태생적 약점, 즉 <공동경비구역 JSA>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질적 경제적 하부구조를 생략한 채 관념적 상부구조라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한 대립의 틈을 이야기하려 했다는 사상(思想)의 사상누각(砂上樓閣)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합의로 생명을 유지할 지라도 사람이 만든 가장 강력한 구속력인 법보다 잔인한 수많은 사례를 남기는 게 현실이다. 반세기전 흐릿한 정체성 속에 동포와 싸워야만 했던 우리의 아픔은 남북 지도자들의 악수 후에도 여전히 지속된다.


@상명하복의 법칙
국방의무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군인이 된다는 것은 나이 스물을 넘었다는 말과 그리 멀지 않다. 군대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시(戰時)를 대비하는 가장 비효율적 집단답게 무엇보다 철저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상명하복(上命下服)이다. 지휘관은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서 선택의 고민을 덜어내고 결과의 책임을 제거해야할 의무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여전한 냉전의 최전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군대사회 안에서 이성과 사고에 앞서는 철저한 상명하복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상부의 명령이 표장군이 착수한 소피의 뒷조사나 최상위의 오경필(송강호)중사에 대한 적개심처럼 은폐로 유지되는 평화 혹은 비뚤어진 증오로 나타나고, 하부의 병사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훈련도중 낙오나 책임지역을 이탈하는 등 군법위반으로 대답하는 현실의 표현이자 또 다른 군대영화의 등장이다.

소피는 소령 계급장을 달고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왔지만 피의자들의 고백을 얻어내는 마지막에서 거슬러, 자격 박탈의 원인인 아버지의 과거와 초반의 표장군에 대한 접근 금지 통보까지 상명하복을 기반으로 하는 군대체제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장교로 성장한 지금까지 접어둔 가족 사진 속 아버지처럼 외면한 한반도의 과거와 현실에서도 이방인인 것과 마찬가지다.

평등한 세상을 소원(所願)하는 지금이지만 여전히 소원(疎遠)한 평등에 대한 꿈처럼, 남북대치와 군인 집단이라는 특수성을 외면한 채 집요하게 진실에만 접근하려 했던 소피가 사건의 중심에서 배격되고, 진위를 발표하지 않은 채 물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인 것이다.

총격전의 여부와 상관없이 지속되는 대립상태처럼, 전쟁은 결국 겉으로 드러난 일개 사건을 방아쇠 삼아 발사되는 총알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 삼아 사후(事後)에 작성하는 진술서 같은 것이다.



@휴머니즘의 진폭
흔히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이해하는 휴머니즘은 종교에 구속당했던 사상과 육체의 제약을 벗고자 발생한 반역의 몸짓이었다. 이것은 원죄의 짐을 맨 인간에서 떠나 신에게 놓여있던 중심축을 문예(文藝)를 통해서나마 옮겼다. 휴머니즘은 인간성을 존중하며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을 시작으로, 멀리 건너뛰어 18세기 독일과 니체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간중심의 산물을 낳았다.

반복되는 일과와 긴장, 계급과 지시,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억압을 포진한 최전방 군대생활은 실질적인 남북대립의 경험이 일천한 현세대에겐 도무지 까닭 없는 어려움일 수 있다. 군생활을 걱정하는 남성식(김태우)일병이 이병장의 권유에도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기를 망설였던 것은 분단의 현실처럼 선을 그어 갈라놓을 수 없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염려처럼 기억된다. 그가 취조 중 거짓말 탐지기 운운에 뛰어내린 창문에서 이병장과 눈맞춤은 그래서 극 전체를 잡고 있는 비장의 끈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진술서의 내용과 병사들의 기억 그리고 고백과 사건이 시간을 교차시켜 나열한 형식을 띠고 있다. 돌멩이로 감싼 편지에서 노래테이프, 다리를 건너 이병장이 북한측 초소에 들어서고, 끝내는 남일병까지 합류해 벌이는 넷의 군대생활은 이데올로기를 생략한 휴머니즘의 한 면을 곰살궂게 보여준다.

하지만 월경(越境)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던 그들의 유대관계는 자동으로 뒷면을 재생한 카셋트 속의 록음악으로도 깨질 만큼 위태로운 현실에 발을 딛고 있었다. 자신이 선물한 미술도구를 받아들고 기뻐하던 정우진(신하균)전사의 구멍 뚫린 시체를 봐야했던 남일병의 혼란한 정신이 결정한 투신처럼 조절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다.

이병장이 갈대 숲에서 밟았던 지뢰를 기점으로 미스터리에서 코미디로 전환하는 영화는 웃음에 집중한 남북병사의 만남이 지나치다 싶을 때를 꼭 짚어 전장의 비장함으로 돌아온다. 지난 8.15 이산가족 상봉만큼 감격스럽던 사인조의 모습이 끼어 든 타자(최상위)로 인해 떨리는 손끝의 총과 흐르는 눈물의 대치로 변하는 것에 비해 총탄이 오가는 총격전과 냉정한 수사는 아쉽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일상의 친밀함으로 설득력보다 격양된 관객의 감정은 예리한 상황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휴머니즘을 향한 변증법의 법칙에 쉽사리 끼어 들기 어렵다.


@영화광의 생존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친 오중사의 가슴에 달린 훈장은 남일병의 투신이후라는 것과 맞물려 볼 때 30억의 대자본이 들어간 영화의 표현 한계를 드러낸다. <공동경비구역 JSA>속의 모든 인물들은 외부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과 체제에 대한 상대적인 순응을 갖고 있다. 총을 서로 겨눌 수밖에 없었던 정전사나, 권총을 바꾼 채 돌아왔던 남일병이나 육군병원으로 후송을 앞두고 총을 입에 넣은 이병장 모두가 넘지 못한 선은 이전까지 영화가 안고 있던 숙제, '주인공의 죽음'이 아니라 영화광으로서 살아가는 감독의 순결이었다.

데뷔 9년만에 자신의 세 번째 영화를 들고 온 박찬욱 감독은 애정을 표하기 숨기지 않았던 B 무비의 흔적만 이곳에 남겨놓고서 이미 다음 영화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듯 보인다. 이는 자신의 형식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새로운 경지에 오른 이명세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생각하면 조금 아쉽더라도, 그의 냄새가 풀풀 나는 다음 영화를 기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또 그는 젊지 않은가!

저예산 비디오 에로 영화 이외의 하부구조가 빈약한 우리 영화 환경에서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더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안이다. 돌이켜보면 축복 받은 연간 제작편수 200편 시절의 감독들처럼 더 이상 영화를 필름으로 찍으면서 학습하고 진보해 가는 시절은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박감독이 보인 이번 행보는 앞으로 속속히 등장할 영화광 출신 감독들의 전형, 즉 관객이 좋아할 영화와 자신이 좋아한 영화를 구분 지어 만들어 내는 형태로 자리 잡을는지 모른다.

다음작품이 감독의 입맛대로라면, 차차기작 정도에서는 이제껏 보지 못한 '잘 만들어진'영화를 박감독을 통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무리한 과거생략으로 빈약한 행동의 당위성과 여전히 유효한 <나생문>혹은 <저수지의 개들>의 대입법, 넓은 관심을 드러내는 캐릭터의 범람, 전체를 이어주는 집중도의 연약함 등은 연혁이 늘어가는 만큼 토성(土城)처럼 단단히 다질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함께 하기를 바라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