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할로우 맨] 욕망과 신화사이

열혈연구 2000. 9. 10. 22:25
할로우 맨
-욕망과 신화사이

@생로병사의 비밀
배란기의 난자가 수억의 경쟁자를 뚫고 도착한 정자와 만나는 일은 우리의 숱한 인생에서 어디쯤 차지하고 있을까. 10개월에 이르는 모체와 태아의 유대관계는 양수를 터트리고 궁전에서 세상으로 첫 울음소리가 들리기까지 필연이지만 다음은 온몸을 감싸고 있는 환경의 몫.
생명이 생명을 부르고, 세월이 고통을 더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우리는 인생이라 한다.

네덜란드 출신 감독인 폴 버호벤이 미국에 온 것도 어느새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에게서 누구나 먼저 흥행과 오락을 찾지만 그는 소재와 장르의 교차를 통해 끊임없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헐리웃의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내는 한계 실험치였다. <로보캅>, <원초적 본능>에서는 신체의 도구화와 주연 여배우의 자세 하나로, <쇼걸>, <스타쉽 트루퍼즈>에선 표현 수치, 등급문제와 느닷없는 군국주의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버호벤의 영화 중심엔 언제나 욕망과 기억의 분열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욕망의 출구로 섹스나 일탈을 택하거나-<원초적 본능>, <쇼걸>-, 기억의 진위로 정체성을 위협받는다.-<로보캅>, <토탈리콜>.

태초에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흙을 빚어 첫 인류, 아담을 만들었을 때부터 피조물은 언제나 조물주를 반영한다. 수없이 계속되는 다채널 TV에서부터 라디오, 신문, 책을 거쳐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매체 속의 산물들은 제작자의 무언가를 담은 채 의식적 소비와 무의식적 교육을 포함한 대중의 반응을 기대한다.

죽어간 경찰을 살려내 사이보그를 만들거나, 자신을 둘러싼 모두가 주입된 기억이거나,
무지한 모두를 농락하는 팜므파탈을 연출하거나, 등급의 경계에서 혼란한 하위문화를 그리거나, 투철한 병사를 양산하는 군국, 전제주의를 예찬하거나 모두 버호벤의 산파를 통했으니 말이다.

시의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인생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어찌나 많은지.
또 하나의 비밀을 막 풀어 내놓은 영화 한편이 있다.
자, 답을 찾는 것은 여러분의 몫.

@신과 인류사이.
진위에 관계없이 '한단고기'류의 사서가 의미를 갖는 지금.
4333년을 맞은 우리의 역사는 멀리 거슬러 단군 할아버지에 이르는 건국 신화를 샘의 근원으로 한다.

환웅이 여든 여드레 굴속에서 마늘과 쑥으로 지낸 웅녀와 이룩한 단군 조선은, 하늘의 존재인 신과 자연의 존재인 동물이 사회의 존재인 인간과 결합하고 주위에 환웅을 호위한 비, 바람, 구름마저 자리하고 있으니 스스로 그러한(自然)이들이 비롯해 만든(創造) 완전한 시작이다.

비가시(非可視) 존재인, 신의 가시화(可視化)에 대한 인류의 끊임없는 노력은 수많은 신화와 함께 갖가지 초인을 개념화해 통용시키고 있고 그 중 하나, 투명인간이 있다.

국방성의 비밀 프로젝트인 '투명 생물체'의 팀장 케인(케빈 베이컨)은 자아 중심적인 천재의 전형. 그가 투명화 했던 고릴라의 원상복귀를 성공시키자 상부에게는 비밀로 한 채 자신을 대상으로 '투명인간'을 실험하는 다음 단계에 착수한다.

뛰어난 영감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실험과정의 전체를 통제하고 있음을 강조하는데, 나아가 '내가 신이다'를 외치는 행동에 이르면 신화(神化)를 소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Wednesday'의 어원이기도한 북구의 주신(主神), 오딘은 마력을 위해 어떤 어려움이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신화에서 드문 탐욕적인 지식의 갈구자였다. 또한 그는 전사들에게 광란과 격노를 불어넣어 전투를 유발하는 싸움의 신이기도 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의 호색기질까지 더하면, 바로 과학자이자 투명인간인 케인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하지만.
신과 인류사이에는 커다란 생명의 벽이 놓여있고, 이쪽 벽 뒤에 남겨있는 가신(假神)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체제의, 체제에 의한, 체제를 위한,
생명의 생산은 가족을 기반으로 한 씨족에서 부족, 국가에 이르는 사회로 진화했고, 그 안에 인류는 아침과 밤이 교차하는 순리를 본떠 질서를 만들었다.

헌법, 법률, 명령, 조례, 규칙 같은 성문법이나 판례의 누적물인 불문법 같은 강제성에서, 도덕 예의처럼 교화성을 띄는 이 모두가 만들어내는 질서를 체제(體制)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체제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일부와 체제의 틀 안에 안주하는 다수의 '공동체제 만들기'다. 지금은 몰락한 냉전시대의 한 축을 보면서도 익히 알고 있듯이, 체제를 바꾸는 힘은 단연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다.

뛰어난 해부학적 신체의 묘사로 놀라움을 선물하던 <할로우 맨>은 케인의 복귀가 불가 판정을 받은 후, 욕망의 이상분출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전과 사뭇 다른, 공포영화의 문법을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 비밀리 진행되던 프로젝트의 전권을 갖고있는 상태에서 투명인간이 된 그가, 예상치 못한 결과로 계획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하는 체제(국방성 비밀위원회로 대표되는)에 대한 거부의 시작이 기껏 관음증의 출구, 즉 성욕의 분출이었다는 점은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분열의 발열반응으로 증가해야할 긴장도를 여지없이 꺾어놓고 만다.

말하자면, 투명인간으로 변한 케인이 자신의 목표지향성에 생명을 들고 거부했던 수의사의 잠든 가슴을 열어 만지는 첫 번째 장난에서, 흑인 연구원의 화장실을 훔쳐보고, 건너 집 여인을 덮치는데 멈추지 않고, 애인이었던 린다(엘리자베스 슈)의 몸을 끊임없이 탐하는 것으로 또 다른 해석의 여지와 신경의 긴장을 스스로 줄이는 식이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 단추를 쥐고 있는 국방성의 박사와 장군들에 대한 체제 일탈로 시작했던 케인의 실험은 돌이킬 수 없는 육신의 가시화로 실패하면서, 유아의 수집벽(끊없이 늘어가는 장난감처럼), 소년의 잔혹성(손과 발끝에서 죽어간 작은 생명들), 청소년의 성욕같은 천재 과학자의 퇴행을 그저 멍하니 쫓아간다.

당연히 둘러싸고 있는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충족으로 변질되어 타락한다.

@여전히 틀 안에서.
영화는 쥐 한 마리가 물그릇이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형체를 감추고 있는 존재가 날카로운 무언가로 사지절단 할 공포를 사고하지 못하는 쥐의 달음질 뒤에 놓여진 우리의 철장.

실험실 안 우리(틀)는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실험 동물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경계임과 동시에 실험 대상을 대기, 관찰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 안에 놓여진 수많은 동물들은 차례대로 실험대에 올려질, 예상치 못할 결과의 리트머스 종이일 뿐이다.

케인이 끊임없이 지하벙커에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 역시, 자신의 투명한 육체를 탄생시키고 소멸시킬 수 있는 비밀에 가장 근접한 실험실의 경계를 넘고, 정부의 지원과 관리를 통해 소모되어 가는 과학 연구의 도구화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할로우 맨>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의도를 자연스럽게 풀어가지 못한다.

순간이동을 연구하던 천재 과학자가 파리와 결합되어 발생하는 풍성한 자아혼란의 <플라이>나, 과학의 한계로 종료할 수밖에 없던 인류배양 외계생물의 탈출과 생존을 다룬 <스피시즈>만큼 말이다.

투명 생명체의 동맥부터 내장과 뼈, 피부와 털을 입혀 가는 장면을 손에 잡히듯 실감나게 보여주던 발전된 테크놀로지는 케인의 철학을 더욱더 제한하고, 기껏 '투명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살인과 섹스에 한정지어 놓은 또 다른 틀이 되었다.

결국 정체성 손실이나 복귀의 불투명성, 생명을 다룬 시행착오에 대한 고민이나, 감정의 문제인 사랑, 동료애 등은 간 곳 없고 능력위주의 일렬서기에 벗은 육신만이 붙어 같혀 있는 꼴이다.

매번 극단의 선택으로 기술과 소재를 실험하던 폴 버호벤의 기질이 지금은 덫이 되어 그의 발목을 물고 있다.

갇히느냐 가두느냐 이제 그것이 버호벤의 문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