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우연이다. 영화 3편이 무더운 8월 극장가를 장악했다. 시작은 사기, 도박, 도둑질에서 독립운동으로 돌아선 최동훈의 <암살>이었다. 이어 국정원의 각종 은폐 사건을 떠올리게 한 <미션임파서블 5: 로그네이션>이 등장했다. 가장 늦게 선보인 건 대기업의 자제의 망나니 짓을 쫓아간 <베테랑>이다. 비밀 정보기관 IMF 옹호로 끝나는 <IM5>는 610만명을 즈음해 뒤로 밀려났다. 반면, 친일파 청산이라는 판타지를 선물한 <암살>은 언론의 침묵 속에서 1250만 관객을 넘어섰다. 누군가의 광복절 특사에 고춧가루를 뿌린 듯한 <베테랑>의 흥행도 당당하다. 1200만명을 넘길 기세다. 무더위를 피해 극장을 찾듯이, 답답한 현실대신 스크린 위에서나마 2400만 한국관객이 정의실현을 외친 셈이다.
장-루이 보드리(Jean-Louis Baudry)는 영화장치(dispositf cinematographique)라는 개념으로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비판했다. 카메라로 찍고, 필름에 담아, 극장에서 스크린 위에 영사기로 보여주는 일련의 ‘영화장치’가 관객의 주체성을 누르고 이데올로기 생산에 기여한다는 주장이다. 감독은 영화장치로 관객에게 특정 생각을 전달하려 한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단지 재미라는 효과를 만들기 위해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가 지향하는 목표는 단연 돈벌이다. 이런 영화들을 우리는 상업영화라고 부른다. 관객들은 상업영화를 보고 나올 때 거의 같은 감상을 나눈다. 장면의 화려함이나, 인물의 멋짐 또는 사건의 감동을 이야기한다. 보드리가 말한 영화장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
그렇다고 보드리의 주장이 모든 영화에 적용되진 않는다. 극장의 같은 출구에서 나왔지만, 관객들이 전혀 다른 영화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위플래쉬>를 놓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논쟁의 핵심은 ‘선생인 플렛처는 학생을 괴롭히는 미친놈인가?’였다. 적잖이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 누군가는 플렛처를 옹호했고, 누군가는 그를 비판했다. 그런 선생을 만나고 싶다는 이도, 그를 사이코패스라는 부르는 이도 있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누군가는 앤드류에게 악보를 주지 않은 게 플렛처의 복수라고 했고, 그것조차 한단계 올라서기를 바라는 선생의 가르침이라는 이도 있었다. 이 정도에 달하면, 감독인 데미언 차젤이 플렛처의 인간됨을 어떻게 구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객이 영화장치의 틀을 넘어서 주체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드리의 영화장치 개념을 이루는 핵심은 ‘극장’이라는 공간이다. 현실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된 극장은 폐쇄되고, 어둡고, 고립된 관람환경을 제공한다. 뒤에서 나오는 빛과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라는 방향성까지 더해 오직 영화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극장에선 걱정도, 과제도, 카톡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가 제공하는 극중세계(diegesis)는 자꾸만 관객의 현실감각(sense of reality)을 자극한다. 관객은 말도 안되는 영화 속에서 자신이 듣고, 보고, 행동했던 삶의 형태를 찾으려 한다. 허구 속에서 현실의 흔적을 모색하며 공감을 시도한다.
현실과 영화의 교차는 <베테랑>의 외연에서부터 반복된다. 외유내강. <베테랑>의 제작사 이름이다. 화려한 손놀림과 발재간 없이도, 나무 뿌리처럼 흔들리지 않고 상대를 옥죄는 무시무시함. 유도의 모토 비슷하게 사용되는 사자성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제작사의 대표 강혜정과 류승완은 내외지간이다. 이름 그대로 적용하자면, 류승완은 부드러움을, 강혜정이 강함에 해당하겠지. 썩 어울리는 작명이다. 남편은 소수의 사내들만 좋아하는 쌈꾼 이야기, 그것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냄새를 영화에 물씬 집어 넣으려한다. 대중의 기호에는 취약하다. 그래서 아내가 인간미 있는 인물관계와 싸움의 필연성을 첨가한다. 액션영화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둘의 손발은, 이른바 합이 척척 맞는다.
<베테랑> 속에도 합이 잘맞는 부부의 모습이 있다. 형사 서도철은 밑도 끝도 없이 용감하다. ‘쪽팔리게 살지 말자’를 내세우는 원칙주의자다. 그의 아내 주연도 이에 못지 않다. 둘은 솟아오르는 전세금을 마련하려면 대출 밖에 답이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부는 꿀보다 달콤한 전세금 마련 제안을 모두 거절한다. 주연이 최상무의 뤼비통 가방과 돈다발을 매몰차게 거절할 때 밀려드는 쾌감은 제법 짜릿하다. 돈이면 꼼짝을 못하는 우리네 속물 근성의 크기에 비례하는 쾌감이다. 둘의 행동논리는 단순하다.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도철-주연부부의 모습처럼 외유내강이 만드는 영화도 쪽팔리지 않은 영화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환골탈퇴한 것은 아니다. 사나이 의리와 싸구려에 대한 류승완의 애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불법 중고차 시장을 덮치는 첫번째 시퀀스는 그런면에서 외유내강의 내공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언젠가 사회면 뉴스에서 들었을 법한 사건이다. 캐릭터도 사건진행도 표현양식도 다찌마와리 모양 그대로다. 그렇다고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구축된 도철과 동료들의 성격, 습관, 철학 등은 영화 내내 지속된다. 호탕함과 남자다움을 내세운 류승완 스타일이다.
그의 영화에서 한번 악당은 끝까지 악당이다. 이번엔 마약쟁이 재벌 3세 조태오다.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고, 인간을 돈의 분량으로 바라보는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재벌가 3세의 가장 나쁜 모습에 근접하다. 뼛속까지 나쁜 짓을 하는 놈이지만, 생명력이 넘친다. 태오는 <베테랑>을 류승완 영화에서 진일보한 외유내강 영화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재벌은 왕정시대의 왕, 신화의 신의 모습에 근접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쪽팔리지 않고 살겠다는 도철만큼이나 태오도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그 비현실성에 현실감각을 불어 넣는 것 역시 돈이다. 주연이 최상무의 제안을 거절할 때 관객이 느끼는 쾌감은 태오에게 정반대로 작용한다. 그가 드러내는 돈과 힘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왠지모를 현실감각을 자극한다. 여기에 신화와 전설이 더해진다. 태오가 마주하고 있는 개인적인 두려움은 기업이라는 왕국을 이어받을 수 있을 지에 관한 것이다. 태오는 첩의 자식인 자신이 형과 누나를 물리치고, 검찰의 조사로 왕위에서 물러나야 하는 아버지의 간택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역사와 신화의 흔한 소재인 왕위 계승문제다.
서자임을 만회하기 위해 그는 더 장자처럼 행동한다. 재벌의 권위를 드러내는 망나니 짓을 멈추지 않는다. “이 나라는 기업해서 돈 버는 사람을 죄다 죄인 취급이야.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이 나라 굴러가는 것 아냐!” 태호의 대사다. 맞는 말이다. 기업에서 내는 세금은 나라를 지탱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동시에 이 세금을 어떻게 든 줄여보려고 저지른 절세 또는 탈세 행위가 재벌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든다. 나아가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태오 같은 녀석들과 돈과 성공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상무 같은 놈들 때문에 범죄가 양산되는 세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 지강헌이 외쳤던 이 말이 오죽하면 유령처럼 이땅 위에 수십년때 떠돌고 있는 것일까.
보드리의 영화장치에 대한 지적은 영화로써 68혁명의 임무를 실행하려 했던 고다르의 결심과 일면 맛닿아 있다. 시간은 흘렀고, 관객만큼이나 영화도 변했다. 예전보다 많은 관객이, 이전보다 실감나는 영화를, 요전보다 빨리 잊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장치가 만들어내는 또는 영화장치를 넘어서 만들어가는 의미들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가졌다고 모두 천박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버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면에서 <베테랑>은 <암살>만큼이나 좋은 돈벌이의 예를 보여주었다. <암살>이 반박할 수 없는 독립투사의 숭고함을 건드렸다면, <베테랑>은 생활 밀접형 소재를 들고 나왔다. 겉에는 상업영화라는 야들야들함을 바르고, 안에는 정의라는 가슴 뛰는 주제를 집어 넣었다. 그로 인해 얻은 천만영화 감독이라는 명성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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