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그래도 외치면 들으리라! : <동주>와 <귀향>의 흥행 분석

열혈연구 2016. 3. 4. 15:19




뜨거운 2월이 지나갔다. 극장가 소식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한국영화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대형 흥행작을 고대하던 극장들은 <검사외전>의 등장에 환호했다. 이 영화는 전국 2489개 스크린 중 1806개를 장악하며 스크린독과점 논란을 자초했다. 설을 전후로 <검사외전>의 좌석점유율은 60%를 넘나들었다. 조조와 심야상영을 고려할 때, 황금시간대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는 정도의 수치다. 극장측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자본주의 논리를 강조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설 연휴 극장가에서 <캐롤>이나 <자객 섭은낭>을 만나는 건 하늘에 별따기였다. 분명한 수요가 있는데도, 공급은 요원했다. 그렇게 시장경쟁을 주창하는 극장가에 작은 반기를 든 영화가 등장했다. 오늘 이야기할 <동주>와 <귀향>이 그 주인공이다.


관객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작품은 <귀향>이다. 2월 24일에 개봉한 <귀향>은 통합영화전산망 발표 기준으로 3월 4일 현재, 누적 관객수 193만명을 돌파했다. 80만 관객이 개봉 2주차를 넘긴 <동주>를 찾아 봤다. 1천만 관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검사외전>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총관객수만큼이나, 지금 주목받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귀향>과 <동주>는 흥행 1위와 5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적어도 3월 첫째주 한국 관객들은 7위까지 내려 앉은 <검사외전>보다 이 두 편의 영화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시작이 좋았다. <동주>는 설연휴를 보낸 2월 17일에 개봉했다. <검사외전>의 거센 흥행 바람이 급속히 꺼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첫주말 21만명을 동원했고, 둘째주말까지 61만명이 찾아봤다. 무난한 흥행추이다. <귀향>이 개봉한 2월 24일은 반값에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화의 날이었다. 첫주말 106만명이 이 영화를 찾아봤다. 그리고 두편 모두 3.1절을 기준으로 흥행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특히 <귀향>은 3월 1일 하루에만 43만명을 동원했다(<동주>는 9.6만명). 연휴이기도 했지만, 두편 모두, 일제강점기에 고통받은 인물을 다뤘다는 점에서 3.1절 특수를 누린 셈이다. 


CGV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두편 영화의 흥행에 있어 독특한 지점이 있다. 보통 흥행영화의 관객비중은 성별로 남녀가 각각 4:6 정도다. 연령별로는 20, 30, 40대가 근소한 차이로 30% 내외를 차지하는 게 일반이다. 그런데, <동주>와 <귀향>은 관객의 성별, 연령별 구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두편 모두 약 75%내외로 여성관객의 비중이 확연히 높다. 또 20대 관객 비중이 40%를 웃돈다. ‘<동주>와 <귀향>의 흥행은 20대 여성관객이 주도하고 있다’는 가정으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제작방식과 규모로 보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성격의 영화다. <귀향>이 순제작비 25억의 중규모 상업영화라면, <동주>는 5억짜리 저예산 영화다. 두편 모두 손익 분기점은 넘어섰다. 두 영화의 홍보 방식은 서로 엇갈렸다. <귀향>은 상업영화이면서 독립영화처럼 홍보를 진행했다. 개봉 전주까지 국내 최대극장체인인 CGV의 상영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외상영회를 통한 호평과 정부의 위안부문합의 문제가 도드라지면서 <귀향>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결국 CGV의 상영도 이끌어냈다. 


반대로 <동주>는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홍보 전략을 택했다. (제작사 측에서 직접 진행하지 않았더도) 시집 재발간, 소설출간 등 관련 상품 출시, 배우와 감독의 다수 매체 인터뷰 등 전형적인 상업영화처럼 잠재적인 관객에게 접근했다. TV와 영화에서 주목 받고 있는 강하늘이라는 배우의 착한 이미지는 윤동주라는 캐릭터와 높은 일치도를 보였다. 윤동주는 딱히 흠잡을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아름다운 시를 쓴, 요절한 젊은 대학생이라는 캐릭터는 선한 희생자로서 모성애를 자극했다. 또 혁명가 아닌 문학가(특히 시인이)라는 점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관심영역에 가까웠다. 


사회, 역사 분야의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적인 연출과 공감도 높은 이야기로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도 강조되었다.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윤동주의 무난한 삶을 송몽규의 굴곡진 인생과 엮어 놓은 구성도 돋보였다. 영화의 초점도 독립, 저항 보다는 문학, 운명에 맞췄다. 일제강점기 모던한 대학생의 비극이라는 부조리한 매력이 강조됐다.


배우와 감독의 인지도 측면에서 <귀향>은 동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20대 여성관객이 선망의 대상으로서 윤동주에 접근했다면, <귀향>은 관객동일시를 자극하는 젊은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앞세웠다. 최근 위안부소녀상 철거반대에 가장 높은 관심을 보였던 이들은 다름아닌 20대 여성이었다. <귀향>의 힘은 위안부라는 소재에서 시작한다. 여성 관객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가정법,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당함에 저항하는 듯한 지적 자부심을 선물한다. 


최근 몇 년간 세월호, 국정교과서, 친일인명사전, 테러방지법 등을 관통하며 일종의 각성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무고한 이가 나쁜 시대에 희생된다는 점에서 <귀향>과 <동주>는 현실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편 모두 고통 받은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자신들보다 N배는 힘들었던 시대의 아픔을 목격하면서 일종의 위안을 받는 영화다. 


흙수저를 가지고,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N포세대가 갖고 있는 일련의 맥락은 무조건적인 포기가 아니다. 금수저와 갑의 횡포, 행복한 가정도, 번듯한 직장도 갖기 힘든 현실에 대한 분노의 소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해외로 떠날 계획을 짤만큼 이들은 적극적이기도 하다. 혁명을 꿈꾸지는 못할지언정, 혁명가들을 기억하며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공감 능력이 N포세대의 가슴에 자라나고 있다. 남성보다 여성이 나은 지점이다.  


2010년대 중반, 시장경제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인양 온 세상이 돈 돈 돈을 외치고 있다. 자본주의라고 써놓고 배금주의처럼 받드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우경화 길을 걷고 있는 TV와 언론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다. 정당한 비판을 하면 하릴없는 불평이라고 비난 받을까봐 두려워한다.


최근 한국의 극장가는 2시간 짜리 해방구처럼 작동한다.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룬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유독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베테랑>, <암살>, <내부자들>, <검사외전>등 사회에 자리잡은 숨겨진 악을 알리고, 뿌리 뽑으려는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들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마음에는 ‘사회는, 정치는 썩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이 이 사회의 일원임을 거부하고 싶은, 탈헬조선을 외치는 이들이다. 지난해말, 국가미래연구원이 의뢰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응답자의 65.3%가 동의했다고 한다. 엄청난 수치다. 슬픈 결과다.(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604313).

 

이러한 흐름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괜한 불평하는 목소리 큰 녀석들이 있다’는 시선도 있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나라 국민으로 살고 싶다는 비중이 정확히 절반이라는, 최근 한국일보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2016년 1월 19일자. 개인적으로 이 조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물론, 같은 조사에서 같은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의견(39.8%)도 다른 나라보다 많았다.(일본(8.8%), 덴마크(10.4%), 브라질(37.2%)). 이러한 시선은 <국제시장>, <연평해전>, <희말라야>로 이어지는 영화들의 흥행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고난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같은 두가지 시선이 공존하는 지금, <동주>와 <귀향>은 사뭇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처럼 악을 처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런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국제시장>이나 <연평해전>처럼 무작정 국가가 지시하는 길이 옳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외부의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해 겪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은 개인의 것이지만 사회의 동의를 이끌어낸다. 개인의 슬픔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동주>와 <귀향>에 있다. 세상을 뒤흔들 목소리는 없어도, 함께 손잡고 울어줄 눈물은 충분하다. N포세대를 만들어낸 사회와 그 사회의 주류에 대한 패배의식이 이 두 영화에 대한 감동을 더하는 슬픈 결과가 만들어지고 있다. 힘없는 두 영화가 치열한 극장시장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양화가 악화를 구축(驅逐)하는 ‘헤븐한국’의 꽃이 이 봄날에 가득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