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나의 절친 악당들 Intimate Enemies>- 쿨하게 만든 영화, 차갑게 보인 영화

열혈연구 2015. 7. 21. 21:50

임상수의 장점은 남들이 망설이는 소재를 다루는 과감함이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특히 개봉 직전까지가 그렇다. 소재와 포스터, 예고편의 섹시함을 벗고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 그의 영화들에 대한 호오가 갈린다. 실망의 대부분은 민감한 소재와 달리 가는 영화의 방향에서 생긴다. 목의 가시처럼, 발가락 끝 모깃자국처럼 분명 빠질 것 같은데, 긁으면 될 것 같은데전복적인 소재를 다루는 그의 자세는 종종 기대보다 보수적이다. <나의 절친 악당들>도 그랬다.

 

절친과 악당을 연결시킨 부조리한 제목, 폐차장의 낡음 위에 자리한 말끔한 인물의 포스터. 뭔가 쿨하다. 감독이 기대한 관객의 반응도 딱 이 정도였지 않을까? <나의 절친 악당들>에는 쿨내가 진동한다. 휠므빠말(film pas mal). 프랑스를 사랑하는지, 제작사 이름도 불어다. ‘괜찮은 영화라는 뜻이지만, 문자 그대로는 나쁘지 않은(not bad)’ 영화다.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개념이다.

 

<나의 절친 악당들>은 극단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인물만 봐도 그렇다. 드러난 대사와 행동은 한없이 가벼운데 반해, 감춰진 이들의 과거는 대단히 무겁다.  터질듯한 슬픔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감정에 의지해 행동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같은 이상한 설정이 대부분의 배역에 적용된다. 인물의 행동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에 따라 작동한다. 당연히 이들의 본심을 알긴 대단히 힘들다. 잘 차려진 잔치에서 뛰노는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실체는 거의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모든 사건은 돈가방의 행방에서 시작한다. 돈가방을 잃어버린 회장, 정치인 그리고 하수인들과 돈가방을 훔친 인턴사원, 견인차운전사, 흑인불법체류자가 맞부딪친다.  돈을 찾는 자와 돈을 숨기는 자의 대립은 흔한 구도다. 잃어버린 자는 찾기 위해 힘쓰는 능동자이고, 훔친자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피동자다. 그러나 <나의 절친 악당들>은 다른 길을 간다. 훔친자들은 돈을 펑펑 쓰다가, 오히려 찾는 자에게 반격을 가한다. 그런데 이들이 주도권을 갖는 순간 영화는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

 

난 시켜서 한 것 뿐이야. 난 월급쟁이잖아죽음을 앞둔 창준의 대사다. 카포가, 친일파가 했던 변명과 유사하다. 절망한 그가 이어서 말한다. 정확히 반대의미를 갖는 혼잣말이다. “그게 죄지 씨발.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무 생각 없이 나쁜 일을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을 우리는 라고 부른다. 돈 가방은 사람을 개로, 개를 사람으로 만든다. 지누와 나미는 개를 죽이고 사람을 살린다. 이 영화의 묘한 지점이다. 지누와 나미는 회장의 명령에 개처럼 따르는 인수와 상호를 죽인다. 대신 범죄의 본질에 해당하는 회장은 망신만 준다. 살려둔다. 회장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지누와 나미나 다름 없다.

 

나탄 사란스키는 누구든지 광장 한가운데로 나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 두려움 없이 발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자유사회다. (…)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공포사회다라고 말했다. 사란스키의 구분에 따르자면, 임상수 영화들은 공포사회의 산물이다. 그의 영화에는 최고 권력자, 재벌 총수, 부잣집 아드님, 온통 나쁜 놈으로 가득하다. 죄책감도 없는 놈들이다. 임상수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두려움 없는 견해를 내세우기 보다, 차가운 눈으로 빈정거린다. 돈과 육체의 탐욕은 언제나 살아 남는다. 세상을 전복하려는 투쟁가의 행동 보다는, 전복되어야 마땅한 세상을 씹는 냉소가의 비웃음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의 절친 악당들>의 표현 방식은 풍자에 가깝다. 웃자고 하는 짓처럼 보이는 풍자는 실제로 감정이 아닌 이성에 호소한다. 풍자는 현실의 부정적인 면, 모순을 비웃는다. 현실을 비꼬기 위해서는 현실을 잘 알아야 한다. 같은 의미에서 풍자는 대단히 사실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절친 악당들>은 어두운 현실이라는 본질에는 접근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특히 문제의식 없는 문제제기는 상당히 불편하다. 정계유착과 불법자금, 민간인 사찰과 감금/고문, 불법체류자와 다문화가정, 도시재개발과 철거민, 교통사고와 견인차 불법관행, 고시원과 인턴사원, 썸과 섹스등 이렇게 많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품은 영화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이들에 대한 영화의 대답은 간단하다. “묻지는 말고 그냥 보세요.” 벽화에 관심을 갖는 지누에게 나미가 건네는 말이다. 해답을 찾는 순진한 관객들을 대하는 감독의 쿨한 태도다.

 

임상수는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심각함과 가벼움이라는 양분법으로 그를 규정하려는 행동은 너무 순진하다. 그는 늘 쿨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영화, 임상수가 행하는 전복, 세상을 향한 풍자는 딱 그 정도다. 인물들이 아파 울어도, 쾌락에 취해도, 목숨을 앗아도, 웃어 제껴도 관객의 마음은 차갑다.

 

 

괜히 덧붙인 글

임상수는 처음부터 주목받는 감독이었다. 젊은 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벼운 성적 담론을 강조한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는 무거운 집나온 청소년들의 <눈물>(2000)로 이어졌다. 젊음을 다룬 이 영화들에선 고다르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가지 것들>(1967)과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냄새가 난다. 타락한 부르주아지 부부를 다룬 <바람난 가족>(2003)은 고다르의 <위크 엔드>(1967), <오래된 정원>(2006)은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줄맺기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동제목의 2010년작에서 극에 달한다. 그의 최근작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는 너무 뻔하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떠오른다. 왜 전복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던 60년대가 그의 영화에서 자꾸 떠오르는 걸까? 참고로 임상수는 1962년 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