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터미네이터 : 제네시스> : 시간과 가족 관계에 대한 소고

열혈연구 2015. 7. 7. 01:58

여는 글

1때였다. VHS 테이프 하나를 빌려 친구집에 모였다. 미래에서 온 거대한 녀석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움찔했다. 몇 안되는 야한 장면에서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즈음, 친구 어머니가 방문을 여셨다. 억울했다. 물론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이긴 했다. 당시에 슈왈제네거는 액션계의 거성이었다. 이미 <코난>, <코만도>, <레드 소냐>, <고릴라>, <런닝맨>, <프레데터>, <레드 히트>까지 그의 영화 대부분을 극장에서 봤다. 정작 <터미네이터>(1984)는 볼 수 없었다. 관람등급 때문이었다. 노안을 가진 친구에게 이미 오래 묵은 이 영화를 빌려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임무였다.

 

 

 

몇해 전 아프리카 토고에 찾아갔다. 부모가 없는 고아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수도인 로메 근처에 있는 가토코페라는 작은 마을에서 서른명 가량 모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주제는 장래 희망이었다. 한국 학생들의 희망 직업에는 보통 연예인, 운동선수, 의사, 법조인, 교사 등이 상위권에 자리한다. 그런 면에서 토고 아이들의 꿈은 의외였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들은 희망 직업은 농부와 미용사였다. 고학년에 속하는 두명의 어린이만 교사와 사무원을 자신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평생 살아온 세상에서 볼 수 있고, 알고 있는 좋은 직업이 그것 뿐이었다. 프로이트가 인용한 거위는 옥수수 꿈을 꾼다는 속담의 슬픈 사례 같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전지각(pré-percep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예상이나 기대가 기억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앞의 토고 사례에서 보듯, 우리의 바람은 언제나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 발생한다. 미래에 일어나는 일들도 우리가 그것이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 현재의 기대 위에서 발생할 확률이 높다. 기억을 과거, 기대를 미래라고 대치시킨다면, 미래는 과거를 바탕으로 구축된다. 여기서 리쾨르의 생각과 함께 한 걸음 더 나가면, 그 기대는 우리가 깨닫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는 전지각을 바탕으로 한다. 과거 역시 미래로부터 영향을 받는 셈이된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일방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이미 장편 영화 4편과 TV드라마 2시즌 확장된 <터미네이터>의 세계관은 이미 정리하기 힘들만큼 어려워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가 이를 해결하려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두개의 타임라인으로 서로 어긋난 사건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고, 아귀가 맞지 않는 모두를 한꺼번에 해결할 넥서스 포인트를 내세웠다. 결국 남은 것은 사라, , 카일 그리고 T-800 을 둘러싼 존재의 문제다.

 

시리즈의 시작이 그랬듯이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의 흥미도 캐릭터 설정에서 시작한다. 특히 T-800을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처럼 만들어 놓은 점은 독특하다. “늙었지만 쓸모없진 않아라며 자조적인 유머를 반복하는 슈왈제네거의 모습은 충분히 웃기다.  아마 기획 시점에서 제작자도 이를 웃기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사라를 보호하고,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미래까지 염려하는 T-800의 모습은 캘리포니아주와 자신의 가정을 파탄낸 슈왈제너거의 현실과 명백하게 겹친다.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민망한 삶을 재포장하고 싶은 이혼남의 바람도 일정부분 작용했을 테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T-800 – 아버지 슈왈제네거의 관계식을 태연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이병헌을 T-1000으로 캐스팅한 것은 이와 다른 맥락이었다. SF액션영화계의 거대 시장인 한국을 위한 서비스 일환인게 명백하다. 그가 유사한 문제를 일으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적어도 한국 관객들은 처절하게 녹아 사라지는 T-1000을 보며 시장의 선택이라는 돈다발을 안겨주기로 결정했다. 아이 엄마가 된 그의 아내 이민정도 동정표에 한몫을 했을 거다.

 

가정사로 두 나라를 떠들썩한 두 배우가 자리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는 묘하게도 기존의 어떤 <터미네이터>보다 복잡한 가족 관계를 다룬 영화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설정과 사건 진행은 과거 시리즈의 반복이거나 변주다. 존 코너는 심판의 날 이후 인간 저항군 테크-컴을 이끄는 사령관이다. 그의 남다른 지휘력을 추앙하는 카일은 시간 여행을 자처한다. 스카이넷의 마지막 암살자로부터 존의 어머니가 될 사라를 보호하는 임무다. 1편과 거의 유사한 진행이다.

 

2029년 존과 카일은 상하관계다. 카일은 뛰어난 지도자인 존을 우러러 본다. 존이 스카이넷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전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미래이지만,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다. <터미네이터>에서 카일은 사라를 보호하다가 사랑에 빠져 존의 아버지가 되고 목숨을 잃었다. 카일은 자신이 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다. 존과 사라는 이에 대해 입을 다문다. 카일은 인류의 미래를 구한다는 거대담론을 위해 뛰어들었지만, 실제로 그는 아내를 지켜 미래의 아들을 보호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수행한다. 스스로 지각하지 못할 뿐이다.

카일이 시간의 벽을 뛰어넘으려는 순간, 먼저 떠난 줄 알았던 T-3000이 존 코너를 덮친다.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카일은 시간을 거슬러 1984년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T-800은 어린시절부터 사라를 보호해 왔던 아군 터미네이터다. 감정은 없다지만, 누가봐도 아버지처럼 그녀를 아끼고 지킨다. 문제는 과거로 찾아온 새로운 터미네이터의 등장으로 발생한다. 스카이넷의 끝판왕인T-3000은 가장 큰 적인 존 코너와 하나된 나노로봇이다.  이때부터 코너 집안에는 온통 콩가루가 날린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숱하게 반복된 그 흔한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저리가라다. 아버지인 카일과 아들인 존이 서로 죽이려 하는것은 기본이다. 어머니인 사라에서, 유사 아버지인 T-800까지 힘을 합쳐 아들을 죽이기에 나선다.

 

인류라는 체제 수호를 위해, 가족 구도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아버지-로봇T-800은 인류의 편에 서서 T-3000을 부수려 든다. 그를 이끄는 것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다. ‘아들-사람인 존은 로봇과 하나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다. 여기에는 인류를 들여다보고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자리하고 있다. <터미네이터>의 기술관은 이 두가지 시선의 충돌이다. 1942, 1949년을 지난  21세기에 선, 인류가 바라보는 기술과 정보에 관한 시선이다. 인류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지만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터미네이터: 제네시스>는 분명 새로운 시작이다. 복잡했던 설정과 사건들을 일직선으로 가는 거야라는 대사처럼 정리하고자 한 노력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리고 새 이야기는 철저하게 과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아라는 대사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소개될 2, 3편의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매일 새로운 일이 발생하지만, 돌이켜 정리하면 다소 뻔한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다. 미래는 예측할 수 있다. 단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닫는 글

4DX관은 일반 상영관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입장료가 책정되어 있다. 보통 SF, 액션 영화들이 주로 상영 목록에 자리한다. 그러나 3D 안경과 함께 의자를 흔든다고 모두 실감나는 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2>,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처럼 마치 이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엣지 오브 투모로우>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처럼 왜 이곳에서 상영하지 싶은 영화가 있다. 세계적으로 드문 상영형태인지라, 이를 위해 영화를 제작했을 리는 없다. 실감나는 체험을 결정짓는 건 4DX 효과를 제작하는 팀의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완성된 영화 위에 새로운 영화 효과를 첨가하는 그들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 로봇공학 3원칙(Three laws of Robotics)

: 아이작 아시모프의 1942년작품 <Run around>에서 처음 언급된 로봇의 작동원리.

1. 로봇은 인간에 해를 가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 이러한 명령들이 1원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

3.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단 그 보호가 1, 2원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