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영화와 좋은영화, 완성도 낮은 영화와 쓰레기영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찌라시가 증권가에 돌 듯이, 영화 흥행에는 여러 요소가 동시에 작용한다. 외국영화를 볼 때는 엄격한 잣대를 가져다대는 관객들도, 자국영화에는 또 다른 잣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유행처럼 유사한 영화들이 줄을 잇는 이유다.
한국영화시장에 무한 경쟁이 해로 1988년을 꼽는다. 할리우드영화의 직배가 시작된 해다. 현재의 중국처럼 허가 받은 일정 영화만 극장에 걸리던 시대가 지나갔다. 한국영화보다 많은 외국영화들이 몰려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상업적 경쟁력을 인정받은 새로운 한국영화 중 하나가 <결혼이야기>(1992)였다. <쉬리>(1999)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게는 ‘할리우드에 못지 않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시기엔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였다. <실미도>(2003)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바람을 타며 남북관계영화의 경쟁력을 알렸다. 정치적 긴강감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한미관계(<괴물>), 계급문제(<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 <베테랑>, <내부자들>), 권력문제(<변호인>,<왕의 남자>, <광해>), 한일문제(<명량>, <암살>) 등이 줄을 이었다. 흥행영화들의 전반에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이러한 흐름들 속에 <해운대>(2009)와 <도둑들>(2012)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자는 할리우드에서 뿌리를 내린 재난영화, 후자는 1990년대 홍콩영화의 한국식 번안작에 가깝다.)
최근에는 ‘배경-사회비판 + 형식-장르공식’을 따르는 영화들이 한국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공포영화에 한정해 볼때도 장르영화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엑소시스트>의 한국어판에 가까운 <검은 사제들>이 관심을 끌었을 때만 해도 강동원의 힘인줄 알았다. 그러나 <곡성>에 이르러서는 오컬트+좀비+형사물로 진화하더니, 재난+좀비물인 <부산행>이 등장했다. 이쯤되면 칸의 이름값인지, 새로운 경향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내용상으로는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가족을 구하려는 재난 영화, 연인이 감염되는 좀비영화는 흔하디 흔하다. 일 밖에 모르는 아빠와 나만 살겠다고 우기는 기득권층, 너무나 인간적인 깡패도 여러번 만났던 캐릭터다. 그런데 관객들이 <부산행>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
연상호 감독이 이뤄낸 커다란 성취는 좀비와 한국을 묶었다는 점이다. <부산행>은 TV까지 점령한 좀비물의 익숙함에 한국식 좀비물의 낯설음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사회 문제와 공권력에 대한 비판은 기본이다. 구제역, 사스와 메르스, 멀리는 1.4후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부의 위기대처능력, 모든 것을 유언비어와 폭력시위로 몰아가는 언론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오 필승 코리아> 벨소리를 ≪ 유치하다 ≫고 말하는 석우(공유)는 다름 아닌 ‘개미’들의 피를 빨아 배를 채우는 펀드매니저다. 모든 이들을 배신하는 용석은 회사의 중역이다. 가진 자들은 양보하지 말라 하고, 몸소 실천하고 있을 때, ‘개 돼지’나 다름 없는 노숙자와 깡패는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다.
2010년대 한국관객들은 장르적 규칙을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놓은 영화들에 열광한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 우리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체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기득권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몰락을 지켜보는 관객은 가벼운 풍자보다 끔찍한 몰락을 선호한다. 영화의 설정이 외적 요소와 함께 맞물려 관객의 쾌감을 향상시키는 형태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하는 디테일에는 관대하다. 뛰는 좀비영화에서 필수인 군중추격신에서 <부산행>이 보여준 허술한 장악력(또는 열악한 CG)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남자-능력-구원자, 여성-능력부족-피구원자’라는 뻔뻔한 공식은 이제 천만영화의 흔한 이데올로기가 될 지경이다. 여기에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독특한 한국식 상영방식이 추가된다. <부산행>은 여기에 유료시사회라는 변칙 개봉까지 활용했다. 개봉일인 수요일(7월 20일)에는 <부산행>의 매출 점유율이 82.4%까지 치솟았다.
지난 10년간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좀비처럼 전국 스크린을 장악하는 대형영화들을 피해 작은 영화들은 성수기 개봉을 외면하고 있다. <부산행>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모든 영화들은 몇 명 남지 않은 사람 같은 꼴이 되었다. 정말 한국관객은 <부산행>만 보고 싶어하는 걸까? 적어도 500만명은 1500개 스크린 이상 걸어 놓는 영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드는 500만명의 ‘좀비’ 관객이 있는 걸까 ? 이쯤 되면, 한국관객의 한사람으로서 우리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대형영화가 나쁜영화가 아닌 것처럼 작은영화가 반드시 좋은영화는 아니다. 용석(김의성) 같은 나쁜 놈도 있고, 상화(마동석) 같은 인간미 넘치는 이도, 영국(최우식)이나 진희(소희)처럼 사랑 밖에 모르는 애들도 있다. 이게 어우러 사는 사람 세상이다. 모두가 하나만 선택하려 한다는 혹자의 주장에 <내부자들>의 이강희가 떠오른다. 이강희의 눈에는 한국관객이 ≪ 적당히 짖어 대다가 알아서 조용해 ≫지는 개돼지나 다름 없어 보일테다. 실제로 한편의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는 이상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일어났다가 금새 사라진다. 스크린 싹쓸이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관객들이 해당 영화를 딱 2주만 참으면 된다. 요번 추석과 성탄절, 그리고 설날 이렇게 딱 3번만 싹쓸이 영화를 거부하자. 그러면 당장 내년 봄부터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영화들을 극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 기업이 돈을 벌겠다는 게 나쁠리 없다. 그러나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은 분명 나쁘다. 무더위의 한 가운데서, 배급사와 극장의 전략이 아닌 관객의 성원과 선택이 만들어낸 천만 영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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