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툼 레이더] 보다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위하여

열혈연구 2001. 7. 5. 03:18
‘신체 사이즈 34D-24-35’. 이것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언급임을 알아채실 만한 분들이라면, 이미 <툼 레이더>를 보고 돌아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녀의 변질을 확인하기 싫어 외면하실 수도 있겠군요. 굳이 문두에 불경스러운 ‘사이즈’를 운운한 것은 라라의 명성이 적지 않게 이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할일 없는 어느 곳에서는 설문조사도 했다나요?) 지난 주에 이어 또 한편의 모험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아마 다다음주에 또 한번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름은 우리에게 모험을 강요하나 봅니다. 아니 모험의 소비를 말입니다. 참, 다음 주말부턴 부천영화제가 문을 엽니다. 시원한 여름의 한 순간을 찾는데, 부족하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툼 레이더 (01. 7. 3)
-보다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위하여

@ 성공의 비결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란 게임이 있습니다. 몇 달 전엔 2001이란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버전이 나왔더군요. 마이크로 프로즈에서 제작한 이 게임은 놀이공원을 지어 운영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놀이 기구들을 개발하고, 적절한 배치를 하고, 홍보와 관리를 통해 이윤을 남기는 게 목적이죠. 실제로도 그렇듯이 게임에서 가장 손님이 많이 몰리는 것은 단연 ‘롤러코스터’입니다. 물론 이를 설치하는 데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많은 자본을 투자해야 한답니다. 이미 디자인 된 소폭의 선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고안해 설치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설계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 만든 롤러코스터는 몇 차례의 360도 회전과 극단의 언덕을 설치한 비싸고도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헌데, 시험 운용해 보았더니 여지없이 멈춰 서더군요. 코스 초반에 놓인 언덕을 오를 전동장치를 설치하지 않은 게 이유였습니다. 심각한 오류를 범하면, 고속으로 달리던 열차가 호수로 뛰어들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잘만 만들어 놓으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의 확실한 돈벌이가 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죠. 머리를 쭈뼛하게 세울 ‘흥미’와 승객을 불러들일 ‘홍보’가 그것입니다.

사이먼 웨스트 감독의 <툼 레이더>는 이번 여름 끊임 없이 찾아오고 있는 모험물 중 하나입니다. 다른 것이라곤 영국 게임의 자존심 ‘툼 레이더’의 명패를 걸고, 라라 크로프트가 등장한다는 것 뿐이랍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분한 그녀는 모험물 영화의 이상향인 ‘완벽한 롤러코스터’를 향해, 게임에서처럼 열심히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며, 뛰어다닌 답니다. 또, 수개월에 걸쳐, 대규모 촬영을 처음 허락했다는 앙코르와트 사원 소식과 졸리가 얼마나 크로프트스러운지에 대한 맞춰보기는 흥미를 증폭시키는 홍보로 충분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웨스트 감독은 깜빡한 듯 보입니다. 롤러코스터의 설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거대한 내리막보다 그 앞의 ‘끊임없이 천천히 오르는 언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화는 라라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합니다. 태연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180도 회전함과 동시에 카메라가 뒤로 쭉 물러나면, 그녀의 자세는 다름 아닌 줄에 꺼꾸로 매달려 있음이 밝혀 집니다. <툼 레이더>에 나오는 모든 고난도 액션은 첫 씬과 똑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아닌 듯 태연하게 있는 빙산처럼, 라라의 위기는 물속의 90%가 갖고 있는 위엄으로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답니다. 이는 그녀의 출신이 귀족이어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속 기술자가 만들어 온 연습용 로봇과 거대한 저택 한쪽에서 돌기둥을 무너뜨리면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그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때문 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지력이 가장 큰 이유일 텝니다.


@ 영웅의 이름으로
우리는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을 기억합니다. 후로도 속편 셋이 선보였지만, 어린 슈퍼맨이 자동차를 들어올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에게는 부모님이 없습니다. 롤렉스인가를 차고 있던 그의 외계인 아버지 말론 브란도는 지구에 있지 않습니다. 슈퍼맨이란 이름에서 원색 옷과 행동이 상징하고 표현하는 힘은 그가 어눌한 현실의 가면과 이면에 자리한 고독한 절대를 벗음으로 보다 짜릿하게 다가 옵니다. 조금은 덜 식상한 베트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베트맨> 시리즈의 매력은 오히려 더 안쓰러운 악당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베트맨을 생기 있게 하는 건, 부호의 탈을 쓴 일상과 음울한 도시 고담, 밤하늘에만 등장하는 호출 엠블럼 그리고 악몽처럼 번뜩이는 부모의 상실입니다.

‘사회적 동물’의 가장 작은 기반인 혈육관계는 가정이라는 틀로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미래학과 사회학자들이 가정의 파괴를 예언하고 실제로 이혼율 역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지만, 우리의 디딜 발은 여전히 그곳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의 불안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커다란 요소인 환경에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들의 어두운 과거는 희소적 존재로서 영웅을 우리의 뇌리에 보다 깊이 각인 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실의 태연함이, 변신을 거치며 전과 상반된 실체로 드러난 영웅의 의외성과 겹치는 것입니다. 이는 불우한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수재(秀才)의 성공기가 부잣집 도련님의 그것보다 감동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라라는 서른셋이 된 지금 영웅이 지녀야 할 모든 면모를 갖췄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녀의 아버지 헨싱글리 크로프트(존 보이트)경은 16년 전에 실종되었습니다. <툼 레이더>를 이끄는 중심 내러티브가 시간을 지배하는 트라이앵글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라라의 행동은 자신의 과거, 즉 잃어버린 아버지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내적 내러티브를 쫓아갑니다. 둘의 짜임새가 어떠하냐에 따라 영화의 존망이 달려 있다 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은 롤러코스터에서 급경사의 이전과 이후와 같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높이 올라가는 시간이 길수록, 첫 무대를 앞둔 초짜 배우의 가슴처럼 쿵쾅대는 심장의 박동이, 아드레날린과 반응해 추락의 기쁨을 더하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툼 레이더>의 레일 위로 함께 올라가보죠.


@ 비밀을 푸는 비밀
영화 <툼 레이더>는 제작에서부터 충분히 레일의 최고와 최저점을 오르락 내리락 한 듯이 보입니다. 무수히 교체된 각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모탈 컴뱃2>를 썼던 프리드먼의 재고도, TV영화 출신의 차르노의 각본도, 심지어 <다이하드>의 각본을 담당한 디소우자의 원고마저도 공중분해 되었습니다. 좀더 열거하자면 워브와 <페이스 오프>를 썼던 콜러리 역시 퇴짜를 맞았고, 오히려 신인 작가인 마셋, 진먼의 글이 중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은 그들의 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붙인 웨스트 감독이 타이틀에 자신의 이름까지 올려 놓는 것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어렵사리 완성된 <툼 레이더>의 각본에서 다시 재생된 라라는 세상을 지배할만한 힘을 찾는 여정을 떠납니다. 그녀를 막는 것은 광명파라는 비밀집단입니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트라이앵글을 찾고 있습니다. 5천년 만에 행성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서는 순간의 힘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이죠.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라라가 끼어 드는 까닭은 아버지가 남긴 거꾸로 가는 시계가 트라이앵글을 완성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자 첫번째 문제입니다. 라라가 어떻게 시계를 손에 넣게 되었을까요?(이 영화는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기 때문에 가리지 않고 샅샅이 도마 위에 올려 놓는 것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졸리의 몸가짐을 살피러 극장을 찾으시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답은 ‘꿈 속에서 본 계시’입니다. <툼 레이더>의 가장 한심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수께끼로 가득찬 고대 문명으로 접근을 계시와 직관으로 가볍게 해결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내어 놓으면 <인디아나존스>는 안 그러냐?라고 물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존스박사는 <스타워즈>에서 밀레니엄 팔콘을 타고 츄바카와 우주를 누비던 그 모습 그대로 선대의 비밀들을 풀어갑니다. 지식을 바탕으로 한 좌충우돌식 직관이죠. 하지만 존스박사가 라라와 구별되는 것은 찾아가지만 쫓기고 있다는 양면구조 답습을 통해, 관객의 동일시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 역시 계시보다는 발견에 따르고 있죠.

너무나 강하고 절대로 틀리지 않는 라라는 지적인 아테(Ate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유혹의 여신)이길 바랬던 기대를 저버리고, 감성적인 아테네(Athene : 그리스 신화를 주름잡는 지혜, 전쟁, 공예, 대기(大氣)의 여신)의 현신에 가깝습니다(어눌한 글쓰기로 오해를 부를 듯해 덧붙입니다. 아테가 지적이었다거나 아테네가 감성적이었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라라의 강력함이 그들의 전형성에 어긋나는 수식어처럼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 문명의 이분법
주자가 남긴 권학문(勸學文)을 한번쯤은 보셨을 텝니다. ‘말하지 말라(勿謂)’로 시작하는 이 글의 다섯번째 행은 누구나 수없이 들었을 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少年易老學難成이니 一寸光陰不可輕이라’(소년이노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어눌한 해석을 하자면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촌의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정도의 내용입니다. 굳이 옛 글귀를 더듬은 이유는 <툼 레이더>가 담고 있는 문명과 시간이 동양의 무언가를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입니다.(시간은 다음 단락에서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라라가 찾은 것은 둘로 쪼개져, 각각 세상의 반대쪽에 숨겨 있는 트라이앵글 중 한 조각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녀가 도착해보니 이미 그녀의 시계를 훔쳐낸 파웰(이아인 글렌)은 한발 앞서 그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죠.

그런데, ‘선한’ 라라와 ‘악당’ 파웰 사이 형성된 팽팽한 대립구조에 의외의 인물이 끼여듭니다. 라라를 인도하는 신비의 소녀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녀는 ‘계시’의 연장이기도 한데, 그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소녀가 등장하는 씬이 영화 전체의 맥락과 동떨어져 있는 섬과 같다는 것입니다. 액션씬들에서 보이는 숨가쁜 편집은 <툼 레이더>의 호흡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들의 몸놀림이 자리한 곳은 오우삼의 발레액션, 이안의 부유액션과 또 다른, 비현실의 세계입니다. 무너진 사원의 뒷구석에서 라라를 끌어들이는 소녀는 엘리스가 토끼를 쫓아 다른 세계로 들어가던, 현실과 초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오갑니다. 씬 자체에 충만한 동화적(‘만화적’이 아닌) 상상력은 한편의 포근한 단편 영화의 감성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이 씬은 ‘섬과 같다’했던 것처럼 아쉽게도 수묵화 아닌 유화에 여백의 미를 찾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어색한 접근은 동서를 가르는 이분법적인 감독의 시선에서도 엿보입니다.

라라의 저택은 현재와 과거가 혼존하는 장소입니다. 영화의 첫 씨퀀스에서도 등장했듯이, 그녀가 첨단 로봇과 하는 전투력 대결의 장은 돌기둥이 유적의 냄새를 풍기는 곳입니다. 그녀의 집 나무 벽 뒤에는 5000년 전의 신비를 담고 있는 시계가 있는가 하면, 그 시계를 보관할 장소는 첨단 보안 장비가 자동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툼 레이더>에 있는 혼존은 딱 여기에서 멈춘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동양 문명이라는 것은 이미 사장(死藏)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부활하더라도 총알 한방에 부스러지는 돌병사들처럼, 시체같이 누워있다가 위대한 잠에서 깨어났지만, 처참히 부서져야 할 옛 것일 뿐입니다. 영화는 내러티브가 품고 있는 동양의 문명에 대한 갈망과 달리 동양의 실체를 과거 완료형으로, 서양의 탐사를 현재 진행형으로 갈라 놓는 접근법을 반복합니다.

파웰의 지도에 이끌러 석벽과 줄다리기를 일꾼들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잠깐 두 번째 문제입니다. 열심히 줄을 당기던 동양인 일꾼 중 하나는 무너진 석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파웰과 알렉스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후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답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입니다. 웨스트의 각본과 연출은 그를 여지없이 무시합니다. 라라의 국제전화 이용을 위해 우습게 안테나를 들고 있는 승려처럼 화려한 동양 문명의 자식들은 씁쓸한 모습으로 남게 식입니다.


@ 마무리 하는 법
대상 프로그램의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교훈들처럼, <툼 레이더> 역시 시간에 대한 숱한 잠언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에 살아 있는 라라와 이미 죽은 아버지가 재회합니다. 실제로 소원한 사이었던 보이트와 졸리 부녀는 이 씬에서 손끝을 마주대며 화해합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의심스럽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시간을, 그러니까 운명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옛 사람의 가르침에 강하고 당당하던 라라는 순하고 착한 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이 씨퀀스의 전후는 흥미롭습니다. 파웰과 맞섬 마지막에 크로프트경이 죽는 순간 선보이는 공중 회전 쇼트, 멈춰진 시간 속에 혼자 서있는 라라의 손 끝에서 칼과 같이 도는 시점 쇼트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역동입니다. ‘하나의 모래에서 시계를 본다’는 크로프트경의 메시지처럼 한 개의 쇼트로 영화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너져 내리는 동굴을 탈출하는 라라의 행동이 왠지 싱거운 까닭은 어긋난 모험물의 종료 공식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재발굴의 여지를 없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로맨스가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모험물의 마지막은 밝혀낸 비밀이 다시 비밀로 남게 되는 순간이 ‘무너짐’이라는 표현 양식을 통해 장식됩니다. 그리고 비밀의 열쇠는 모험을 통해 서로 사랑하게 된 상대의 목숨과 교환하는 식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 사라진 열쇠는 언젠가 다시 들춰낼 수 있도록 땅속 깊숙이 들어갈 뿐입니다. <툼 레이더>의 경우는 그렇지 않죠. 라라의 총 한방에 5천년 이후에도 결코 꿈 꿀 수 없도록 해 놓았으니깐요.

모험물의 끝은 흔히 위험천만 끝의 구사일생, 그리고 입맛춤으로 날인합니다. 알렉스는 라라의 옛 동료, 혹은 애인으로 등장합니다. 영화의 초반, 경매장에서 만나는 둘은 서로 같은 길을 다른 목적으로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회환을 잠시 나눕니다. 그리고 워커홀릭인 듯한 알렉스가 예전에 그녀 곁을 떠났음을 시사합니다. 둘은 영국에서 시작해 지구 한바퀴를 돌아 아이슬란드까지 티격거리며, 둘 사이 부족한 설정을 보충하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만한 로맨스에 이르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결판나는 마지막 씨퀀스에서 알렉스의 목숨을 위해 피를 흘리는 라라의 노력이 단순히 악당 퇴치를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 입니다. 그녀를 위해 광속보다 빨리 지구를 돌던 슈퍼맨이 그리울 따름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만,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대규모 오락 영화에서 ‘완성도’를 찾는다는 것은 5대양 물속에 직접 들어가 ‘w’로 시작해 ‘z’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를 잡아 오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설사 뛰어난 완성도로 잘 짜여진 롤러코스터 같이 긴장과 이완의 조합을 통해 정화에 이르게 할 지라도, 기껏 1분 이내의 운행시간처럼 쉽게 잊혀질 뿐입니다.(아니, ‘잊혀져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역량이 된다면 언젠가 이에 대한 이야길 하고 싶습니다.)

웨스트 감독은 첫 작품인 <콘 에어>에서 가장 성공한 듯 보입니다. 적어도 거대한 죄수 수송기가 추락하는, 자동차가 날아오르는 씬들은 낮은 곳에서 천천히 올라간 최고점이었으니깐요. <장군의 딸>은 그저 그런 경사도로 시시함에 머물더니, 이번에는 끊임없이 회전만 하는 동력열차가 되고 말았습니다. 롤러코스터는 뉴턴의 사과에서 발생한 위치에너지의 산물입니다. 만유에 작용하는 인력으로 정점에 오른 후에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야 하는 것이 흥미로움의 핵심입니다. 라라가 이제껏 수많은 모니터 속에서 뛰어다녔던 것은 <툼 레이더>로 관객을 이끄는 가장 큰 홍보였을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하든 간에, 프랑스식 정원 뒤로 자리한 저택에서 라라는 이후로도 새로운 무언가를 도모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가 이제껏 뛰어다녔던 그래픽의 인터렉티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 제 머리 속에 계속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7 :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