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신라의 달밤] 머리는 쓸수록

열혈연구 2001. 6. 22. 02:17
이번 주 소개할 영화는 <주유소습격사건>의 김상진 감독이 선보이는 코믹액션물 <신라의 달밤>입니다. 기억 하실는지 모르지만, 그는 <돈을 갖고 튀어라>, <깡패수업>, <투캅스3>의 감독입니다. ‘코메디’란 장르를 열심히 밀고 나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번 영화는 ‘이만큼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심쩍으시다면 그리고 시간이 되신다면 비디오가게에서 전작들을 쭈~욱 살펴본 후 극장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달밤에 하늘을 가르던 차승원의 발차기가 눈에 선합니다. 하하!


신라의 달밤(01. 6. 15)
- 머리는 쓸수록

@과거를 동경함
<친구>의 열풍은 여름을 지나며, 스크린에서 비디오로, 극장에서 가정으로 다시 관객을 찾아갈 것이다. 감독 편집판이 출시될 예정이라니, 이미 봤던 관객들도 다시 한번 집에서 영화를 볼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옛 기억이 훨씬 아름답다는 정설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복고와 사투리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친구>는 700만 넘는 관객을 통해 한편의 영화를 넘어 현상으로 전이했다. 추억에 주먹과 사투리를 더한 김상진 감독의 <신라의 달밤> 역시 <친구>와 비슷한 출발점을 갖고 있다. 전작 <주유소 습격사건>은 전국 256만명을 동원하며, 그저 그런 코메디를 만들던 그를 일약 스타 감독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영화는 캐릭터를 내세운 마케팅과 논리를 삭제한 구성으로 관객의 호의와 평단의 포화를 동시에 누렸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영화는 ‘재미’라고 일축하며 다음 영화를 준비했고, <신라의 달밤>은 한걸음 나아간 걸음이 된 듯하다. 영화는 전설이라 불리는 추억을 기반으로 한다. 1989년 경 서울의 강산고가 수학여행으로 찾아온 경주. 숙소의 마당에 조명이 번뜩이고 학생들의 장기자랑이 열기를 더한다. 이때 멀리서 쫓기듯 뛰어오는 학생 하나가 기동(차승원의 아역)의 귀에 소근대는 몇 마디로 사건은 시작한다.

학생들의 패싸움을 다룬 오프닝은 선생님이 되어 경주에 있는 기동이네 반 문제 학생들이 나눈 영웅담의 재현이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고 싶은 주섭(이종수)은 깡패 같은 선생, 기동에게 얻어 맞는 게 일이다. 기동의 땀내나는 일상 뒤에는 영준(이성재)의 폼나는 사업이 이어진다. 전국관광지를 장악하는 계획의 마지막거점, 경주로 내려온 영준은 조직의 작전참모격이다. 그는 냉정한 판단과 치밀한 계획으로 내려온 경주를 순식간에 장악한다. <신라의 달밤>의 플롯은 수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배경과 상황을 보충한다. 이는 처음 기동과 영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사용되다가 차츰 주섭, 준형(김영준) 등 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현재의 인물들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주섭은 큰 싸움을 벌였던 기동을 막연히 동경하는 껄렁이 학생이다. 그에 반해 예전 영준처럼 준형은 기동에게 주섭의 나쁜 행동을 일러 바치는 일름보 모범생이다. 싸움을 이끌었던 과거의 기동이나 겁 많은 모범생이었던 영준은 선생님과 폭력배라는 엇갈린 삶을 살고 있다. 넷의 관계는 폭력으로 서로를 잇고 동경으로 서로를 품는다.

실은 주섭이 기동이라는 인물을 동경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과거에 크게 일어났던 싸움을 이끌었던 기동을 꿈꾸며, 자신을 그곳에 대입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김상진 감독의 영화를 한 줄에 꿸 수 있는 모티브, ‘특별한 상황의 발생’이 바로 주섭이 동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갑자기 들어 온 돈, 일본에 찾아간 깡패, 새로 부임한 여형사, 주유소를 터는 양아치 등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주섭은 감독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학교에선 삥을 뜯고,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깡패가 되고 싶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하는 것도 감독의 애정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형준의 모습이 고자질장이에서 깡패를 소원하게 되는 것을 보면 <신라의 달밤>이 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김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다르지 않은 동경과 연합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모범적이든 폭력적이든 간에 말이다.

<신라의 달밤>을 이끄는 인물들은 동경이라는 방식의 꿈을 가지고 있다. 기동과 영준이 서로를 부러워했던 고교시절부터, 둘의 관계를 부러워하는 주란(김혜수는)은 물론, 수학여행대전(大戰)을 이룬 선배들을 꿈꾸는 주섭들, 당당함을 기대하는 준형까지 모두 자신의 틀 밖에 있는 것을 소망한다. 해서 이들은 먼저 자신들의 체제를 다지고 소원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기동과 영준이 재회하는 곳은 다름아닌 단란주점이다. 웨이터를 하고 있는 주섭 일행을 잡으러 온 기동은 협상을 벌이고 있는 영준과 우연히 조우한다. 폭력적인 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는 뒷덜미에 영준은 기동을 부른다. 서로를 동경했던 과거가 각자가 희망했던 모습의 상대로 만나는 순간이 학생들의 일탈과 겹쳐있다. 기동과 영준은 수학여행대전 후 엇갈린 운명의 접점을 확인하는 장소가 단란주점의 복도인 것이다. 폐쇄되어 있고 유흥으로 얼룩진 만남의 장은 다시 열려 있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주란의 라면집에 대비된다.

@매개를 준비함
주란이 기동, 영준과 만나는 곳은 주섭이 싸우고 끌려온 파출소 안이다. 그녀는 경찰을 보자마자 거짓 눈물로 동생의 잘못 용서를 빈다. 주란의 눈물에 멋쩍은 경찰은 주섭들을 내보낸다. 그리고 파출소 문을 나서자마자 주란은 손바닥 뒤집듯 돌변해 주섭을 팬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상태로 기동과 영준은 주란의 라면집에서 반찬 없는 라면을 대접 받는다. 이제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사랑의 줄다리기가 시작되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를 잇는 매개가 다름아닌 폭력이라는 것이다. 영준이 처음 폭력배의 삶을 꿈꾼 건 기동이 이끈 싸움을 보고서다. 그는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지났던 모범생의 과거를 거친 후, 되려 전국재패를 노리는 폭력조직의 수뇌부가 된 것이다. 반대로 기동은 영준의 머리가 부러워 공부를 해 선생이 되었지만, 외제차에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영준에 대항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다. 폭력이 미래를 바꾸고, 현재를 조정하는 식이다. <신라의 달밤>의 플롯과 인물 설정이 폭력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 짜임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폭력은 의지나 감정이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소통방법이다. 이 방법은 여전히 가학과 피학으로 구분되어 저급한 양식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신라의 달밤>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은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영화에서 폭력은 동경과 증오를 아우른 야누스의 얼굴이다. 주섭은 큰 싸움을 벌였던 기동의 과거를 동경하지만, 자신의 앞길을 막는 선생으로서 기동은 증오한다. 영준 역시 기동의 과거를 동경해 현재에 이르렀지만, 결국 그에게 기동은 덜컥이는 걸림돌이다. 이들 사이에 놓인 주란의 위치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선 주란은 동생을 훈계하는 대신 몸을 날린다. 그녀의 과장된 폭력 성향은 기동과 영준이 뿌리로 삼고 발을 딛고 있는 자리를 희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그녀의 행동은 저속촬영된 무성코메디 영화처럼 둘의 마음을 끌고 새로운 대결을 유발한다. 또 주란은 별로 배우지 못한 듯 보인다. 자신의 폭력성 보다는 공부를 못했다는 사실이 수학여행대전 처벌의 이유라고 오해한 기동이나, 모범적인 삶을 폭력적으로 변환하는 것이 남자다움이라 해석한 영준의 현재는 모두 배움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주섭들에 대한 성적향상의 요구나 준형이 내민 일등 성적표를 빌어서도 엿볼 수 있다. 많이 배우지 않았고, 친구도 없는 주란이 둘의 사이에 자리하면서 그녀의 결핍이 그들의 동경으로 전환한다. 또 주란은 티격태격하는 기동과 영준의 관계를 부러워한다. <신라의 달밤>을 채우는 인물들은 그녀를 제외하곤 개인이 아닌 군상으로 처리된다. 경주파의 아지트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한판에 주란이 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폭력과 공부를 통하는 채널로 사람들을 잇는 매개지만, 자신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촉매일 뿐이다. 주란이 처음 등장하는 파출소 씬에서 신학성 조명감독은 그녀에게 과도한 빛을 부여한다. 그리고 폭력과 다툼으로 얼룩진 거친 분위기가 밝은 그녀의 등장을 통해 화해로 급전환한다. 화해의 매개로 인물을 다룰 때 사용하는 이 방식은 후반부, 병원씬에서도 반복된다. 조직의 와해로 쫓기던 영준은 마음을 알아채고 포기하려는 기동과 주란 앞에 나타난다. 그가 이제껏 행동이 장난이었다며 기동과 주란을 맺으려 할 때, 다시 한번 조명은 영준에게 과다투여된다. 현실과 조금 동떨어진 느낌, 이것이 <신라의 달밤>을 판타지로 이끔과 동시에 인물들 작위성의 피할 길을 제공한다.

<진주만>의 경우에서처럼 영화의 전정성을 논하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코메디란 장르가 책임이 한결 덜한 것은 사실이다. 2차대전 당시 채플린의 풍자도, 7,80년대 등장한 일련의 바보 영화들도 무거운 실상을 비껴가는 피할 길의 하나였다. 최근엔 다른 어떤 장르에서도 거절 당한 배설물에 진한 욕설까지 아우르는 걸 보면 코메디의 힘은 희화성을 통한 비껴가기에 있다 하겠다. 감독은 <신라의 달밤>을 가득채운 폭력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기를 바란 듯 하다. 초반 아이들 선도를 연설하는 기동에게 깡패들이 꼼짝 못하는 깡패들이나, 결국에 자수하는 영준, 주섭을 응원하면서도 한방먹이는 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에 대한 권선징악적 끝맺음은 이러한 감독의 강박.-<주유소 습격사건>의 상영이후 몇 건의 주유소 강도사건이 발생한 전력이 있다.-에서 기인한다 영준은 기동과 주란에 대한 보복을 막기 위해 경주파 앞에 몸을 던진다. 여기에 좀더 많은 수의 아군이 모이고 결국엔 동원된 경찰에 의해 사건은 진압된다. 힘은 보다 큰 힘에 의해 제압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 이것이 권선징악과 어울려 영화의 표현수위를 열심히 조절한다. 이곳에서 폭력은 자체로 폭력을 유발하는 촉매가 되고 결국 폭력에 의해 화해에 이르게 하는 매개가 된다.


@효과를 표현함
언어는 발화함과 동시에 상황에 따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돌다’라는 단어가 회전하는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제정신이 아님을 뜻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시력의 착각에 기댄-아주 뛰어난 시력을 갖는 누군가가 있다면 영화는 영사조도가 낮을 때처럼 깜빡거리고 덜컥일 것이다.-매체이다. 여기에 필름의 끝에 담은 음향신호가 더해져 비로소 표현 양식의 기본 조건이 성립된다. 영화는 상영이라는 단계를 통해 연출자가 의도한 갖가지 표현 방법을 선보인다. 촬영에 있어서만 해도 각도 렌즈 필터 이동 미장셴 컷 등 다양한 표현 양식이 존재한다. 이들은 편집 조명 음향 연기 등과 조화를 이루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동시다발적인 집중을 이룬다. 앞서 잠깐 다룬 조명에 이어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신라의 달밤>의 프레임이다.

먼저 코메디 영화답게 미장셴은 상황을 손쉽게 설명하는 프레임 짜기가 얼마나 효과적인 도구인지 보여준다. 타이틀이 퍼지듯 사라지면 하늘에 거린 초생달 가를 볼꽃놀이가 장식한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다보탑이 끼어들고 경주와 수학여행이라는 설정을 짧은 순간에 효과적으로 한 화면에 담는다. 이런 식의 효율적인 미장셴은 종종 사용된다. 가게를 찾아온 기동은 얼떨결에 주란의 일을 종일 도와준다. 그가 일을 마치고 내심 좋아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란에게 꺼낼 무렵 불청객 영준이 찾아온다. 속마음을 알고 있는 둘은 날카롭게 맛선다. 그리고 주란이 여기에 끼어드는 장면이다. 알다시피 이것은 주란의 라면 가게인 실내씬이다. 주위에는 탁자들이 배치되어 있고 기동과 영준의 마주보는 사이에 주란이 서 있는 삼각구도이다. 심리적 구도완 달리 시각적 인물 배치는 실제로 눈높이에 맞춰진 카메라에 의해 평면적이다. 그런데, 지속시간이 길어지면서 주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액자의 글자가 둘의 대결 사이에 끼어든다. ‘아름답게 살자’. 이로 인해 맛대결의 구조는 삼각의 안정을 갖는다. 당연히 긴장을 와해하고 웃음을 유발하는 안정이다. 또, 공부를 시작한 준형을 본 후 주란이 기동을 대접하는 횟집씬 역시 유쾌한 미장센이 선보인다. 준형의 변화가 영준의 제의에 의한 것임을 관객은 이미 알고 있지만, 기동과 주란은 아는바 없는 상태다. 이때 주란의 초대로 등장하는 영준. 기동의 측면쇼트 너머로 그는 거울 속에 홀연히 등장한다. 기동의 단독 공로 였던 오해가 영준의 등장으로 무너지고, 이는 주란의 ‘친구 화해’라는 엉뚱한 의도로 인한 것이었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씬이다.

<신라의 달밤>은 슈퍼 35mm 방식으로 찍었다. 횡종비가 2.35 : 1인 이것은 1.85:1인 보통 35mm때 보다 넓은 화면을 제공해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양식이다. 여기서 발생한 정보의 증가는 보다 화면지속시간과 어울려 대사 등으로 충분히 담지 못한 심리를 보다 쉽게 표현하기도 한다. 비근한 예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몇 씬을 들어보자. DMZ의 갈대숲씬. 일을 보는 사이 퇴각해 사라진 아군에게 동떨어진 김병장(이병현)의 고립감을 담아내는데, 바람과 함께 몸을 기울이는 갈대의 행렬은 효율적이다. 또 작전 중 우연히 만난 남북군인들의 겨울산 씬에서도 넓은 화면이 제공하는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화면나누기를 하지 않고 대치상태인 남북군인들을 한번에 담음으로써 긴장과 심리적 거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프레임의 횡비를 넓히는 것이 ‘보다 많은 것을 담는다.’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길게 설명했지만 <신라의 달밤>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해가 된 듯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려한다.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규모 싸움씬들조차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 첫번째 수학여행대전에선 모여드는 학생들의 동선을 종(縱)으로 잡고 있다.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다가오는 그리고 대치하는 근래에 보기 힘들만큼의 많은 군중이 어깨너머로 그냥 다가오고 만다. 뒤늦게 짱들이 붙는 씬은 횡으로 처리지만, 둘 사이에 간격은 이미 다가온 카메라에 의해 긴장감을 놓쳐버린다. 넓은 화면을 채우다 못해 편집의 실수도 더러 발견된다. 학교를 찾아온 주란을 맞는 복도씬에서는 기동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학생이 주란의 인사에 대한 기동의 반응쇼트로 전환하면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는 넓어진 횡비로 인해 한쪽을 채우려던, 상대적으로 미미한 인물의 동선을 깜빡한 탓이다. <신라의 달밤>이 코믹액션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군중 싸움씬들 덕분이지만, 시각적인 시원함이 나아진 횡종비 아닌 편집 속도에 의지하는 것은 아쉽다. 효과적으로 등장하는 플래쉬백에 의해 구습을 답습한 안일한 편집도 눈에 거슬린다. 경주대전을 이야기한 주섭과 일행들의 입에 담배가 무리고 어두운 창고는 비밀을 가득 담은 듯 로우키 조명이 인물을 조용히 비춘다. 이때 갑자기 창고 문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기동. 여기에 이어지는 놀라는 주섭들의 반응쇼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웃음의 휘청임이다. 반면 배우들의 애드립이 고스란히 담긴 길게찍기에서는 오히려 감각이 살아나기도 한다. 경주파아지트대전 후 탈출하는 자동차 내부 씬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미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영준이 주란과 이야기를 할 때, 누워있던 기동이 일어나며 끊임없이 주절대는 대사는 유쾌하기 그지없다. 이를 쫓아가며 잠시 인물의 안위를 걱정하던 관객은 강도 낮은 가학적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출애굽 이후 모세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견고한 여리고 성 앞에 도달한다. 여호수아는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계획으로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다. 명령은 다름아닌 유대 백성들을 이끌고 성 주위를 하루에 한바퀴씩 엿새를 도는 것이다. 7일째 되는 날, 특별히 성을 일곱차례 돈 후,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수행한다. 그것은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그러자 성은 그들의 발치아래 모래처럼 무너진다. 엉뚱하게 이 이야기를 떠올 린 것은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주섭이 데리고 온 학생들이 지른 함성, <주유소 습격사건> 그리고 <친구> 때문이다. 주섭들의 등장으로 경주아지트대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신라의 달밤>이 빚을 지고 있음이 확연한 두 영화 역시 관객동원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놓았다. ‘상업 영화’와 ‘재미’를 외치는 김 감독 앞에 놓인 것은 이제 관객이 느낄 재미와 관객이 이룰 기록 뿐이라는 생각이 성루처럼 무너져 내린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여호수아 6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