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을 보러 간 것은 현충일 아침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날 봐야 할 것만 같았거든요. 영화를 보는 내내 주변을 가득채운, 부모님의 곁에 앉은 어린이들이 걱정되었습니다. 노파심이었죠. 하지만 볼거리로 소모 당하는 생명의 가벼움에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현충일에 봐서는 안될 영화였습니다. 국가의 이름 뿐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해 생을 쏟은 모든 분들의 영정에 꽃과 사죄를 드립니다.
진주만
-눈 먼 승리의 횡포 (01. 6. 6)
@ 자본과 군국
천황을 위시한 일본의 군국주의는 독일 이탈리아와 형성한 공동전선에 진주만을 끼워 넣는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의 참전을 부추겼고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떨어져 비극을 양산하기까지 포화를 잊는 씨앗이 된다. 마이클 베이의 신작 <진주만>은 평온한 일요일 새벽 처참하게 부숴진 평화를 국가가 되찾는 회복기(回復記)다. 영화에는 3000명의 생명이 부어진 깊은 상처가 있고 16대의 폭격기로 감행한 무모한 도쿄공습 안엔 충만한 애국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은 메말라 있다.
크개 두개의 프롯을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하나는 레이프(벤 에플렉), 대니(조시 하트네) 그리고 이블린(케이트 베킨세일)이 형성하는 사랑의 주고 받기와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이에 대한 미국의 반격이 나머지 하나이다. 전자는 전쟁멜로물의 공식을 별 다를 바 없이 따라간다. 주인공이 전장에 뛰어들고 기다리던 애인은 전사통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를 위로해주는 친구와 필연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식이다. 후자는 전형적인 보여주기 전략을 택한다. 전쟁 플롯의 내부에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담겨 있지 않다. 극중 자주 등장하는 뉴스릴처럼 선동과 과시만 있을 뿐이다. 멜로의 전형과 전쟁의 과시는 병렬구조로 진행되며 173분동안 서로의 영역을 넘보며 시시한 싸움에서 으르렁거린다.
<진주만>이 국가 공인을 받은 역사자료인 것은 아니다. 또 영화가 정직한 역사관을 지녀야 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오락의 옷을 입고 다가 온 무지는 충분히 위험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불어온 상처는 시대를 거슬러 진주만을 차지한 아니 더 올라가 미대륙을 점령할 지 몰랐던 하와이언과 인디언의 것보다 크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 가지 연설 씬은 단호히 미국인의 상처가 ‘크다’고 말한다. 그는 의회의 연설장과 백악관의 회의 석상에서 일어선다. 휠체어에 앉아 보조기구에 의존해야 했던 다리가 휘청이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태연하고 단호하게 복수와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의원들은 박수를, 내각은 침묵으로 동의한다. 미국인의 상처는 복수로 갚아야 할만큼 크고 깊다는 우격다짐이다. 대통령 행동은 국민 대표인 의회의 결정을 파블노프의 반응 같은 반사작용으로 추락시키며 이에 응하는 군사행동 역시 당위를 잃어버린다. 진주만의 포화가 끝나고 현실로 복귀한 우리의 눈 앞에 있는 것은 2대째 힘자랑 하는 부시의 MD협정이고 협상테이블마다 등장하는 국제법위반 법률 이른바 슈퍼 301조다.
어떤 면에서 <진주만>은 미국이 또 다른 전범임을 알리는 목소리 작은 고백서이다. 우리가 알고 잇듯이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 나부랭이는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던 숱한 생명을 마시고 뿌렸던 국가적규모의 강제집단최면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작고 약한 나라가 치밀한 계획으로 성공한 듯 포장된 승리의 기록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타민족에 대한 폭압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60년이 지난 지금, 전범(戰犯)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소유하였고-거칠게 말하면 1929년의 대공황을 탈출한 것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미국의 경제는 전쟁을 기반으로 한 피의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 역시 한국전쟁 발발이 그들의 경제와 범죄에 생명줄과 면죄부를 선물했다고 외면치 못하리라.- 그의 경제력은 극중 대사를 고치게 하며, 전쟁을 ‘세계사 흐름의 대치’로 의미절하 시킨다. 전쟁은 단순히 히틀러의 선동에서 발생했고 전후사정 없이 미국의 원유수입금지로 인해 위협 받은 일본의 안위가 국수주의를 발현케 했다는 식의 설정은 헛웃음 아니 구토를 유발시킨다. 생명을 담보로 한 공습이 이제껏 알고 있던 가미가제특공대뿐만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일본의 진주만 공습씨퀀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초원 위를 노는 아이들, 사진 찍는 사람들, 빨래 너는 아낙네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쫓는 카메라의 패닝은 역시 같은 방법으로 미국의 도쿄공습에 적용된다. 기모노 입은 여인들이 평온한 사원을 걷는 먼 하늘엔 전심초점으로 폭격기가 날아가는 식이다.-도쿄를 공략했다는 미국의 고백이자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는 주둥이와 꼬리가 이어진 악순환체(惡循環體)라는 것이 <진주만>의 고백이다.
@흔들리는 마음
영화는 미국의 한 시골집 창고에서 시작한다. 고철이 된 비행기를 조종하며 장난치고 있는 어린 레이프와 대니. 둘은 농약살포를 마치고 돌아온 레이프 아버지의 비행기를 실수로 잠깐 이륙시킨다. <진주만>에서 자연스러운 이야기하기는 바로 이때 뿐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이클 베이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CF계를 점령했던 전력이 있다. 그가 영화계로 들어온 것은 <나쁜 녀석들>. 당시 영화배우로서 신참이었던 윌 스미스를 일약 스타로 떠올린 첫 작품에 잉 <더록>, <아마겟돈>으로 이어진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행보는 규모를 키어가며 <진주만>에 이르렀다. 이 영화에도 그의 유연한 카메라는 두드러진다. 진주만을 감싸는 설정쇼트는 고정된 회화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공중 곡예를 하고 돌아온 레이프가 한 말 ‘오마쥬’처럼 존경해 마지 않는 카메론의 <타이타닉>보다 카메라에 담긴 수치 또한 한술 더 뜬다. 기울어 뒤집히는 배는 수십 척에 이르고 물에 빠진 이들에게 기총소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뢰 뒤에 고정된 시점쇼트는 감독의 희망을 여실히 들어낸다. 마치 어뢰의 시점처럼 구상된 이 쇼트는 다름아닌 그 뒤에 고정되어 있다. 어뢰가 배와 충돌함과 동시에 폭발을 롱 쇼트로 담아낸다. 즉 어뢰를 보내는 이를 따라가고 결과를 조망하는 전지적인 시점이다. 따라서 전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진주만 공습 씨퀀스는 인간의 논으로 바라보는 처절한 피내음이 사라져 있다. 쿠바 구딩 주니어를 내세와 인간미와 인종문제를 담아내려 했던 감독의 시도는 <타이타닉>의 3층 객실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의 끝을 정리하는 이블린의 나레이션 또한 그녀가 전시의 간호장교임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사족처럼 달아놓은 침몰한 아리조나의 오래된 모습도, <진주만>의 오마쥬는 패러디에 가깝다는 사실을 한 축을 거둔다.
간신히 멈춰선 아버지의 비행기에서 튀어나온 레이프와 대니는 “걸리면 죽어!”하며 뛰어간다. 이어지느 씬은 술취한 대니의 아버지가 대니를 때리는 것이다. 레이프의 아버지가 대니의 아버지로 전환됨과 동시에 전쟁의 상처, 레이프의 용기, 대니의 우정, 부자의 애정이 채 2분도 못 미치는 씬에서 모두 제시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성인이 된 후, 이야기와 생각은 덮고, 오직 볼거리에 집중한다.
영화의 본질이 ‘보여주기’에 있음을 거부할 순 없다. 음악이 청각의 쾌락을, 온동이 근육의 긴장을, 문학이 사고의 자유를 준다면 영화는 시각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이것은 미술처럼 제시된 형태의 분석과 인상을 통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체직감(同體直感)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볼거리는 영화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향하게 했고 작가들과 흥행사들은 여기에 사유와 쾌락을 집어 넣었다. 특히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상업영화 시스템은 자신이 개발한 장르의 역사와 체계의 견고함을 기반으로 자본과 기술집약에 스타파워를 얹어 강력한 문화적 침투력을 획득했고 이미 우리에게 조차 익숙한지 오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새로운 볼거리와 흐뭇한 이야기 인데 <진주만>이 잡은 것은 전자이고 놓친 것은 후자이다.
레이프, 대니, 이블린을 오가는 사랑은 행동과 달리 금욕적인 레이프와 반대로 감정적인 대니의 엇갈린 캐릭터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을 접게 한다. 또 공습과 동시에 아수라장이 되는 병원씬은 렌즈의 왜곡이 이블린의 시점 쇼트와 엇갈릴 때마다 끔찍한 장면을 등급에 맞추려 희석하려는 의도만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차라리 단호한 모습으로 비행기에 오르는 일본 군과 죽음을 강요하는 중령(알렉 볼드윈)의 연설, 대서양을 건너 오가던 레이프와 이블린의 편지 등 단편적인 감상이 전체를 잇는 노골적인 국가주의에 일관성 있는 접근이다.
이제는 채널 수의 증가로 의미가 덜한 감이 있지만, 여전히 연휴 때면 채널 한편을 차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마술 혹은 써커스나, 진기명기, 몰래카메라 같은 류가 그것인데 <진주만>의 볼거리는 이와 비슷하다. 유사한 볼거리가 반복적으로 화면을 가득 매움으로써 관객이 서서히 사고할 시간을 획득하고 진부한 스토리의 약점을 찾아내는 지루함에 근접한다.
@조국이라는 이름
<진주만>에는 할리우드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가족이 흐릿하다. 잠깐 스쳐지나 듯 등장한 레이프와 대니의 아버지들을 제외하곤 마지막 씬 이전까지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종류가 자원병 하나인 것처럼, 이들의 결정이 언제나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것은 가족의 부재가 필연적임을 역설한다. 대신 아버지의 자리엔 불구의 몸으로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친 대통령 루즈벨트와 바다를 감싸듯 전함을 품고 있는 진주만으로 대유된 미국이 있다.
레이프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 상태에 지원해 영국으로 날아간다. 그가 영국에 가는 이유는 정의의 수호도 아니고 국가의 이익도 아니다. 자신의 비행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다. 레이프는 대니에게 명령이라고 속이고, 이블린에게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진주만>이 다루는 엇갈린 사랑의 비극 혹은 어긋난 국가주의의 결과는 레이프가 열차를 타고 떠나는 씬에서 엿볼 수 있다. 레이프는 사지로 떠나는 전날밤, ‘소중한 것은 지키고 싶다’는 식의 말로 이블린을 혼자 호텔에 남겨 놓는다. 그리고 “내일은 꼭 배웅 나와달라”며 멋지게 손을 흔든다. 다음날 아침, 대니에게 태연한 듯 “오지 말라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열차에 오른 레이프는 무슨 이유에선지 늦게 도착한 이블린과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 전쟁에 있어 가볍고 사랑에 있어 무거웠던 레이프의 접근은 독일군의 총탄과 무언가가 막았던 이블린 앞에 좌절된다. 비극의 시작은 연인과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동시진행된다.
이것이 <진주만>이 품고 있는 또 다른 가족 이데올로기 즉 모체로 삼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표현방식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 혹은 국수주의를 말할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자실들인 군인을 자실특공대로 조직해 적지에 침투시킨 것은 자신의 안일한 대처방식뿐이었다. 정보부의 분석과 예측을 실증의 부재로 거부했던 자신의 판단력 비판은 생략하고 실패를 분노로 전환해 강화시키는 식으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지만 뛰어가 시무룩한 등허리를 감싸 안는 어린 대니처럼 군인들은 동료의 죽음엔 의연해지고 국가의 목표 앞에 단호해지는 것이다. 이는 돌아온 레이프에게 “거짓을 하고 떠난 네 잘못이다”라며 엉뚱한 논리를 전개하는 대니오 “당신 생각하며 살려했다”는 눈물어린 레이프의 고백을 눈길 하나로 외면해야 했던 이블린의 상전벽해와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꼼꼼한 논리보다는 강요된 당위에 가까운 군인의 행동은 이들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결국 친구의 목숨을 살리려는 우정은 예기치 않았던 엇갈린 가족을 만들어 내었고 그와 같이 미국의 승리 역시 잘못 들어선 길을 통해서 였음을 찾아낼 수 있다.
적국으로 등장하는 일본은 일부의 수뇌로 대표되는 전제, 군국주의로 표현되는데, 도쿄 공습씬에서 보듯이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미국을 이루는 세계 역시 ‘군사집단’으로 한정되어 있고 대통령의 결정과 맛물려 군국 전제 주의로 연결되어 다를 바 없다. <진주만>이 담고 있는 비틀린 가족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은 미국의 경우 국가주의로 일본의 경우 국수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뒤르케임이 내 놓았던 사회실재론(social realism)-개인에 앞서 이미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이론-을 불온한 징집 메시지로 오용하는 <진주만>의 국가체제는 위험하기 그지 없다.
돈 심슨과 손을 잡고 쌓아올린 제리 브룩하이머의 제작 방식은 세기를 바꿔 찬 후로도 변할 줄 모른다. 초년시절 마이클 베이와 맞춘 방식도 여전하다. 하지만 1억 4500만달러를 쏟아 부은 <진주만>에 이르러서는 이제까지 그가 강조한 훌륭한 이야기, 멋진 캐릭터, 주제, 사랑이야기 모두가 위험한 사상에 모두 갇히고 만다. 영화가 풍부한 볼거리와 적절한 사랑, 멋진 배우들에도 불구하고 삐걱이는 소리를 내는 것은 현란한 편집도 과도한 음악도 특이한 촬영도 아닌 시나리오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진주만>이 내어 놓은 의견에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순진한 15세 경계의 소년들은 손을 번쩍 들을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남은 모든 이들은 오류의 반복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리라. 안타까운 것은 기원의 순간이 볼거리의 매력으로 끌려온 스크린 앞에 선 후라는 사실이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0~12)
진주만
-눈 먼 승리의 횡포 (01. 6. 6)
@ 자본과 군국
천황을 위시한 일본의 군국주의는 독일 이탈리아와 형성한 공동전선에 진주만을 끼워 넣는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의 참전을 부추겼고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떨어져 비극을 양산하기까지 포화를 잊는 씨앗이 된다. 마이클 베이의 신작 <진주만>은 평온한 일요일 새벽 처참하게 부숴진 평화를 국가가 되찾는 회복기(回復記)다. 영화에는 3000명의 생명이 부어진 깊은 상처가 있고 16대의 폭격기로 감행한 무모한 도쿄공습 안엔 충만한 애국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은 메말라 있다.
크개 두개의 프롯을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하나는 레이프(벤 에플렉), 대니(조시 하트네) 그리고 이블린(케이트 베킨세일)이 형성하는 사랑의 주고 받기와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이에 대한 미국의 반격이 나머지 하나이다. 전자는 전쟁멜로물의 공식을 별 다를 바 없이 따라간다. 주인공이 전장에 뛰어들고 기다리던 애인은 전사통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를 위로해주는 친구와 필연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식이다. 후자는 전형적인 보여주기 전략을 택한다. 전쟁 플롯의 내부에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담겨 있지 않다. 극중 자주 등장하는 뉴스릴처럼 선동과 과시만 있을 뿐이다. 멜로의 전형과 전쟁의 과시는 병렬구조로 진행되며 173분동안 서로의 영역을 넘보며 시시한 싸움에서 으르렁거린다.
<진주만>이 국가 공인을 받은 역사자료인 것은 아니다. 또 영화가 정직한 역사관을 지녀야 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오락의 옷을 입고 다가 온 무지는 충분히 위험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불어온 상처는 시대를 거슬러 진주만을 차지한 아니 더 올라가 미대륙을 점령할 지 몰랐던 하와이언과 인디언의 것보다 크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 가지 연설 씬은 단호히 미국인의 상처가 ‘크다’고 말한다. 그는 의회의 연설장과 백악관의 회의 석상에서 일어선다. 휠체어에 앉아 보조기구에 의존해야 했던 다리가 휘청이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태연하고 단호하게 복수와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의원들은 박수를, 내각은 침묵으로 동의한다. 미국인의 상처는 복수로 갚아야 할만큼 크고 깊다는 우격다짐이다. 대통령 행동은 국민 대표인 의회의 결정을 파블노프의 반응 같은 반사작용으로 추락시키며 이에 응하는 군사행동 역시 당위를 잃어버린다. 진주만의 포화가 끝나고 현실로 복귀한 우리의 눈 앞에 있는 것은 2대째 힘자랑 하는 부시의 MD협정이고 협상테이블마다 등장하는 국제법위반 법률 이른바 슈퍼 301조다.
어떤 면에서 <진주만>은 미국이 또 다른 전범임을 알리는 목소리 작은 고백서이다. 우리가 알고 잇듯이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 나부랭이는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던 숱한 생명을 마시고 뿌렸던 국가적규모의 강제집단최면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작고 약한 나라가 치밀한 계획으로 성공한 듯 포장된 승리의 기록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타민족에 대한 폭압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60년이 지난 지금, 전범(戰犯)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소유하였고-거칠게 말하면 1929년의 대공황을 탈출한 것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미국의 경제는 전쟁을 기반으로 한 피의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 역시 한국전쟁 발발이 그들의 경제와 범죄에 생명줄과 면죄부를 선물했다고 외면치 못하리라.- 그의 경제력은 극중 대사를 고치게 하며, 전쟁을 ‘세계사 흐름의 대치’로 의미절하 시킨다. 전쟁은 단순히 히틀러의 선동에서 발생했고 전후사정 없이 미국의 원유수입금지로 인해 위협 받은 일본의 안위가 국수주의를 발현케 했다는 식의 설정은 헛웃음 아니 구토를 유발시킨다. 생명을 담보로 한 공습이 이제껏 알고 있던 가미가제특공대뿐만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일본의 진주만 공습씨퀀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초원 위를 노는 아이들, 사진 찍는 사람들, 빨래 너는 아낙네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쫓는 카메라의 패닝은 역시 같은 방법으로 미국의 도쿄공습에 적용된다. 기모노 입은 여인들이 평온한 사원을 걷는 먼 하늘엔 전심초점으로 폭격기가 날아가는 식이다.-도쿄를 공략했다는 미국의 고백이자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는 주둥이와 꼬리가 이어진 악순환체(惡循環體)라는 것이 <진주만>의 고백이다.
@흔들리는 마음
영화는 미국의 한 시골집 창고에서 시작한다. 고철이 된 비행기를 조종하며 장난치고 있는 어린 레이프와 대니. 둘은 농약살포를 마치고 돌아온 레이프 아버지의 비행기를 실수로 잠깐 이륙시킨다. <진주만>에서 자연스러운 이야기하기는 바로 이때 뿐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이클 베이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CF계를 점령했던 전력이 있다. 그가 영화계로 들어온 것은 <나쁜 녀석들>. 당시 영화배우로서 신참이었던 윌 스미스를 일약 스타로 떠올린 첫 작품에 잉 <더록>, <아마겟돈>으로 이어진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행보는 규모를 키어가며 <진주만>에 이르렀다. 이 영화에도 그의 유연한 카메라는 두드러진다. 진주만을 감싸는 설정쇼트는 고정된 회화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공중 곡예를 하고 돌아온 레이프가 한 말 ‘오마쥬’처럼 존경해 마지 않는 카메론의 <타이타닉>보다 카메라에 담긴 수치 또한 한술 더 뜬다. 기울어 뒤집히는 배는 수십 척에 이르고 물에 빠진 이들에게 기총소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뢰 뒤에 고정된 시점쇼트는 감독의 희망을 여실히 들어낸다. 마치 어뢰의 시점처럼 구상된 이 쇼트는 다름아닌 그 뒤에 고정되어 있다. 어뢰가 배와 충돌함과 동시에 폭발을 롱 쇼트로 담아낸다. 즉 어뢰를 보내는 이를 따라가고 결과를 조망하는 전지적인 시점이다. 따라서 전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진주만 공습 씨퀀스는 인간의 논으로 바라보는 처절한 피내음이 사라져 있다. 쿠바 구딩 주니어를 내세와 인간미와 인종문제를 담아내려 했던 감독의 시도는 <타이타닉>의 3층 객실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의 끝을 정리하는 이블린의 나레이션 또한 그녀가 전시의 간호장교임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사족처럼 달아놓은 침몰한 아리조나의 오래된 모습도, <진주만>의 오마쥬는 패러디에 가깝다는 사실을 한 축을 거둔다.
간신히 멈춰선 아버지의 비행기에서 튀어나온 레이프와 대니는 “걸리면 죽어!”하며 뛰어간다. 이어지느 씬은 술취한 대니의 아버지가 대니를 때리는 것이다. 레이프의 아버지가 대니의 아버지로 전환됨과 동시에 전쟁의 상처, 레이프의 용기, 대니의 우정, 부자의 애정이 채 2분도 못 미치는 씬에서 모두 제시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성인이 된 후, 이야기와 생각은 덮고, 오직 볼거리에 집중한다.
영화의 본질이 ‘보여주기’에 있음을 거부할 순 없다. 음악이 청각의 쾌락을, 온동이 근육의 긴장을, 문학이 사고의 자유를 준다면 영화는 시각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이것은 미술처럼 제시된 형태의 분석과 인상을 통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체직감(同體直感)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볼거리는 영화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향하게 했고 작가들과 흥행사들은 여기에 사유와 쾌락을 집어 넣었다. 특히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상업영화 시스템은 자신이 개발한 장르의 역사와 체계의 견고함을 기반으로 자본과 기술집약에 스타파워를 얹어 강력한 문화적 침투력을 획득했고 이미 우리에게 조차 익숙한지 오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새로운 볼거리와 흐뭇한 이야기 인데 <진주만>이 잡은 것은 전자이고 놓친 것은 후자이다.
레이프, 대니, 이블린을 오가는 사랑은 행동과 달리 금욕적인 레이프와 반대로 감정적인 대니의 엇갈린 캐릭터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을 접게 한다. 또 공습과 동시에 아수라장이 되는 병원씬은 렌즈의 왜곡이 이블린의 시점 쇼트와 엇갈릴 때마다 끔찍한 장면을 등급에 맞추려 희석하려는 의도만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차라리 단호한 모습으로 비행기에 오르는 일본 군과 죽음을 강요하는 중령(알렉 볼드윈)의 연설, 대서양을 건너 오가던 레이프와 이블린의 편지 등 단편적인 감상이 전체를 잇는 노골적인 국가주의에 일관성 있는 접근이다.
이제는 채널 수의 증가로 의미가 덜한 감이 있지만, 여전히 연휴 때면 채널 한편을 차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마술 혹은 써커스나, 진기명기, 몰래카메라 같은 류가 그것인데 <진주만>의 볼거리는 이와 비슷하다. 유사한 볼거리가 반복적으로 화면을 가득 매움으로써 관객이 서서히 사고할 시간을 획득하고 진부한 스토리의 약점을 찾아내는 지루함에 근접한다.
@조국이라는 이름
<진주만>에는 할리우드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가족이 흐릿하다. 잠깐 스쳐지나 듯 등장한 레이프와 대니의 아버지들을 제외하곤 마지막 씬 이전까지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종류가 자원병 하나인 것처럼, 이들의 결정이 언제나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것은 가족의 부재가 필연적임을 역설한다. 대신 아버지의 자리엔 불구의 몸으로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친 대통령 루즈벨트와 바다를 감싸듯 전함을 품고 있는 진주만으로 대유된 미국이 있다.
레이프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 상태에 지원해 영국으로 날아간다. 그가 영국에 가는 이유는 정의의 수호도 아니고 국가의 이익도 아니다. 자신의 비행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다. 레이프는 대니에게 명령이라고 속이고, 이블린에게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진주만>이 다루는 엇갈린 사랑의 비극 혹은 어긋난 국가주의의 결과는 레이프가 열차를 타고 떠나는 씬에서 엿볼 수 있다. 레이프는 사지로 떠나는 전날밤, ‘소중한 것은 지키고 싶다’는 식의 말로 이블린을 혼자 호텔에 남겨 놓는다. 그리고 “내일은 꼭 배웅 나와달라”며 멋지게 손을 흔든다. 다음날 아침, 대니에게 태연한 듯 “오지 말라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열차에 오른 레이프는 무슨 이유에선지 늦게 도착한 이블린과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 전쟁에 있어 가볍고 사랑에 있어 무거웠던 레이프의 접근은 독일군의 총탄과 무언가가 막았던 이블린 앞에 좌절된다. 비극의 시작은 연인과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동시진행된다.
이것이 <진주만>이 품고 있는 또 다른 가족 이데올로기 즉 모체로 삼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표현방식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 혹은 국수주의를 말할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자실들인 군인을 자실특공대로 조직해 적지에 침투시킨 것은 자신의 안일한 대처방식뿐이었다. 정보부의 분석과 예측을 실증의 부재로 거부했던 자신의 판단력 비판은 생략하고 실패를 분노로 전환해 강화시키는 식으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지만 뛰어가 시무룩한 등허리를 감싸 안는 어린 대니처럼 군인들은 동료의 죽음엔 의연해지고 국가의 목표 앞에 단호해지는 것이다. 이는 돌아온 레이프에게 “거짓을 하고 떠난 네 잘못이다”라며 엉뚱한 논리를 전개하는 대니오 “당신 생각하며 살려했다”는 눈물어린 레이프의 고백을 눈길 하나로 외면해야 했던 이블린의 상전벽해와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꼼꼼한 논리보다는 강요된 당위에 가까운 군인의 행동은 이들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결국 친구의 목숨을 살리려는 우정은 예기치 않았던 엇갈린 가족을 만들어 내었고 그와 같이 미국의 승리 역시 잘못 들어선 길을 통해서 였음을 찾아낼 수 있다.
적국으로 등장하는 일본은 일부의 수뇌로 대표되는 전제, 군국주의로 표현되는데, 도쿄 공습씬에서 보듯이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미국을 이루는 세계 역시 ‘군사집단’으로 한정되어 있고 대통령의 결정과 맛물려 군국 전제 주의로 연결되어 다를 바 없다. <진주만>이 담고 있는 비틀린 가족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은 미국의 경우 국가주의로 일본의 경우 국수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뒤르케임이 내 놓았던 사회실재론(social realism)-개인에 앞서 이미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이론-을 불온한 징집 메시지로 오용하는 <진주만>의 국가체제는 위험하기 그지 없다.
돈 심슨과 손을 잡고 쌓아올린 제리 브룩하이머의 제작 방식은 세기를 바꿔 찬 후로도 변할 줄 모른다. 초년시절 마이클 베이와 맞춘 방식도 여전하다. 하지만 1억 4500만달러를 쏟아 부은 <진주만>에 이르러서는 이제까지 그가 강조한 훌륭한 이야기, 멋진 캐릭터, 주제, 사랑이야기 모두가 위험한 사상에 모두 갇히고 만다. 영화가 풍부한 볼거리와 적절한 사랑, 멋진 배우들에도 불구하고 삐걱이는 소리를 내는 것은 현란한 편집도 과도한 음악도 특이한 촬영도 아닌 시나리오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진주만>이 내어 놓은 의견에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순진한 15세 경계의 소년들은 손을 번쩍 들을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남은 모든 이들은 오류의 반복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리라. 안타까운 것은 기원의 순간이 볼거리의 매력으로 끌려온 스크린 앞에 선 후라는 사실이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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