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가문의 영광> 영화를 다르게 보는 한가지 방법

열혈연구 2002. 9. 28. 01:14
가문의 영광
-영화를 다르게 보는 한가지 방법


같은 날 우리 영화 두 편을 봤습니다. <가문의 영광>과 <오아시스>. 후자는 생각했던 대로 ‘사랑’이야기 였습니다. 육체와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끝까지 쫓아가보는 이창동 감독의 단호함에는 이번에도 손을 들 수 밖에 없었죠. 전자 역시 생각했던 대로 ‘사랑’이야기 였습니다. 태생의 문제로 억지 사랑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시종 즐겁게 보여주더군요. 그런데, 의문은 두 편의 영화를 보람차게 보고 난 후에야 들었습니다. 관객의 사랑을 받는 <가문의 영광>이 왜 평단에게는 무시당해야 하는 걸까요? 이 글은 그 해답의 한 갈래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제안입니다.



나운규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리랑>, 단 한편만으로도 일제시대를 지나 우리 역사의 으뜸 영화인으로 기억되는 이입니다. 어디선가 한두 번쯤은 그의 사진을 보셨겠죠. 시작부터 그의 이름을 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리랑>의 평가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있는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는 <아리랑>은 이름 석자만으로 우리 역사의 으뜸 영화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달 세계 여행>보다 이르지도 않고, <국가의 탄생>처럼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전설(傳說)만으로 최고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합니다. 뭐, 여기서 수 없는 책과 논문에서 다룬 내용을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리랑>이 새로운 내용을 담은 영화였다는 것과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신문들(영화에 대한 평을 실을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던)의 평가입니다. 영화가 개봉되었던 1926년 10월 당시, 일부 신문에서는 <아리랑>의 결점과 미완성도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전국적으로 흥행에 성공하자 차츰 논조는 찬사 일변도로 변해갑니다.

영화의 흥행에는 많은 유형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감독이나 제작자의 고집, 이름하야 ‘예술 정신’을 추구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런 영화는 부침이 심할 뿐 아니라, ‘해외 유수 영화제’라는 인증 도장을 받은 후에야 본격적인 홍보를 할 수 있습니다. 흥행 확률은 좀 낮지만,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최근 (흥행과 작품성에서) 성공작으로는 <취화선>과 <오아시스>가 (흥행과 작품성에서) 실패작으로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있다 하겠습니다.


두 번째 경우로는 관객의 입맛에 맞도록 공식을 도입해 제작하고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우리영화 흥행 순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코메디 영화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문의 영광>도 이 범주에 들어가죠.

그렇다면,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영화는 작가의 냄새를 풍겨야만 예술인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세계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영화 감독들의 경우를 살펴 보면, ‘작가적 고집’이 있는 이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들었고, ‘성공’함으로 인해 이름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께서 영화사에 남을 영화를 만들고 싶으시다면, 제가 비결을 알려드리죠. 위에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엄청 고집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자가 제작을 해서 이십년 정도 공들인 애니메이션을 만들던가, 이제껏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를 내세우던가, 금기를 깨뜨리는 겁니다. 이게 어려우실 것 같으면, ‘올해의 흥행 5위’ 안에 드는 방법도 있습니다.-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1,2위로 압축됩니다.

잘라 말하자면 정흥순 감독은 우리 영화사에 남을 것입니다. 적어도 ‘2002년 우리 영화는 코믹물의 강세가 뚜렷했다. 임권택의 <취화선>,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깐느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함으로써 명목을 살렸다면, 장항준의 <라이터를 켜라>, 정흥순의 <가문의 영광>은 국내시장 점유율 40%를 유지한 일등공신이었다’ 정도로 실리지 않을까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가문의 영광>은 비난 받을 만큼 잘못 만들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전제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웰 메이드(다소 비아냥이 섞인 단어이긴 합니다만, 여기서는 그저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를 의미합니다)에 가깝습니다. 제 생각에 이 영화가 비평가들에게 비난 받는 이유는 섹스와 관련한 ‘18세 이상 청취가’식 말장난과 거슬리는 모 카드회사의 선전, 그리고 쨘~ 하고 나타나는 몇 장면의 친절한 C.G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빼 놓으면(이에 대해 딴죽을 거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아시스>도 이유없이 화면이 흔들리거나 초점이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 59회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작품이죠), 썩 잘 만들어진, 꽤나 재미있는 영화라는 겁니다.

정흥준 감독은 단도직입, ‘가문의 영광’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시작합니다. 최근 화려한 오프닝 시퀀스가 없는 영화들 사이에서 오히려 돋보이는 출발입니다. 카메라는 극부감(일명 birds eye shot라고 하는,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보는 쇼트를 말합니다)에서 땅으로 내려와 망원경, 흐트러진 옷가지, 액자, 운석을 거쳐 자명종을 지나고 침대에 도달합니다. 이때 보이는 몇 가지 소품들은 각각 하나의 플롯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둘을 처음 만나게 한 잠자리가 펼쳐진 ‘침대’와 다시 만나게 하는 ‘흐트러진 옷가지’, 갈등의 한 축인 다른 여자가 담긴 액자는 물론 둘의 마음이 통하게 한 ‘별’ 등 이 첫 번째 쇼트는 영화 전체를 몰래 보여주는 지도와 같습니다. 또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종종 극부감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데, 이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고 말리라 장담하는 감독의 의지처럼 보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깡패 부자(父子)들이 외동딸이자 동생인 진경을 서울대 출신의 젊은 기업가, 대서와 결혼시키려는 우여곡절입니다. 어디 이게 흔히 있을법한 일입니까? 즉, 이 영화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정 감독은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그는 정자에 대서의 얼굴이 겹치고, 별자리에 둘의 모습을 새기고, 하늘에 말하는 얼굴을 올려놓습니다. 이는 영화의 판타지를 처음으로 깨달았던 멜리에스의 백년 전 시도와 똑같습니다. 정 감독은 아주 고전적인 방식으로 영화가 판타지 임을 보여줍니다.

또, 쓰리제이파가 여수를 근간으로 한 깡패라는 설정도 우리나라 깡패 영화의 전통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5년 전만 해도, 영화와 TV속 거의 모든 깡패는 전라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진경의 오빠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깡패 입니다. 깡패가문인거죠. 하지만 그들은 밉지 않은 깡패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희화한 깡패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빠들의 모든 행동을 비롯해, 사투리를 쓰는 진경의 모습은 슬랩스틱 코메디의 인물들과 비슷합니다. 이들이 관객을 웃기는 코드는 ‘무식=사투리’, ‘바보스러움=식탐’으로 시종 일정합니다.커다란 망치에 맞아도, 벽에 부딪혀도 인물의 아픔을 걱정하기보다 웃어제낄 수 있는 채플린식 잔혹 유머가 유성영화로 바뀌었다면 아마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문의 영광>은 멜리에스와 채플린의 판타지와 웃음을 전라도 깡패라는 익숙한 인물들에 발라 놓았다는 말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많은 에피소드에 걸맞는 신(scence)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에피소드별로 따로 웃기지 않습니다. 오직 ‘대서와 진경의 결혼’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를 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 감독은 이를 위해 가정구도와 순결 이데올로기를 내세웁니다.

진경의 큰오빠인 인태는 예쁜 여자만 보면 사죽을 못씁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담임선생님에게 쏙 빠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적한 공원에서 둘이 입을 맞추는 찰나, 그의 부인 미순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남편의 바람을 철저히 응징합니다. 남편이 아닌 여선생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또 대서의 애인 유진은 쓰리제이파의 전략에 의해 남자 모델과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그리고 대서는 유진과 모델의 키스 장면을 바에서 목격한 후 그녀를 잊습니다.

노골적인 권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쓰리제이파로 대표되는 폭력,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부는 여선생을 꼬시고, 모델을 육탄 무기로 이용하고 결국에는 대서를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고 맙니다.

여기에 면죄부를 던지는 것 역시 진경의 순결함입니다. 그녀는 대서의 요구에 따라 병원에 가서 처녀막 검사를 합니다. 짧은 치마 한번 입지 않는 진경은 권력의 흔적을 깨끗이 씻습니다. <가문의 영광>의 성(性)은 성교(intercourse)가 아닌 순결(purity)이었던 것입니다. 확대 해석한다면, 진경은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남자와 잤다’는 오해를 받지만 결혼할 때까지 순결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녀의 솔직한 행동은 가문의 원죄와 범죄들을 가립니다. 그리고 진경의 결혼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 계획된 가문의 음모였습니다.

반면 대서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에피소드를 증거로 내세우겠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술집 폭력배들의 계략에 걸리고 맙니다. 그는 웃으며 전화 한 통을 합니다. 진경의 오빠들에게 건 것이죠. 쓰리제이파는 사건을 정리하고 그들의 힘에 기댄 대서는 장난을 칩니다. 뒤이어 이 에피소드는 쓰리제이 전설과 클라이막스의 위기와도 연결됩니다. 대서는 결국 진경과 결혼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죠. 진경의 순결함이 둘의 결혼과 대서의 잘못을 정화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심지어 미장센(mise-en-scene, 간단히 말하면 한 프레임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을 잘 활용하기도 합니다. 진경이 싸우고 온 오빠들을 치료하는 신입니다. 윗도리를 벗고 치료를 기다리며 차례로 기다리는 오빠들. 진경의 빨간약 바른 핀셋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 구석에 걸친 오빠의 마징가 문신이 보입니다. 대서를 위기에서 구해 온 오빠의 어깨에 새겨진 정의의 사도 마징가는 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으로 인해 뒤늦게 발견되고 잔뜩 당긴 활시위처럼 힘찬 웃음을 유발합니다.

진경은 회사에서 여자 동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인즉슨, 기분에 사랑이라 말했더니 사랑이 시작되더라 였습니다. 이것은 호명(呼名, interpellation) 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것이든 아니든(‘기분에’) 이 과정에서 불려진 사람은 불려진 것이 바로 자신임을 인식(‘사랑이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권위의 힘으로 불려진 그 개인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서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정 감독은 이 신을 캐비닛의 닫고 엶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캐비닛 안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열린 캐비닛 문 너머로 진경과 친구가 각각 보입니다. 친구가 이야기를 하고 떠나가면 진경 홀로 남습니다. 진경은 어둠으로 구성된 프레임 안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호명을 통해 사랑을 이룬 친구와 달리 그녀는 아직 막연한 관계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진경과 대서의 사랑이 위기에 처하는 레스토랑 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래서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곳에서 ‘나 항상 그대를’ 부르는 김정은은 적절한 감정 표현(불안한 노래 실력과도 맞아 떨어지는)으로 진경이라는 캐릭터의 폭을 넓힙니다. 모든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반해 진경의 다양한 모습은 <가문의 영광>의 핵심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퀀스(sequence)로 가겠습니다. 진경과 대서의 결혼식장입니다. 서스펜스(suspense)를 일으키는 도구로는 유명한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치콕이 사용했던 방식으로 맥거핀(MacGuffin)이라는 함정을 이용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맥거핀으로 쓰이는 소재를 미리 보여주고 관객의 자발적인 추리 행태를 통해 서스펜스를 유도합니다. 해당 신은 편집되지 않은 채로 있더라도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대열차 강도>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증폭하는데 공식처럼 이용된 교차편집(crosscutting)입니다. 정 감독은 교차편집을 택했습니다. 특히 그는 <대부>로 시작해 <졸업>으로 끝나는 오마주(homage, 코메디 영화라고 해서 모두 패러디인 것은 아닙니다)를 선보입니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바깥에서는 빨간 장갑파가 쳐들어 옵니다. 오빠들이 하나씩 나가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한쪽에서는 웃음 어린 결혼 서약이 이루어지는 식입니다. 턱시도를 입고 몽둥이를 든 상대와 싸우는 오빠들의 모습은 처절하고 슬픕니다. 석태와 경태를 먼저 보내놓고, 걱정되어 결혼식장 맨 앞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큰 오빠 인태의 표정은 압권입니다. 반지가 손에 끼워지면, 현과 비트가 공존하는 음악이 흐르고, 웃는 둘의 얼굴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경태와 돌아서 싸우러 나가는 인태의 쇼트가 슬로우 모션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교차편집의 마지막은 결혼식과 폭력 사건이 하나가 됩니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솔직히 <가문의 영광>이 균질한 완성도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제가 ‘웰 메이드’라고 했던 것은 ‘마징가 문신’이 보였던 중반 이후를 가리켰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이 영화는 절반의 작품성만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그래서 진지하게 논할 가치가 없는 걸까요? 일부가 성분배,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만하다고 해서, 영화의 결말이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 닫힌 구조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 보다 직접적으로 ‘유치한’ 코메디여서 일까요! 해답은 제가 알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코메디에 대해서도 생각은 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시종 여러분의 코웃음을 자극했다면, 그 또한 성공입니다! ^^- 즐거운 가을입니다. <가문의 영광>와 <오아시스>이 나란히 흥행 1,2위를 한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여전히 우리 영화는 우리 영화 관객이 있음으로 희망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