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007 어나더데이> 세 얼굴의 제임스 본드

열혈연구 2003. 1. 7. 16:35
<007 어나더데이>를 보러 간 개봉 주말 아침, 극장 안에는 겨우 20명 내외의 관객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영화에 담긴 북한과 한국에 관련된 오류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옥의 티만큼이나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 대한 분노보다 우리의 현실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예를 들자면 영화에서처럼 미국의 NSA나 영국의 MI6는 아닐지라도, 전시에는 한미연합사령부의 미군의 중장급 장군에게 우리군의 통수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현실 말입니다.

007 어나더데이
-세 얼굴의 제임스 본드

마흔 살을 먹은 007시리즈가 여전히 첩보물의 대명사로 남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에는 본드 걸이라 불리는 육체의 향연과 바람둥이 첩보원 본드 자신이 꼭 낀다. 여기에 Q가 만들어냈던 기상천외한 첩보기기들은 본드의 생존을 한세대 넘도록 지속하는데 한몫을 해냈다. 그러나 위험한 임무들을 척척 해결해내며 007을 오랫동안 살아 남게 한 핵심은 세계 대전의 포화 뒤에 형성된 냉전 대결구조 자체였다. 동독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가 이루어진 90년대 들어서 007 시리즈가 힘을 쓰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007은 새로이 살길을 모색해 왔고 <007 어나더데이>는 이에 대한 네 번째 답변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본드의 자리를 맡은 것도 햇수로 9년이다. 그는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주름살이 늘어가는 007’ 역을 성실히 수행해내고 있다. 냉전시대 종말 이후 관심에서 멀어졌던 007시리즈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본드로 등극한 이후 자본과 미디어에 초점을 맞췄다. 다소 억지스럽던 이전 편들의 적들에 비해 ‘악의 축’으로 분류된 북한에 총구를 향한 것은 어찌보면 타당할 수 있다. 적어도 미국인들에게는 말이다.(<007 어나더데이>는 특이한 경험을 선물한다. 찬반탁 논란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근 반세기동안 지속되었던 ‘주적=북한’ 개념의 파괴가 영화에서도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 관객으로서 필자는 영화 내내 중국, 미국, 영국의 첩보부대에게 쫓기는 자오의 뻔한 죽음을 거부하려 하고,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문대령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여느 007시리즈에서 그러하듯 <007 어나더데이> 역시 적수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북한의 테러리스트 자오와 문대령이다. 이들은 무기 밀매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입수하고 공격용 위성인 이카루스를 띄운다. 실제로 자오와 문대령을 사라져야 할 악의 세력으로 모는 설정은 별다른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군수품 판매 세계 1위 국인 미국이 북한의 무기 판매에 대해 시비 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극의 종반에 문대령이 저지르는 패륜은 맥락상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영화내내 한명도 죽이지 않는 자오가 본드보다 잔인하다거나 나쁠 이유도 없다. 나아가 둘의 전쟁발발 음모조차 개인의 도덕과 인간성을 파멸시켜가는 <플래툰>, <풀 메탈 자켓>, <씬 레드 라인>, <디어 헌터> 등 수많은 베트남 영화에서의 미국이나, <비상계엄>의 장군,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정부의 것보다 덜 급진적이다.

<007 어나더데이>에서 유심히 지켜볼 것은 공공의 적인 자오와 죽었다 부활한 문대령의 모습이 본드와 겹쳐진다는 점이다. 본드는 북한군에 잡혀 14개월 동안 물, 불, 독으로 고문을 당한다. 그가 처형장으로 여긴 안개 낀 다리 저편은 요단강의 이편이었다. 본드는 자오와 맞교환 조건으로 살아난 것이다. 자오는 중국고위관료 테러 혐의를 받고 있는 상태다. 이미 그는 미, 중, 영 첩보부의 과녁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MI6측에서 볼 때 자오는 없어져야 할 테러범이지만, 그 역시 북한측에서 볼 때는 우수한 첩보원일 뿐이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본드는 자오의 뒤를 캐내기 위해 찾아간 하나바에서 자오 역시 자국에서는 투사이자 영웅일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본드에게 이 말을 한 사람이 타락한 쿠바인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한계이다.

문대령은 북한의 엘리트 군인이다. 그가 하바드에서 수학한 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것은 자본주의의 썩은 내 나는 비밀이었다. 본드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한 문대령은 쿠바에서 DNA 변조를 통해 다이아몬드 황제, 구스타프로 다시 태어난다. 백인이 된 그는 수술 후유증으로 잠을 잘 수 없고 수면 기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전부다. 꿈꿀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한 문대령은 현실을 자신의 꿈으로 바꿀 이카루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이카루스는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달아준 밀랍날개를 잃고 애게해에 떨어져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 채 태양으로 향하다 날개가 녹아 내린 것이다. 태양의 힘에 의해 죽은 이카루스를 문대령이 세운 프로젝트 이름으로 만든 것은 007식 해피엔딩에 대한 복선이다)

자오가 본드와 같은 임무를 가진 인물이라면 문대령은 본드와 같은 캐릭터를 소망한다. 그는 본드와 마주한 얼음궁전 신에서 이를 고백한다. 문대령은 자신이 부활을 계획한 이후 철저히 본드의 성격을 닮기로 했다 말한다. 여자와 첨단 무기를 동급으로 부리는 재주를 가리킨 듯 하다. 문대령과 본드가 대결하는 비행기 내 결투는 이를 확연히 드러낸다.

문대령은 이카루스 프로젝트를 통해 휴전선에 심어놓은 지뢰밭을 청소한다. 이를 저지하러 달려온 것은 007과 징크스. 문대령의 전술전용기는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태양에너지를 쏟아내는 위성, 이카루스의 레이저 빛에 자신의 날개를 상해가며 추락하고 있는 중이다. 뚫린 창문으로 발생한 기압차는 모든 것을 빨아내 허공에 뿌려대고 있다.

이때 문대령과 본드, 프로스트와 징크스는 목숨을 건 최후의 결투를 시작한다. 추락하는 비행기 그리고 두 가지 대결을 오가는 교차편집은 이 영화의 절정이다. 자신이 학습한 본드와 문대령이 주먹싸움을 할 때, 그의 여자 프로스트는 본드의 조력자인 징크스와 칼 싸움을 한다. 당연히 문대령은 샹들리에에 꽂혀죽은 자오처럼 본드의 능력과 정체성을 다시 알려주는 선에서 임무를 마친다. 아무리 본드와 닮았을지언정 그들은 태양이 떠있는 순간에만 유효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폐지하철 역에서 살인면허와 임무 복원을 알려주는 M은 본드에게 세상은 변했다고 말한다. 본드는 그녀에게 자신은 변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007 시리즈의 구태의연한 힘이다.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요한계시록 16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