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스티치
-말괄량이 길들이기
물론 <릴로와 스티치>는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당연히 깔끔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었죠.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불어로 듣더라도 이해가 쏙쏙될만큼 쉽고 정확했습니다. 8.5유로의 입장료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헌데, 정작 글을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미 익숙한 반골 기질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이었죠. 해서 처음 보고 나온 느낌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고 있는 형상입니다. 허헛.
디즈니의 영화 만들기는 그들의 산업에 수많은 어린이들이 착취된다는 폭로와 상관없이 여전히 행복한 가족 예찬이다. 선량한 의도를 가진 부모들은 지금 이순간도 디즈니와 함께 사랑스런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 노력한다.
디즈니의 영화는 1923년 영화사 설립이래, 1928년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팔십년의 영욕을 맞보고 있다. 그들의 가족이라는 방향설정은 미국의 대공황과 시작을 같이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많은 가족들의 눈에 피눈물을 흐르게 했던 5년 전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경제의 어려움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후 한번의 세계 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로써 부를 다지고,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국지전으로 그 부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가족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멀고 먼 이상향(paradis)이 되었는지 모른다.
영화는 멀리 우주에서 시작해 미국의 마지막주이자 그들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하와이에서 펼쳐진다. 튜로행성의 실험용 생명체이자 범죄자인 스티치가 탈옥해 불시착한 곳이 바로 하와이. 그곳에는 언니 나니와 살고 있는 릴로가 있다. 스티치와 릴로는 동물보호소에서 만난다. 피할 곳이 필요한 스티치의 공급과 친구가 없는 릴로의 수요가 가족으로 삼겠다는 동의서와 함께 일치하는 순간이다.
둘은 미국의 변방 하와이 원주민인 릴로와 만들어진 실험체이면서 범죄자인 스티치로 먼 거리에 놓인 듯 하지만,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자신만을 추구하고, 누군가에게 쫓기며, 홀로 설 수 없고, 가족도 없다는 점이다. 둘은 아동 보호국의 감시를 벗어나야 하는 나니의 생활력과 착한 일을 한 번만이라도 하라는 판사의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썽을 부린다.
이 둘이 갈 곳은 마땅히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곳을 알고 있다. 디즈니 영화이기 때문이다. 말괄량이들이 제대로 길들여져 행복한 가족을 이룬다는 디즈니의 믿음은 팔순을 넘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가족 만들기는 왜 여전히 거슬리는 걸까.
셰익스피어 이래로 ‘말괄량이 길들이기’표 영화들은 뻔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말괄량이가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으며 단계적으로 성숙해간다는 식이다. 이런 류의 영화 중,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가장 세련된 절제력을 가지고 있다. 말괄량이 역할의 못된 아이 상우는 영화의 종말에 이르러 할머니와 이별하는 버스의 뒷창문에서야 못되지 ‘않은’ 아이에 도달한다. 상우는 할머니의 본심을 알 만한 곳에서 번번히 관객의 기대를 져버린다. 감독의 냉철한 선택은 오히려 관객의 가슴을 할머니의 것과 하나가 되게 한다. 상상보다 넓은 할머니의 마음만이 상상할 수 있는 전부인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릴로와 스티치>는 모든 순간이 예측 가능하다. 스티치가 공감할 책이 ‘미운 오리 새끼’라는 것도 심지어 개구리 한마리가 죽지 않을 것임도, 뚱뚱한 아저씨가 결코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임도 알 수 있다. 왜 일까.
디즈니랜드에 가본 적 있는가 . 아니 아무런 놀이공원이라도 좋다. 에디 머피가 <비버리 힐즈 캅3>에서 확연히 보여줬던 것처럼, 놀이공원은 표면과 이면이 명확히 구분된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영화의 요체와 근접한 가장 영화적인 곳이기도 하다. 디즈니는 자신들의 세상,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놀이공원처럼 만들고 있다. 그들의 영화는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마술 거울과 같다. 엔딩 타이틀과 함께하는 스티치의 미래는 행복해 보이지만 처절하다. 그가 진정한 가족, ‘오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며, 공부를 도우며 함께 즐긴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행복한 가족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헌신’임을 정확히 찌르는 날카로움이다.
솔직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라인은 별 흠잡을 것이 없다. 17년 묵힌 이야기가 덜컥인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다만 그들을 꼬집을 수 있는 것은 앞서 길게, 반복해서 투덜거린 ‘영악한 계산력’ 혹은 ‘정치적으로 다름’이며 여전히 실험중인 3D 부분의 어색함이다.(종반에 이르는 우주선 전투씬은 내부적으로 실내와 외부, 외부적으로 이전의 우주 전투씬과 확연히 구분되어 극의 집중도를 다소나마 떨어뜨리는데 성공한다)
이순간, 버터처럼 들려오는 엘비스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렇게도 음란했던 ‘Hound Dog’, ‘Suck on You’가 어린 아이의 애창곡이 되는 곳. 디즈니 영화상 최고의 악동인 스티치마저 순한 양이 되는 곳. 이것이 가족 영화의 산실, 디즈니가 꿈꾼 불균질한 세계이다. 당신이 디즈니의 눈에 비친 후에도 말괄량이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태복음 15 : 8)
-말괄량이 길들이기
물론 <릴로와 스티치>는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당연히 깔끔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었죠.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불어로 듣더라도 이해가 쏙쏙될만큼 쉽고 정확했습니다. 8.5유로의 입장료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헌데, 정작 글을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미 익숙한 반골 기질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이었죠. 해서 처음 보고 나온 느낌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고 있는 형상입니다. 허헛.
디즈니의 영화 만들기는 그들의 산업에 수많은 어린이들이 착취된다는 폭로와 상관없이 여전히 행복한 가족 예찬이다. 선량한 의도를 가진 부모들은 지금 이순간도 디즈니와 함께 사랑스런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 노력한다.
디즈니의 영화는 1923년 영화사 설립이래, 1928년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팔십년의 영욕을 맞보고 있다. 그들의 가족이라는 방향설정은 미국의 대공황과 시작을 같이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많은 가족들의 눈에 피눈물을 흐르게 했던 5년 전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경제의 어려움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후 한번의 세계 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로써 부를 다지고,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국지전으로 그 부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가족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멀고 먼 이상향(paradis)이 되었는지 모른다.
영화는 멀리 우주에서 시작해 미국의 마지막주이자 그들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하와이에서 펼쳐진다. 튜로행성의 실험용 생명체이자 범죄자인 스티치가 탈옥해 불시착한 곳이 바로 하와이. 그곳에는 언니 나니와 살고 있는 릴로가 있다. 스티치와 릴로는 동물보호소에서 만난다. 피할 곳이 필요한 스티치의 공급과 친구가 없는 릴로의 수요가 가족으로 삼겠다는 동의서와 함께 일치하는 순간이다.
둘은 미국의 변방 하와이 원주민인 릴로와 만들어진 실험체이면서 범죄자인 스티치로 먼 거리에 놓인 듯 하지만,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자신만을 추구하고, 누군가에게 쫓기며, 홀로 설 수 없고, 가족도 없다는 점이다. 둘은 아동 보호국의 감시를 벗어나야 하는 나니의 생활력과 착한 일을 한 번만이라도 하라는 판사의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썽을 부린다.
이 둘이 갈 곳은 마땅히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곳을 알고 있다. 디즈니 영화이기 때문이다. 말괄량이들이 제대로 길들여져 행복한 가족을 이룬다는 디즈니의 믿음은 팔순을 넘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가족 만들기는 왜 여전히 거슬리는 걸까.
셰익스피어 이래로 ‘말괄량이 길들이기’표 영화들은 뻔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말괄량이가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으며 단계적으로 성숙해간다는 식이다. 이런 류의 영화 중,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가장 세련된 절제력을 가지고 있다. 말괄량이 역할의 못된 아이 상우는 영화의 종말에 이르러 할머니와 이별하는 버스의 뒷창문에서야 못되지 ‘않은’ 아이에 도달한다. 상우는 할머니의 본심을 알 만한 곳에서 번번히 관객의 기대를 져버린다. 감독의 냉철한 선택은 오히려 관객의 가슴을 할머니의 것과 하나가 되게 한다. 상상보다 넓은 할머니의 마음만이 상상할 수 있는 전부인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릴로와 스티치>는 모든 순간이 예측 가능하다. 스티치가 공감할 책이 ‘미운 오리 새끼’라는 것도 심지어 개구리 한마리가 죽지 않을 것임도, 뚱뚱한 아저씨가 결코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임도 알 수 있다. 왜 일까.
디즈니랜드에 가본 적 있는가 . 아니 아무런 놀이공원이라도 좋다. 에디 머피가 <비버리 힐즈 캅3>에서 확연히 보여줬던 것처럼, 놀이공원은 표면과 이면이 명확히 구분된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영화의 요체와 근접한 가장 영화적인 곳이기도 하다. 디즈니는 자신들의 세상,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놀이공원처럼 만들고 있다. 그들의 영화는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마술 거울과 같다. 엔딩 타이틀과 함께하는 스티치의 미래는 행복해 보이지만 처절하다. 그가 진정한 가족, ‘오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며, 공부를 도우며 함께 즐긴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행복한 가족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헌신’임을 정확히 찌르는 날카로움이다.
솔직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라인은 별 흠잡을 것이 없다. 17년 묵힌 이야기가 덜컥인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다만 그들을 꼬집을 수 있는 것은 앞서 길게, 반복해서 투덜거린 ‘영악한 계산력’ 혹은 ‘정치적으로 다름’이며 여전히 실험중인 3D 부분의 어색함이다.(종반에 이르는 우주선 전투씬은 내부적으로 실내와 외부, 외부적으로 이전의 우주 전투씬과 확연히 구분되어 극의 집중도를 다소나마 떨어뜨리는데 성공한다)
이순간, 버터처럼 들려오는 엘비스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렇게도 음란했던 ‘Hound Dog’, ‘Suck on You’가 어린 아이의 애창곡이 되는 곳. 디즈니 영화상 최고의 악동인 스티치마저 순한 양이 되는 곳. 이것이 가족 영화의 산실, 디즈니가 꿈꾼 불균질한 세계이다. 당신이 디즈니의 눈에 비친 후에도 말괄량이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태복음 15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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