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퍼펙트 스톰] 평등한 문명의 영웅을 기다리며.

열혈연구 2000. 8. 5. 17:01

퍼펙트 스톰
-평등한 문명의 영웅을 기다리며..


@평등을 소원함.
세상에 공평한 것이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까.

보다 나은 것으로만 이루어진
거의 모든 볼거리들은 많은 이들에게
좋으면 '현실도피', 나쁘면 '자괴감'을 선물한다.

물론 받고 싶지 않다면 놔둬도 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의 기본권에
어련히 평등이 있을 지라도
잠자는 방법이 다르듯 어쩔 수 없는 다른 삶이란.

소득세와 증여세에 상속세를 더해도
격차는 도무지 줄지를 않고 있으니.

보아라.
또 눈앞에 가득한 폭풍의 실체를


매사추세츠주 한 어촌 글로스터.
안드레아 게일호의 선원들은
부족한 어획고로 시무룩하다.

이틀 뒤.
재출항을 결정한
선장 빌리 타인(조지 클루니)은 선원을 불러모으고,
각자의 사연을 접은 채 한탕을 노리며 출항에 나선다.

바비(마크 윌버그)의 임금이
빌리의 절반도 안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선주의 몫에 연료비와 음식값,
그리고 신참비로 1/4을 깎아 냈으니.

그건.
가족의 있고 없음, 애인의 유무처럼 당연한 것이다.
세월이 늘이고 줄이는 건 간격일 뿐.


@영웅을 기다림.
만선의 꿈은 요원한 채
바다를 헤매는 안드레아 호.

바다에 그물을 내리는 느슨한 일상 중
머피(존 C, 라일리)의 손에 바늘이 꿰었다.
부표는 수면에 놓아두고 멀어지는 그물과 함께
바다 속으로. 속으로..

토인비에 따르면
문명은 좋은 환경에서 아닌
역경과 도전, 극복과 응전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할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소수세력은
역경에 응전하고 대중이 자신들을 모방케 함으로써
자신의 창조력을 지속시킨다.

헐리우드, 아니 자국의 거대 자본을 쏟아 부은 영화들에선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해
이윤을 창출시키는 매체 혹은 예술의 산물이다.-
'영웅시대'를 만들려 한다.

창조적 소수 세력의 지배적 소수세력으로 타락은
대중의 내부 프롤레타리아로의 변형을 이끌고,
변두리 세력,
즉 외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문명은 위협에 처한다.

이러한 시기.
지배적 소수세력은
-미국은-
자신에게만 봉사하는 철학이나 이념을 내세우면서
-스크린 쿼터 논쟁을 보라-
'보편 국가'
-'미합중국'이라는-
를 세우려고 애쓰게 된다.

여기에 반해.
내부 프롤레타리아는 무력에 호소해
-십 수 년 전 직배에 반대한 뱀 사건을 기억하시는지-
'영웅 시대'를 조성하려 든다.
-<쉬리>의 열풍을 힘써 전하던 그때 신문과 방송들처럼.

하지만.
문명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예언하며 무너지고 만다.

머피를 끌어올려 살려 놓고,
서로 기껏 뻣뻣하게 '터프가이'하며
씨익 웃는 그들의 영웅은
문명에 근접하지조차 못하는 소비적 영웅일 지라도
세상을 받치는 힘이 된다.


@생명은 생명으로.
<특전 U보트>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퍼펙트 스톰>에서
생존을 향한 자아와 붕괴의 군상을 기대했다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볼프강 페터슨은 이제 이순을 앞둔 탓인지
자본과 결합해
영웅주의 생산자로 옷을 갈아입은 지 오래다.

깊은 주름,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아내던
이스트우드는 이해할 만했더라도,
전용기 안의 활극 주인공으로 대통령,
포드를 내세운 건 아무래도 찝찝했나보다.

해상구조대원들이
한몫보러 온 빌리 일행에 접근할 수 없었던 건
정신적 평등을 인정치 못했음으로 인함이다.

부르주아의 옷을 입고,
요트를 몰던 세 사람은
불어닥친 폭풍에 생존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 있을 만한
결단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대원의 생명을 건 구조 행위와
급유기에 삽입하지 못한 거세된 추락 헬기는
생명으로 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극중 유일한 윤리책이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파고든 해역에서 맞이한
만선의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
'폭풍 속으로' 역주를 택해야 했던
이들의 생명을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예정된 수장(水葬)이었지만,
한없이 낭만적인 소멸은
고장난 냉동고 속의 황새치처럼
썩어버릴 감상조차 전할 수 없다.

TV 뉴스의 문장 한토막으로 밖에.


@규모의 침몰.
<퍼펙트 스톰>이 가지고 온 사상 최대의 폭풍은
영화의 주연이면서 주인공들을 죽이는
살연(殺演)을 펼친다.

영화의 전반을 온통 채우는
떠나갈 이들의 전주곡은
느슨해 감상을 부르기엔 채 모자라고,
<타이타닉>에서 기껏 극에 오른 제임스 호너의 음악은
스스로 감상에 겨워 뻔뻔하게도 극을 조절하려 든다.

태풍의 규모를 이야기하려
친절히 배치한 기상청 사람의 태연한 손놀림 역시
거대한 파도의 위협아래 있는 배들과 맞물려
설명이상의 아무런 상충작용도 끌어들이지 못한다.

'기상예보 모니터를 보는 기상청 직원
-> 폭풍 속의 배와 사람
-> 걱정하며 TV를 보는 가족'식의 편집은
'야구 중계에서 긴장한 투수
-> 홈런 타자의 타격
-> 환호하는 관중'처럼 안일하기 그지없다.

결국.
폭풍을 기다리며 보낸 전반부의 지루함이
정작 깔아 놓은 멍석에 이르러선
무책임한 교차편집으로 힘을 잃고,
기승전결 순서만 맞춘 채
자신의 거대한 규모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레퀴엠은
충분히 화려할 수도 애잔할 수도 있었으련만.

바다 속 안드레아 호의 그늘 안으로 들어간 선장이나,
바다 위에 애인의 모습을 그리며
텔레파시를 보내는 바비나,
이도 저도 아닌 채 수장된 모두에게
혹 미안 친 않으신 지.

다른 이 아닌 페터슨 감독이라면
그러지 않으실 수 있었을 텐데..

여름의 더위만을 위한 '폭풍'의 기술은 '완벽'했더라도,
정작 인류의 죽음은 보잘 것 없어 한없이 부족하구나..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으로 지으셨도다 (시편 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