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전쟁 영화인줄 알았다. 전쟁을 기념하는 그날, 학교와 학원 순례를 마친 큰 아들 시찬을 데리고 비오는 거리를 달려 극장에 일찍 도착했다. 덕분에 팝콘과 음료수도 챙기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뉴스릴들을 엮어 만든 오프닝만 해도, '전쟁 영화 냄새를 풍기려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하는구나'고 생각했다. 이 예상이 깨지는 데는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는 많은 재난영화들처럼 평온한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깨우는 부부의 잠, 팬케잌을 굽는 자상한 아빠 그리고 등교길. 교통체증은 난폭운전으로 그리고 갑작스레 좀비 영화로 변신한다. 그 변신의 속도는 좀비에게 물린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12초 여기에 사람 보다 빨리 달리는 좀비의 속도감이 더해져 심장 박동수를 높인다.
우리의 주인공 제리는 유엔의 조사관. 현역에서 물러나 쉬려고 하던 찰나, 세상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 인간들과 싸우는 '전쟁'의 해법을 찾으러 다시 조사를 떠난다. 이 영화는 세가지 점에서 기존 좀비 또는 재난 영화의 모양새를 벗어난다.
하나는 구원자로 등장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더 이상 없다.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서 존재감을 확연이 드러낸 괴짜 학자, 말콤의 모습은 이제 식상하나 보다. 융 아저씨가 '원형 prototype'라고 까지 치켜 세워준 늙은 현자나 조력자 역시 요다나 덤블도어 보다 멋진 모습을 기대하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 하버드의 젊은 천재 박사 파스바크는 '좀비를 만드는 바이러스의 강점이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는 탁월한 혜안을 제시한다. 거기에 씨~익 하고 웃는 입자락엔 자신감마저 충만하다. 그리고 그는 첫 조사지인 평택 미군 기지 비행장에서 허망하게 죽는다. 실수로 넘어져 자신의 총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그의 죽음 덕분에 제리는 특이한 모험을 한다. 그에겐 더 이상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다.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이도 없다. 이건 '스타' 면서 대부분 제작자를 겸한 배우들이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디아나 죤스>의 냄새가 난다. 모르는 곳에서 이상한 사람들과 싸우고 쫓겨가며 비밀을 하나씩 파헤치는... 그런데 뭔가 다르다.
둘째, 주인공의 해외 투어에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자신이 공공의 적이라고 정한 상대를 찾아 세계여행을 하며 싸우는 건 <007>이 전문이다. 이후 등장한 많은 스파이물들은 큰 이유 없이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주인공의 항공사 마일리지 쌓기는 팔할이 국제공동 제작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돈을 가져다 썼는데, 그들을 즐겁게 해줄 뭔가를 주려는 거다. 구리두오 우유를 마신 의사가 아이언맨의 심장을 고쳐주는 것도 다 DMG의 투자비 때문이지 않는가.
제리 역시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돈다. 필라델피아에서 미항모를 지나 구분할 수 없는 밤에 도착한 평택 (<지아이조2>에서도 북한이 나온다. 지적 받는데 지친 똑똑한 미국인들은 이제 디테일에 신경쓸 필요 없는 밤에만 한국을 방문한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웨일즈의 카디프까지 거의 지구 한바퀴를 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뉴스릴에서 등장한 국가까지 합치면 엄청난 오지랖이다. 다행히도 제리는 그가 머문 모든 곳에서 하나씩의 열쇠를 찾아낸다. 이로 인해 재난물도, 좀비물도 아닌 수수께끼 지도를 가지고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모험물의 억센 냄새가 물씬 풍긴다.
좀비를 만드는 것이 바이러스인지 박테리아인지 알 게 뭐람. 적어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흐느적거리던 그들이 달리기 시작한 <28> 시리즈에서 보다 더 빨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소 저속촬영이 덧붙여진 좀비의 속도감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이는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마지막 특이점, 바로 롱쇼트의 활용으로 드러난다. 기존 공포영화들은 B급 영화의 근본, 즉 저예산 제작방식에 충실해 왔다. 공포의 현장이 한적한 숲 속의 낡은 오두막이나, 폐허가 된 저택이나 성, 아니면 자신의 집인 까닭은 카메라를 들고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돈다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좀비 영화들은 떼샷, 즉 많은 좀비들이 등장하는 군중쇼트가 필수적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과거 스멀스멀에서 이제 휘리릭으로 바뀌었지만, 밀려오는 공포의 양은 비슷하다. 천천히 티비에서 기어나오는 사다코가 무서운가 아님 갑작스레 튀어나온 프레디의 긴 손톱이 무서운가?
<월드워 Z>에서는 하이앵글로 찍은 익스트림 롱쇼트 (ELS, 편하게 말하자면 위에서 멀리찍은)를 통해 좀비들의 속도감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스라엘 또는 팔레스타인이었을 좀비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에 산처럼 싸여 있던 유대인들의 신발처럼 몸을 포개 예루살렘 성벽을 뛰어 넘는다. 카메라는 아주 멀리 있지만 하나 둘, 열이나 백이 아닌 수천 또는 수만명의 좀비들을 담아내는 이 영화의 스케일은 아이맥스를 소망케 한다. 비슷한 속도감의 근접쇼트들과 빈번히 교차하는 ELS를 통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멀어지면 느려져야 하는 움직임의 오류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다, 초인들처럼 빨라진 좀비들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요즘은 사랑도 많이 하는 좀비들이니...
결말이 시시하다고 불평할 필요없다. <월드워 Z>는 깜짝 놀래켜 속편을 기대하게 하는 좀비, 공포 영화라기 보다, <Outbreak> (1995), <12 Monkeys> (1995), <I Am Legend> (2007), <Contagion> (2011) 등의 뒤를 잇는 질병을 소재로 한 재난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내내 질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려 뛰어 다녔던 거다. 가족이 살아 남은 것도, 속편이 아닌 암울한 미래를 향한 열린 결말도 이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뭐, 이것 저것 따지자면 <28> 시리즈와 가장 닮아 있긴 하지... 쩝.
추신 1. 초1년생 시찬에게 첫 좀비영화였다. 좀비 놀이를 하고 친구들과 놀았던 그에게 좀비는 이제 '무섭고 빠른' 존재로 자리 잡겠지...
추신 2.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 글을 쓴 게 얼마만인가! 방학을 맞은 한가함을 여기에 풀고 있구나!!!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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