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말란의 다섯번째 장편 영화 <빌리지>가 개봉했습니다. 막판의 반전은 이제 익히 알려진 샤말란 영화의 특징이죠. 이번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볼수록 아쉬움이 커집니다. 아무래도 샤말란식 반전의 절정은 <식스센스>가 아니었을까요. 개인적으로 샤말란 영화의 장점은 모두가 기다리는 반전의 결말보다 사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반부라고 생각합니다.
샤말란 감독은 아마도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가슴 속에 자리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영화는 마치 살풀이 굿같다. 그는 자신의 영화 한편 한편에 죽음, 유령, 사고, 외계인, 괴물들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빌리지>는 일종의 장르영화 같은 성격을 띤다. 여기서 '장르'는 샤말란 영화의 독특한 문체와 반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장르영화는 유사한 양식을 쏟아내는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관객 역시 장르의 약속을 바탕으로 영화를 관람한다. 장르영화는 감독과 관객 사이에 형성된 암묵간의 약속을 통해 관람의 편이와 함께, 보다 넓은 사유를 허락한다. 이미 알고 있는 플롯의 진행, 이미지의 표현, 인물의 특성 등은 관객에게 단순한 시각적 경험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관객은 관람시, 장르의 법칙에 해당 영화의 요소들을 대입함으로써 호불호의 결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유의 가지 뻗기가 가능하다.
일각에서 그의 영화를 '공포영화'로 분류하는 것처럼, 샤말란은 공포의 분위기를 아는 감독이다. 적절한 효과 음향의 사용,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배경, 모호한 분위기의 인물들은 공포 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 샤말란의 영화에서 본체를 파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굼실 굼실 싹트는 전반부는 결말로 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지옥문과 같다.
영화는 누군가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모습이 왠지 이상하다. 사람들은 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버지를 철장 너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서양 장례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사님, 꽃, 묘지를 둘러싼 애도의 분위기, 그 어느 것도 없다. 단지 누군가가 죽었다는 암울함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신은 식사 시간이다. 기다랗게 늘어놓은 탁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 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순간 얼어 붙는 사람들.
그 다음은 일상이다. 두 처녀가 빗자루로 문 앞을 쓸고 있다. 장난을 치며 빗질을 하는 그녀들이 깜짝 놀란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에 피어있는 붉은 사루비아를 뽑아 얼른 땅에 묻는다.
샤말란은 5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으라는 할리우드 공식을 특이한 방식으로 풀어간다. 이 곳에는 놀랄만한 공포도, 엄청난 스펙타클도, 대단한 동기도 없다. 다만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샤말란 영화의 장점은 바로 이 분위기에 있다. 이것을 위해 활용하는 몇 가지 요소들은 충분히 효과적이다. 채도를 낮춰놓은 차가운 색감, 사물을 비추는 반사체들, 기하학적 형상의 배경 등은 작가의 문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샤말란 식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 소통장애를 가진 인물, 그를 믿어주는 또 한사람의 존재, 이상한 사건들의 연속, 공포 영화식의 효과음들 역시 공포의 옷을 입히는 요소이다.
그런데, 정작 약점은 그의 장기로 알려진 결말의 반전에 있다. 우리는 흔히 반전을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전환 정도로 생각한다. 추리나 미스터리물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는 반전은, 생각하지 못한 사건의 전개 혹은 전환으로 관객을 흥분케하는 요소이다.
허나 반전의 본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반전의 원 단어는 'anticlimax'이다. 말 그대로 절정의 반대라는 뜻이다. 프랭크 E. 비버의 '영화미학용어사전'에 의하면, 반전은 "영화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최종적인 플롯의 메카니즘이 극적인 쾌감을 주기에는 지나치게 보잘 것 없고 설득력이 없거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좀 더 중요하고 심각한 순간을 기대하는 관객의 바람을 거절하는 것이 반전이다.
샤말란 영화의 결말은 원래 의미로서 반전에 가깝다. 이 말은 샤말란의 반전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이미 관객들이 놀랄만한 반전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런 식의 기대는 오히려 반전의 효과를 감소하는 역할을 한다. 당연한 결과이다. 반전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현을 예상하고 있는 관객에게 반전은 더이상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샤말란 감독이 시작한 반전 게임은 이제 주도권을 관객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열쇠는 그에게 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은 규칙의 유사한 게임을 진행할지의 여부는 말이다.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이사야 13 : 10)
샤말란 감독은 아마도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가슴 속에 자리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영화는 마치 살풀이 굿같다. 그는 자신의 영화 한편 한편에 죽음, 유령, 사고, 외계인, 괴물들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빌리지>는 일종의 장르영화 같은 성격을 띤다. 여기서 '장르'는 샤말란 영화의 독특한 문체와 반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장르영화는 유사한 양식을 쏟아내는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관객 역시 장르의 약속을 바탕으로 영화를 관람한다. 장르영화는 감독과 관객 사이에 형성된 암묵간의 약속을 통해 관람의 편이와 함께, 보다 넓은 사유를 허락한다. 이미 알고 있는 플롯의 진행, 이미지의 표현, 인물의 특성 등은 관객에게 단순한 시각적 경험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관객은 관람시, 장르의 법칙에 해당 영화의 요소들을 대입함으로써 호불호의 결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유의 가지 뻗기가 가능하다.
일각에서 그의 영화를 '공포영화'로 분류하는 것처럼, 샤말란은 공포의 분위기를 아는 감독이다. 적절한 효과 음향의 사용,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배경, 모호한 분위기의 인물들은 공포 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 샤말란의 영화에서 본체를 파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굼실 굼실 싹트는 전반부는 결말로 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지옥문과 같다.
영화는 누군가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모습이 왠지 이상하다. 사람들은 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버지를 철장 너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서양 장례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사님, 꽃, 묘지를 둘러싼 애도의 분위기, 그 어느 것도 없다. 단지 누군가가 죽었다는 암울함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신은 식사 시간이다. 기다랗게 늘어놓은 탁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 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순간 얼어 붙는 사람들.
그 다음은 일상이다. 두 처녀가 빗자루로 문 앞을 쓸고 있다. 장난을 치며 빗질을 하는 그녀들이 깜짝 놀란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에 피어있는 붉은 사루비아를 뽑아 얼른 땅에 묻는다.
샤말란은 5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으라는 할리우드 공식을 특이한 방식으로 풀어간다. 이 곳에는 놀랄만한 공포도, 엄청난 스펙타클도, 대단한 동기도 없다. 다만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샤말란 영화의 장점은 바로 이 분위기에 있다. 이것을 위해 활용하는 몇 가지 요소들은 충분히 효과적이다. 채도를 낮춰놓은 차가운 색감, 사물을 비추는 반사체들, 기하학적 형상의 배경 등은 작가의 문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샤말란 식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 소통장애를 가진 인물, 그를 믿어주는 또 한사람의 존재, 이상한 사건들의 연속, 공포 영화식의 효과음들 역시 공포의 옷을 입히는 요소이다.
그런데, 정작 약점은 그의 장기로 알려진 결말의 반전에 있다. 우리는 흔히 반전을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전환 정도로 생각한다. 추리나 미스터리물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는 반전은, 생각하지 못한 사건의 전개 혹은 전환으로 관객을 흥분케하는 요소이다.
허나 반전의 본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반전의 원 단어는 'anticlimax'이다. 말 그대로 절정의 반대라는 뜻이다. 프랭크 E. 비버의 '영화미학용어사전'에 의하면, 반전은 "영화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최종적인 플롯의 메카니즘이 극적인 쾌감을 주기에는 지나치게 보잘 것 없고 설득력이 없거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좀 더 중요하고 심각한 순간을 기대하는 관객의 바람을 거절하는 것이 반전이다.
샤말란 영화의 결말은 원래 의미로서 반전에 가깝다. 이 말은 샤말란의 반전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이미 관객들이 놀랄만한 반전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런 식의 기대는 오히려 반전의 효과를 감소하는 역할을 한다. 당연한 결과이다. 반전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현을 예상하고 있는 관객에게 반전은 더이상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샤말란 감독이 시작한 반전 게임은 이제 주도권을 관객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열쇠는 그에게 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은 규칙의 유사한 게임을 진행할지의 여부는 말이다.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이사야 13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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