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108min
MIchel Gondry
avec Jim Carrey, Kate Winslet, Kirsten Dunst..
이 글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영화평이 혼재되어 있는 수필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단정을 지어 써야하는 글쓰기의 성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에 대한 고민을 옮겨본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파리의 가을밤은 시원한 비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깊은 생각을 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어제 오늘 7장 짜리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알아가는 것, 안다고 생각하는 것, 알려주는 것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 착각 그리고 ‘일반화의 오류’는 얼마나 클까하는 것이다(지금
이곳에서도 필자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이 핵심에 가깝다고 자신한다. 다른 이들은
핵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내심 가지고 있다. 방송과 신문이 대중에게 기사를 전하는 것이나, 영화를 보고나서 글을 쓰는 이 작업도
모두 그런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쓰는 글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거나,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느냔
말이다.
글쓰기의 정석이나 유창한 화법에서 말하기를 ‘~같다’, ‘~듯 싶다’, ‘~듯 하다’ 등의 표현을 지양하라 한다. 확신
있는 표현만이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원리이다. 그런데, 어쩌면 ‘~같다’식의 어정쩡한 표현이 보다 정확한 화법인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는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난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 작업이 또 다른 오해를 만들진 않을까? 마치
진실을 밝혀내는 것처럼 써내려간 글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생산해낼까? 하는 식의 생각이었다. 그리고서 필자가 내린 영화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동시대 SF적 설정을 기본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대를 설명없이 복잡하게 오간다. 수많은 신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한다면 보다
나은 관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든다. 정말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맞아 떨어지는 것일까? 난 정신분석학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한 것인가? 하는 식이다.
그러나 글을 써가기 위해 필자는 마치 정확히 알고,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 같은 단정을 과감히 감행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전혀
다른 성향의 남녀이다. 둘이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진 것도 둘의 극과 극에 있는 성격 때문이다. 조엘은 어느날 사랑하던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을 발견한다. 혼란에 빠져 있던 그는 그녀가 기억을 지우는 병원에서 자신에 해당하는 부분을 삭제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조엘
역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우연히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만나는 2004년 현재, 둘이 사랑하고 있던 과거,
그리고 조엘의 어린 시절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간들의 조각은 크게 세가지 규칙에 의해 존재한다. 먼저 2004년의 현재가
영화의 앞 뒤를 차지하고 그 안에 둘의 과거와 조엘의 어린 시절이 자리하는 식의 큰 틀이 주어져 있다. 둘째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헤어짐에서
만남에 이르는 역 시간 순의 진행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기억의 내용들이 기억의 삭제와 더불어 두 사람의 의지에 의해 초현실적인 성향을
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들을 인정하더라도, 영화는 한가지 이상한 논리적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정신분석학을
적용하면, 오류가 제법 괜찮은 방식으로 해결된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는 조엘의 기억 삭제의 과정에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이 어떻게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조엘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기억이 삭제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기억이나 꿈 속에 현실의 인물이 들어가는 식의 SF가 아니라, 단순히 한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SF이기
때문이다. 즉 조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클레멘타인은 실제 그녀가 아니라 조엘이 인식하고 있던 클레멘타인인 셈이다. 한발 물러나 그녀의 의지가
조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치더라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클레멘타인은 이미 조엘의 기억을 지운 상태라는 것이다. 조엘에 대한 기억이 없는
클레멘타인이 어떻게 둘의 소중한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조엘의 기억 속에서 말이다.
이는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바람을 담은 투영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조엘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아니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 것의 실체로서 그녀를
사랑했었다. 즉 조엘의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조엘 자신이 자아(ego)라면 그녀는
이드(id)에 가깝다. 그의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 있는 적극적인 인격체로서 그를 대변하고 또
동행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진실을 알게된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해 커다란 실망을 경험한다. 이전과 같았다면 둘은 이 시점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둘 중 조엘은 달라져 있다. 그는 결코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의 삭제 과정에서 잠재의식에 대한 치료를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조엘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의 행동을 통해 감정의 표출과 적극성을 획득해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집에 찾아 왔다가 돌아서
떠나가던 클레멘타인을 불러 세울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맥락을 고려해 자세히 설명하진 못했지만, 이 영화는 마치 최면치료를
영상으로 옮겨놓은 것같기도 하다. 최면 상태에서 기억 깊은 곳의 상처를 찾아가 해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식의 적용은 조엘의 거의 모든
기억 장면에서 가능하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둘이 기억의 삭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숨어든 조엘의 과거 장면이다. 어린
조엘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앞에는 죽은 비둘기가 놓여 있고, 그의 손에는 망치가 들여 있다. 친구들은 그것을 내려치라고 다그친다.
조엘은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못내 비둘기의 몸을 망치로 부순다. 그 때, 클레멘타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준다. 그녀는 친구들의 폭력적인 요구와 눈
앞에 부셔진 끔찍한 살덩이, 그것을 실천한 잔인한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끌어 간다. 그리고 이 신에 맞붙어 있는
것은 어린 둘이 베게로 숨통을 막아 죽이는 놀이는 하는 집 앞 신이다. 이것은 저주스러운 자신의 약함을 죽이는 것에 살풀이와
다름없다.
이 같은 정신분석학의 적용은 제법 그럴싸한 해석으로 보인다. 기억의 삭제 문제와 두 사람의 만남과 재회를 다루는 적절한
방법인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생각이다. 감독인 미셸 공드리의 의도도, 주인공을 맡은 짐 캐리나 케이트 윈슬렛의 생각도 아닌,
늦은 밤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한 남자의 생각인 것이다. 그는 단지 이 글이 진실에 조금더 근접하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서
써내려 갔을 뿐이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는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아가 5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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