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파리에서 첫번째 소식-히치콕전

열혈연구 2001. 10. 13. 10:31
@머리
파리에서 첫 소식을 전합니다. 이미 서울도 찬바람이 찾아왔겠지만, 이곳은 보다 먼저 다가온 듯합니다. 곳곳을 지나다니는 벽안의 사람들은 두터운 코트깃을 올리고 있답니다. 비가 온 날은 더욱 특이했답니다. 자주 내리기도 해서겠지만, 1/5 정도의 사람들은 비를 그냥 맞고 다니는 겁니다. 상당히 많이 내릴 때까지 그러고 다니더군요.

@몸통
지난 월요일에는 퐁피두 센터를 찾아갔습니다. '히치콕과 예술'(Hitchicock et l'art)전을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렇게 적으니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찾아간 듯하지만, 그곳에 있는 현대미술관 역시 이미 제 관심을 당기고 있었답니다. 퐁피두 센터는 파리 여행가이드에서 한번쯤 보셨을 만한 장소입니다. 짓다 만 건물같이 생긴 이 센터는 그대로 드러난 철골구조와 밖으로 나온 일련의 에스컬레이터가 인상적이랍니다. 건물 높은 곳에서는 앞에 펼쳐진 광장과 건물들 너머로 웬만한 파리시내가 모두 보인답니다.

1층에서는 가방 검사를 하고 있었답니다. 뉴욕테러의 영향으로 시내 거의 모든 휴지통은 비닐로 교체가 되었고, 주요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가방을 열어보는 형식적인 '테러범 색출'을 계속하고 있더군요. 만원을 조금 넘는-그것도 학생할인을 받아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하루 이용권를 손에 쥐었습니다. 이제 뚱뚱한 히치콕 아저씨를 만나러 갈 일만 남았죠.

전시회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고, 숙제를 하러 온 듯한 중학생들이 필기구를 들고 까르르 거리며 돌아다녔던 탓이죠. 입구를 바로 지나 검은 문을 열어 전시회장으로 걸음을 들이댔습니다. 철저한 어두움. 그것이 첫 느낌이었답니다.

규칙적으로 놓여 있는 붉은 진열대는 각자 흐릿한 조명을 받으며 전체가 검게 장식된 방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영화에서 썼던 소품이었지요. <사이코>에서 해골 모형, <새>에서 쓰인 깨진 안경, <현기증>에서 목걸이 등이 보석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영화들이 올라선 자리만큼 빛나면서 말이죠.

어두운 첫번째 방을 비집고 나오면 히치콕이 등장한 장면들의 스틸컷과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들에 꼭 한장면은 출연하는 걸로 유명하지요. 때로는 기차에서 아이들과 다투는 아저씨로, 신문 속의 다이어트 광고 인물로, 지나가는 행인이나, 창문 뒤의 실루엣으로도 출연해 그를 찾는 재미를 더해주었답니다. 첫번째 방의 무게를 한꺼번에 덜어낸 듯한 두번째 방을 지나니 본격적인 히치콕의 예술에 대한 전시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Homage'라는 방이었습니다. '존경을 표함' 정도 되는 단어의 뜻처럼 히치콕의 영화가 영화사 초기 거장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말 등의 영화가 비슷한 히치콕 영화의 장면들과 비교하며 비디오가 상영되는 곳이었습니다. 실은 굳이 때려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큐레이터들의 노력은 가상했습니다. 정작 그들의 능력이 돋보이는 것은 다음부터였지요.

이어지는 방들은 '관음증', '여인' 등 여러 개의 소주제들로 꾸며있었습니다. 이곳들은 일가를 이룬 히치콕 영화에서 습관처럼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문학이나 그림에 연관시켜 놓은 것이었습니다. 말라르메, 랭보, 모로 같은 상징주의 문학가 화가들의 작품과 달리, 비어즐리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을 히치콕의 작품과 연결시켜 놓았답니다.

정작 부러운 것은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이 거의 진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전 모 신문사에서 주최했던 '고구려 전'이 생각났습니다. 사진과 모형으로만 꾸며졌던 대규모 전시회가 말입니다. 자신들의 미술관에서 직접 가져온 맞춤 작품들은 부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씬별과 내용별로 비슷하게 골라 놓은 큐레이터들의 노력도 가상했지만,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큐레이터들이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김기영과 예술'전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꼬리
이어서 뛰듯이 찾아본 '쟝 비뷔페'전과 현대미술관은 부러움을 더하는 씁쓸한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현란한 현대미술을 훑고 오니 우리의 담백한 수묵화와 화려한 단청무늬가 그립더군요. 멀리 와도 천상 한국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