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기사 윌리엄] 가벼운 껍질 안 들여다보기 2

열혈연구 2001. 9. 21. 12:23
아픔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거리감과 매개가 주는 비현실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합리화를 해도 가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조금씩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주에는 전전주에 이어 <기사 윌리엄>의 못다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하지만 극장이 멀어보이는 요즘입니다. 그냥 동네 비디오가게에 달려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를 빌리고, 그것을 빈 라덴과 부시에게 틀어 보여주고 싶군요. 그냥 그렇습니다.

@ 네번째 이야기 : 하늘에 멈춰선 해
조슬린과 윌리엄이 첫 교감을 나누는 곳은 연회장. 윌리엄은 애드헤머의 부추김으로 있지도 않는 갤더랜드의 어색한 춤을 추어보인다. 그때 끼어 드는 조슬린의 도움으로 인해 낯선 이들의 연회장에서 고립되었던 부적격자로서 윌리엄은 연회의 중심이 된다. 데이빗 보위의 고고가 배경음으로 흐르면 사람들의 군무는 생기를 얻는다.

이때 둘이 나누는 대화는 어떠한가. 윌리엄은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면서 ‘여호수아가 해를 멈춘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스라엘과 아모리의 전쟁에서 여호수아는 전쟁 중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도주할 것을 염려하여 해와 달이 그대로 떠있게 해달라 기도한다. 실제로 해는 거의 종일토록 중천에 머물러 있었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윌리엄의 인용은 피 묻은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상황을 대입해 달을 멈추어 아름다운 시간을 지속하는 식이다. 이는 <기사 윌리엄> 전반에 담긴 중세라는 배경과 현대의 음악이 어우러지고 기사와 왕족의 모티브와 뉘앙스를 깔아 스포츠 중계에 이르는 대입법과도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은 가끔 보이는 실내씬의 오밀조밀함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파리의 성당씬과 더불어 이곳 무도회씬은 이야기할만한데 윌리엄이 춤을 시작해 조슬린이 끼어든 다음부터 조금만 더 살펴보자.

둘이 몇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듯 기본적인 시연이 끝나면, 둘러싼 군중들의 춤이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는 롱숏으로 한걸음 물러나 군중의 동작을, 그 통일성의 아름다움을 잡는다. 주목할만한 것은 둘러싸고 있는 테이블의 배치다.

삼면을 둘러싼 테이블 그리고 중앙에 자리한 무대는 가장 보기 쉬운 장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실제로 현장에 가서는 절대로 그렇게 볼 수 없는 –TV 중계 스포츠 경기장과 비슷하게 펼쳐 있다. 이 씬에서 카메라는 일반적인 설정숏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듯한 부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음악과 춤이 시작하면서 눈높이로 내려온다. 관객이 TV의 중계를 관람하듯이 상황과 현상에 익숙해지는 잠깐이 지나면 카메라는 윌리엄과 조슬린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군무에 어울리는 동작을 취해갈 때 흐르는 노래는 현악4중주가 아니라 데이빗 보위의 “Golden Years”다

<기사 윌리엄>은 존 윌리엄스 류의-최근 의 음악을 맡았던 사람- 스케일 정도에나 어울릴 시대에 음악을 비트와 하모니로 바꾸어 놓았다. 퀸에서 데이빗 보위, 에릭 크랩튼과 AC/DC 등의 노래들이 마창대회, 무도회, 런던의 복귀 등의 장면에서 쓰일 때 이 음악들은 내재적 사운드임과 동시에 절대로 불가능한 외재적 사운드이다.

실현과 접합이 불가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유머를 선사하는 이들 음악은 자신의 등장처럼 환타지적 화합을 연출한다. 평민 관중에서 영주까지 환호하고 의심으로 낯선 귀족들도 팔짱을 끼게 하는 식이다. 같은 방식으로 영화는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갈등 역시 깔끔하게 해결되면서 맺혔던 모든 고리를 풀어낸다. 권투경기를 두근거리며 기다리게 했던 시그널 음악처럼 <기사 윌리엄>의 음악들은 맺힌 것을 풀며 화합을 이루는 마술을 부린다.


@ 다섯번째 이야기 : 부르짖으라
윌리엄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애드헤머와 결승전을 갖는다. 경기 전날, 그는 빗속을 가로질러 자신이 어린시절 놀았던 골목을 찾아간다. 그리고 12년 전 헤어진 아버지와 조우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선 이가 아들임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한다. 잠시 후 헤어지며 했던 말 “발길 닿는 대로 집 오는 길을 찾았소?”라고 물음과 동시에 호명(呼名:interpellation)의 수순을 밟는다.

호명은 이데올로기가 객체로서 인간에서 주체로서 정체성을 허락하는 작업이다. 울리히경이라는 거짓 신분으로 살고 있던 윌리엄이 자신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혼란은 아버지의 호명에 의해 자리를 찾게 된다. 아버지의 질문을 통해 호명되어진 윌리엄은 자신의 마음에 드리워 있던 무게-조슬린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윌리엄임을 밝힐 것이냐 말 것이냐?-의 추를 돌려 놓는다.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지붕수리를 하러 올라가는 윌리엄과 이를 보고 고발하는 애드헤머의 행동은 아버지의 호명에 의한 파생효과인 것이다. 당연히 다음날 윌리엄은 자격박탈과 체포의 위협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이 다음은 명명(命名)과 증명(證明)의 차례를 거친다. 윌리엄은 도망치라는 조슬린과 일행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난 기사!”라 외치며 당당히 잡혀가리라 다짐한다. 이는 “신념만 있으면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던 아버지로부터 전해져 왔고, 하룻밤의 만남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윌리엄은 자신을 기사라고 명명함으로 인해 형틀에 매달릴 지 모를 위태로운 운명에 용기를 부여하고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각오하는 정의를 획득한다. 이름지음(명명)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거짓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기사의 직책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윽고 형틀에 목을 끼우고 죽음을 앞둔 윌리엄 앞에 구원자인 에드워드 왕자가 나타난다. 영화의 초반에 윌리엄과 ‘명예로운 대결’을 벌였던 그는 마창대회라는 체계하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철저히 타자(他者:OTHER)이다. 이름을 숨기고 대회에 출전한 그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이 차례로 기권했던 전례를 보듯이 질서내로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을 다시 적용하면 그는 사람들이 동일시하고 싶어하고 동시에 복종하는 일종의 지고한 인물, 절대적 주체(Absolute Subject)이다. 절대적 주체로서 그는 마창대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관계과 체계에 두번의 승부로 교감을 건네고 동일시-내러티브 내에서 윌리엄의 의지였다기 보다는 관객의 관람행위를 통해-된 윌리엄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왕자는 ‘윌리엄이 고대왕가의 혈통’이라는 말을 하면서 군중을 설득한다. 그리고 형틀을 벗고 윌리엄을 내려오도록 한다. 왕자는 무릎 꿇은 윌리엄의 어깨를 칼등으로 세번치며 호명한다. 거짓기사가 ‘윌리엄 경’이 되는 순간이다. 군중은 당연히 왕의 권위에 동의하고 비난의 전행을 뒤집어 환호로써 윌리엄의 기사됨을 증명한다. ‘나만의 이름’이었던 ‘윌리엄’은 명명과 호명을 통해 ‘윌리엄경’으로 정체성의 확인과 신분상승의 완성을 이룬다.

영화는 의식적인 신분상승과 갈등해소를 시대분열적인 도구로써 해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 100년이 넘은 영화의 역사 속에서 관객은 표현기법의 변화와 다른 식으로 나름대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되돌아 보기에 우리는 너무 나긋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브라이언 헤져란드의 <기사 윌리엄>이 풍자 없는 낭만극임에도 충분히 환호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세르반테스의 날카로움을 찾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의 흔적을 찾고싶은 맘은 어쩔 수 없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누가복음 11: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