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파이널 판타지] 눈으로 보기, 마음으로 읽기

열혈연구 2001. 7. 30. 03:53
요즘은 인기가 덜하지만 3년 전, 그러니까 스타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전만해도 ‘파판’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기억하기론 게임의 개발자가 직접 메가폰을 쥔 최초의 영화인 <파이널 판타지>는 게임과 다른 새로운 길을 선보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 있어서 전번에 살펴본 <툼 레이더>식의 평가는 나오지 않으리라 기대됩니다. 다만 외면하고 싶지만 이것이 기술 앞에 주눅이 든 저의 촌스러움 탓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파이널 판타지(01.7.28)
-눈으로 보기, 마음으로 읽기


@ 옛 것과 새 것
책상 위 혹은 무릎 위에 놓인 컴퓨터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게임을 띄우고 있는 게임방의 모습은 한편으로 특이한 별세계다. 어느 여름날, 창 밖으로 내다본 아파트 단지의 밤 풍경. 일제히 같은 번쩍임을 응시하고 있는 창문들은 개인이기를 소망하지만 집단일 수 밖에 없는 우리였다.

절벽을 거슬러 카메라가 올라가면 넓은 황야가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황량한 거대함의 틈새를 극접사(extreme close up)의 눈이 교차되어 끼어들고, 추락한 렌즈는 딱딱한 땅을 투명한 매개로 삼아 앙각(low angle shot)으로 한 여인을 올려다 본다.

아키(밍나 웬)는 몇 달째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어느 행성에 그녀가 서있고 외계인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꿈. 그 꿈에 대한 해석이 자신과 지구의 운명을 좌우할 열쇠라 생각하는 그녀는 6번째 생명을 찾으러 폐허가 된 ‘Old New York City’에 들어선다. 이 의미심장한 명칭은 영화의 이름이 품는 대립된 개념의 충돌과 어울린다.

영국의 왕가이자 지명에서 ‘새로움’을 달아 ‘아메리칸 드림’의 교두보가 되었던 거대 상업도시는 영화의 내러티브 상에선 이미 ‘옛’것이 되어있는 상태다. 암흑은 그곳을 찾아온 무엇의 빛으로 겨우 한구석만 양보할 뿐, 사라진 생명과 남겨진 사물의 무질서만을 품고 있다. 더 이상 옛 것은 복고를 소망하는 동경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인식이나 가치의 범주를 벗어난 ‘환상’ 역시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을 선고 받고 있는 명명과 비슷하다.

과거는 현재의 기반이 되고, 현재는 또 다른 미래의 기틀이 된다. 둘은 통시적으로 볼 때 인위적으로 구분일 뿐이다. 현재를 이루는 파편들은 과거에 대한 ‘파괴’를 통함이 아니라 재구성될 미래를 위해 ‘해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외계인들의 과거가 끊임없이 생명을 흡수하는 지구의 현재가 되었고, 아키와 시드박사가 꿈꾸는 이후는 미래의 기반이 될 것이다. 아키의 단절된 꿈들은 조금씩 정보량을 늘려가며 새로운 미래의 길을 예견케 한다. 그녀의 꿈을 통해 외계인의 과거와 지구의 현재 그리고 모두의 미래가 만나는 셈이다.


@인식의 문제
2065년, 지구는 보이지 않는 외계인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온 운석들은 지구를 덮어 빛을 차단했고, 남은 인류는 에너지망으로 보호된 배리어 시티에서 살고 있다. 시드 박사(도널드 서덜랜드)는 아키와 함께 외계인을 무찌를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지구 생명체론인 가이아 이론을 바탕으로 에너지체로 구성된 외계인에 대한 반대 파형을 만들어 이를 물리치려 한다. 해서 파형의 바탕이 되는 8가지 생명을 찾으려 하는데, 아키가 내려선 바로 그곳이 6번째 생명의 반응이 있는 곳이다.

아키가 그레이(알렉 볼드윈)의 팀에게 도움을 받은 바로 그곳에서 찾아내는 작은 식물은 생명에 대한 무한한 경의를 표함과 함께 다름 아닌 인식론을 다루는 첫 씨앗이다. 외계인을 격퇴할 방법을 찾는, 즉 진(眞)을 갈망하는 아키는 목숨을 걸고서 폐허의 한 가운데 피어있는 잡초를 채집한다.

그녀가 외계인 격퇴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의 유일한 힌트는 그녀의 몸 속에 품고 있는 외계인 바이러스다. 아키는 억류되어 있지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바이러스에 의해 꿈을 꾸게 된다. 바이러스는 아키와 외계인을 이어주는 안테나와 같은 것이다. 단지 이것은 목숨을 담보로 삼은 죽음에 이르는 소통체라는 점에서 훨씬 간절하다.

아키의 생명에 대한 인식은 원초적이고 포괄적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막연한 박애도 편협한 집착도 아니다. 그녀가 8가지 생명을 모으는 목숨 건 행동을 하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보장 받기 위해서인지, 지구를 살리려는 영웅심리 인지 조차 확연하지 않다. 아키는 두뇌에 해당하는 시드박사의 지령을 따라 행동하고, 외계인의 꿈을 통해 생각하며 서로를 연결시키는 행동체일 뿐인 걸까?

영화 이전의 시간인 바이러스를 가슴에 품은 때는 아키가 꿈을 꿈으로써 소통의 매개를 획득한 순간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인식에 의해 사물의 진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반복한다. 물론 그녀의 노력은 허투루 쓰이지 않고 침입의 기원과 외계인의 본질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광범위한 깨달음을 쟁취한다. 그녀는 실천적 인식론자였던 것이다.


@젊음을 즐길 여유
바이러스를 가슴에 품고 있는 아키는 ‘젊음을 즐길 여유’조차 없이 생명과 지구를 위해 뛰어 다니고 있다. 그레이 역시 외계인과 맛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인류인 ‘Deep Eyes’의 일원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아키가 떠나기 전만해도 연인이었음이 확연히 추정되는 그레이와 관계는 내러티브 구성에 그리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있지 않다. 둘은 티격태격 하기도 서로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할 뿐이다.

아키는 뉴욕시의 폐허에서 6번째 생명을 구했다. 목숨을 걸고 그녀를 살려낸 그레이는 귀환하는 도중 그녀와 다툰다. 그리고 아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레이의 생명을 구한다. 구원->대립->구원을 반복하는 둘의 관계는 이어지는 채집실 씬으로 발전한다. 부하들의 배려에 의해 채집실에 고립된 아키와 그레이는 옛 헤어졌던 오해로 시작한 대립에서 화해로 급속한 반전을 이룬다.

바로 이 씬, 확연한 화해와 화합의 순간을 다룬 이곳은 카메라 워크의 효과를 설명하는 새로운 교본과 같다. 함께 보자. 이때는 다름아닌 이들의 헤어짐이 서로를 위한 걱정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처음 마주보고 있는 아키와 그레이를 좌측에서 담은 웨이스트 투샷(waist and two shot)으로 시작한다. 어느 순간 말싸움이 끝나 가고,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림과 동시에 둘의 허리까지 잡고 있던 카메라는 아키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기 시작한다. 아키의 얼굴 정면이 카메라를 응시할 만큼 이동해 감과 동시에 그레이는 아키의 뒤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결국 카메라가 고정되면 아키의 등 뒤에서 그레이의 모습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굳이 대사가 없더라도 간단한 트래킹과 기껏 두세 발자국의 인물 이동을 통해 대립이 화해로 변하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흐뭇한 사례이다.


@ 그들의 정체
아키의 논리력을 통해 생명을 에너지로 삼아 흡수하는 외계인들은 생명체가 아님이 밝혀진다. 그들의 명칭이 ‘phantom’이었으니, 아키가 고심해서 알아 냈지만 짐작하지 못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가 남긴 범신론적 발언 ‘Tout est sensible (모든 것은 느낄 줄 안다)’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이다. 비록 살아 있지 않는 것 조차 반응하고 지각한다는 식으로 한없이 단순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파이널 판타지>가 담은 범신론은 심지어 메커닉 디자인에서도 엿보인다. 곤충과 비슷한 우주선, 누에 고치 같은 배리어 시티를 비롯해 갑각류와 같은 외계인의 갑옷을 비롯해 조개와 같은 외계인의 우주선까지 하나의 생명체로 꿈틀거리는 가이아 이론의 지구를 동시에 주창한다.

외계인들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행위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살인 과정임을 눈치챌 수 있다. 아키의 꿈을 통해 밝혀진 외계인들의 정체에 대한 시작은 생명을 빼앗는 전쟁에서부터다. 아키는 이름 모를 행성의 한 가운데 서 있고, 그녀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외계인의 전투는 어느 순간 고장난 시계처럼 멈춰 선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멀리서 몰아친 화염덩이가 보이고, 바로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차근히 정리해 보자. 지구를 멸망에 몰아넣은 외계인은 이미 생명을 잃은 유령들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행성에서는 육신을 지닌 생명체였다. 하지만 지구에서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영혼이나 뽑아가는 ‘육신 없는 영혼’일 뿐이다. 그들과 부딪힌 지구인은 곧바로 ‘영혼 없는 육신’이 되어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단순히 보여진 현상만으로 끝났다면 여느 유령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 가이아 이론을 얹어 놓아, 이들의 지혜 없는 영혼의 빈자리를 채워 놓는 방식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행성의 조각은 유성이 되어 지구에 떨어 졌고, 이미 생명을 읽은 외계인들은 지상 이후의 세계인 가이아로 흡수되어 아프리카에 정착한 상태다. 겉모양은 다르지만 수많은 외계인들은 구성원이 아닌 가이아의 세포와 비슷하다. 그들의 뿌리가 된 외계인 행성의 가이아는 정작 지구의 가이아와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상에서 죽음을 맞은 이들 역시 지하의 가이아에 흡수되어 있으니 새로운 화합의 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 그곳에는 시작이
히로노부 사카구치 감독의 <파이널 판타지>는 익히 알려진 게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000만 카피 이상이 팔렸다는 ‘파이널 판타지’는 일본 스퀘어사의 대표작이다. ‘그들’을 굳이 스크린에 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첫번째 씬이 지나고 나면 이미 풀려버리는 쉬운 것이다. 17분 짜리 데모필름에서 이미 확연한 성과를 보였듯이 그래픽의 현실감은 현시점에서 지상 최대이다.

<파이널 판타지>의 목표점은 단연 실사영화다. <토이스토리>를 지나 <슈렉>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들이 했던 모든 것은 셀애니메이션의 표현 영역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단정짓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여전히 번들거리는 피부와 어색한 표정은 감출 수 없더라도 전인미답의 순간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파이널 판타지는> 게임이 구축한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게임 자체가 반복해서 생산했던 자기 재생산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게임의 성공은 영화에서처럼 속편을 양산한다. 이들은 빠른 기술의 진보와 이를 앞서는 소비의 증가로 인해 끝없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일반이다. ‘파이널 판타지’의 경우, 세계적으로 성공을 이룬 7편과 판매의 기록을 갱신한 8편이 <파이널 판타지>를 있게 한 장본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같은 면 한달 먼저 개봉한 <툼 레이더>의 전략과 비슷하다. 하지만 철저히 캐릭터의 스타성과 스타 파워에 기댄 <툼 레이더>와 달리 게임의 개발자이자 감독인 히로노부 사카구치는 보다 영악한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기술이 계발이고 남은 하나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다. 전자가 보다 빠른 전송망을 기반으로 디지털 매체의 전성기를 내다본 하드웨어적 컨텐츠를 노린 것이라면, 후자는 나름대로 스토리를 개척하는 게임보다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 그리고 밀접한 고리를 기대하는 소프트웨어적 컨텐츠를 생각한 것이라 하겠다.

<파이널 판타지>는 결과적으로 돌이켜 볼 때-이는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라- 볼거리가 억압하는 사유의 범위를 예상한 영악함이 엿보인다. 새로운 기술의 성과를 자신의 어눌한 시각적 판단력으로 시험하려는 순진한 관객과 영화 본질관 전혀 상관없는 게임을 벌이는 식이다. 그 안에 담긴 생명에 대한 수많은 사념도, 인식의 절차도, 맹목적 보복의 도구로써 군국주의와 원인으로써 가족주의도 어물쩍 넘어간다.

히로노부 사카구치 감독은 SF 영화들에 대한 패러디 아닌 오마쥬로 자신의 열번째 ‘파이널 판타지’를 채웠지만, 시리즈 물은 다음으로 판단의 잣대를 넘긴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거대한 컨셉의 설정과 기술의 실험에 집중한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지향하는 목표점은 바로 관객으로 충분히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게이머들이라는 사실 역시 잊은 듯 보이지 않는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