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20001. 4. 12)
-삶과 추억의 틈새
@ 혼존하는 시선
그들보다 늦게 살았더라도 그들과 비슷한 건 사실이다. 그들과 비슷하더라도 그들과 같지 않은 것도 그렇다. 소독차 따라다니며 팔을 뻗어 날개를 펼친 것도, 줄 서서 맞을 순서를 기다리던 것도, 단체관람 극장과 롤라장도. 굳이 배우들에 의해 재생되는 추억을 즐기려 했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숱하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숱한 침을 튀어가며 술자리의 시간을 죽이는 군대이야기처럼, 많은 세상의 사내들 가슴 한 구석에는 생각만해도 저려올 친구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나보다. 곽경택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친구>는 이렇게 다가왔다.
흔히 1인칭 나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인물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강요한다. 즉 관객이 영화 속 등장인물을 자신이라고 여기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에서 나레이션은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이곳에서 상택(서태화)의 나레이션을 곳곳에 깔아 놓는 것은 번번히 딴 길로 가는 분절된 에피소드에서 유발된 시점(視點)의 분열을 상택에게 추를 놓아 통일시키려는 감독의 노력이다.
영화는 크게 네개의 씨퀀스로 이루어진다. 상택을 중심으로 어린시절, 고교시절, 대학시절 그리고 유학시절. 각 씨퀀스를 이루는 개별 에피소드들은 상택의 나레이션을 입고 입장을 정리한다. 하지만 모든 에피소드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깡패라는 원심력에 끌려가고 있는 두 친구,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의 행동이다. 화자(話者)인 상택은 준석에 의해서 ‘친구’로 자리하고 있지만 철저히 이들의 세계와 구별되는 타자(他者)다.
한 씬을 살펴보자. 상택은 도심의 도로 한복판에서 자신이 탄 택시를 가로막으며 반갑게 달려온 준석과 술자리를 갖고 있다. 몇 순배의 소주가 오갈 무렵, 호기 있게 건달의 길을 설명하는 준석의 말 끝에 상택은 한마디를 얹는다. “그래봤자 깡패아이가.” 영화는 상택이 보는 범주 안에서 친구들과 상택이 볼 수 없는 구석에서 친구들로 나눌 수 있다. <친구>가 다루고 있는 폭은 어디까지나 친구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정작 상택의 시선은 극 종반에 이르러-면회실 씬-서야 먼 길을 돌아 자리를 잡는다. 감독의 반영체인 상택은 기억의 재구성 세계 안에서 어색한 자리를 면치 못한다. 이는 또 다른 친구인 중호(정운택)에 이르러서 같은 오류를 확인 시킨다.
@ 가족, 그 무거운 짐
준석, 동수, 중호와 상택은 열세살적부터 친구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지만 이들의 ‘열세살’시절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포르노 영화와 사진을 보고, 쌍절곤을 사러 가고, 수영을 하는, 아주 일상적인 그들의 어린시절을 장악하는 가볍지 않는 분위기의 정체는 바로 가족의 부재다. 열세살 시절에 보여지는 거세된 존재로서 부모님은 강요하지 않지만 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다.
준석의 아버지는 이제는 은퇴한 깡패 두목이다. 준석은 ‘불쌍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통해 마약에 빠져 있었지만, ‘날개를 접은 아버지’ 곁을 떠나 깡패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 친구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 항상 친구들은 감옥에 있거나 대학생이 되어 멀리 있을 뿐이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동수, 한명이다. 그 마저 준석이 “내는 이제 고아다”라 말할 때 준식이 떠나온 상대파, 상곤에게 가기로 했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친구>가 품고 있는‘친구’에 대한 정의는 곁에서 오랫동안 돈독히 쌓인 우정(友情)이 아닌 오래 전 선택을 통해 근근히 유지되는 맹목(盲目)이다. 자신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운 동수보다 돈 싸들고 와서 도망치지는 상택에게 여자친구를 빌려주는 준석의 호의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마약에 빠져 나중 개인택시 하나 사달라는 부탁도, 하와이로 떠나 달라는 부탁도 이미‘고아’인 준석에겐 그리 깊지 않다.
동수는 특이한 캐릭터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인물인 것에 기인한지도 모른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준석의 ‘시다바리’를 하고 있지만, 결별시 비친 것처럼 마음이 통해 있지는 않다. 동수는 질투하고 분노하는 욕망의 인물이다. 그의 본질은 말없는 방패였던 준석 아버지의 사망 시점에서 밖으로 드러난다. 그에게 두려운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염하는 싸늘한 한 구의 시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거세하려는 현실 자체다. 동수가 아버지의 직업을 거부하면서 뛰어든 깡패의 세계에서 성공을 위해 금기를 넘어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에서, 나이트 클럽 앞에서 습격을 받은 날, 내리는 비는 욕망의 과잉을 보이던 동수 자신처럼 넘쳐서 흘러 내린다. 문짝이 떨어지듯 소란한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아들의 죽음을 준석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였지만 끊임없이 인정 받지 못하는 아들과 꼬리를 같이한다. 표출의 유무에 대한 차이만 명백히 드러내면서 말이다.
@ 나눌 수 없는 승패
형두(기두봉)를 밀고 하고 돌아온 날, 부하에게 묻는다. “수영선수 조오련하고 바다거북이하고 헤엄을 치믄 누가 이기겠노?” 열세살시절 친구들과 했던 이 물음은 세번에 걸쳐 등장하고 덜컥이는 영화의 흐름을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처음 등장 했을 때는 갈등의 씨앗을 품고, 두번째는 혼란한 현재를, 극의 종말과 함께 등장하는 세번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화해를 이야기 한다.
영화는 고교시절, 롤라장에서 위기에 처한 상택 앞에 멋지게 등장하는 준석들처럼 인과성 없는 기억의 단편을 그대로 이어 놓고 있다. 또 발생한 사건으로 유발되는 사건에 있어서도 설명-40년전이었다면 ‘점프컷’으로 추앙받았을-이 생략되어 있지만, ‘상황을 통한 논리의 잠식’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이전 어린시절 장난감 칼 절도 미수사건, 동수의 유리창 사건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정작 ‘친구’영화라기보다 ‘깡패’영화의 인상이 드는 건 동수의 죽음을 전후로 한 ‘관계적인 편집’(relational editing)중 ‘대조’(contrast) 때문이다.
각본을 쓴 감독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하는 국제나이트클럽씬은 준석과 동수 사이에 남겨 있는 우정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극단의 정서적 충격을 유발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철저한 몸수색을 거쳐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준석과 하와이 도피 제안이 차가운 동수의 반응과 망설임을 통해 첫 번째 대조를 이룬다. 나이트클럽을 나선 준석의 신호, 떨어진 담배꽁초의 소등이 공항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동수의 건들거림과 습격으로 두 번째 대조를 보인다.
이 씬의 강렬한 인상은 <친구> 전편을 거쳐 감독의 일상적인 ‘상황을 통한 논리의 잠식’의 전후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상반응에 기인한다. 바로 준석의 부하들을 처치한 동수의 살상극에 대한 해결의 생략과 “쪽팔려서” 죽음을 택한 준석의 행동의 유사점은 모두 나이트클럽씬과 연결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면회용지에 ‘친구’를 적는 상택의 행동은 무게를 잃어 버린다. <친구>는 일어났던 일과 전해 들은 이야기사이에서 발생하는 틈을, 아직도 곁에 있는 친구에 대한 예우를 위해 비워놓고, 감독 스스로 이야기하는 대담한 방식을 택했다. 그들의 남은 현실은 가슴 아프지만, 또 다른 의도에 반응한 결과처럼 삶은 추억을 기반으로 승패를 가를 수 없는 진행형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 : 19)
-삶과 추억의 틈새
@ 혼존하는 시선
그들보다 늦게 살았더라도 그들과 비슷한 건 사실이다. 그들과 비슷하더라도 그들과 같지 않은 것도 그렇다. 소독차 따라다니며 팔을 뻗어 날개를 펼친 것도, 줄 서서 맞을 순서를 기다리던 것도, 단체관람 극장과 롤라장도. 굳이 배우들에 의해 재생되는 추억을 즐기려 했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숱하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숱한 침을 튀어가며 술자리의 시간을 죽이는 군대이야기처럼, 많은 세상의 사내들 가슴 한 구석에는 생각만해도 저려올 친구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나보다. 곽경택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친구>는 이렇게 다가왔다.
흔히 1인칭 나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인물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강요한다. 즉 관객이 영화 속 등장인물을 자신이라고 여기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에서 나레이션은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이곳에서 상택(서태화)의 나레이션을 곳곳에 깔아 놓는 것은 번번히 딴 길로 가는 분절된 에피소드에서 유발된 시점(視點)의 분열을 상택에게 추를 놓아 통일시키려는 감독의 노력이다.
영화는 크게 네개의 씨퀀스로 이루어진다. 상택을 중심으로 어린시절, 고교시절, 대학시절 그리고 유학시절. 각 씨퀀스를 이루는 개별 에피소드들은 상택의 나레이션을 입고 입장을 정리한다. 하지만 모든 에피소드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깡패라는 원심력에 끌려가고 있는 두 친구,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의 행동이다. 화자(話者)인 상택은 준석에 의해서 ‘친구’로 자리하고 있지만 철저히 이들의 세계와 구별되는 타자(他者)다.
한 씬을 살펴보자. 상택은 도심의 도로 한복판에서 자신이 탄 택시를 가로막으며 반갑게 달려온 준석과 술자리를 갖고 있다. 몇 순배의 소주가 오갈 무렵, 호기 있게 건달의 길을 설명하는 준석의 말 끝에 상택은 한마디를 얹는다. “그래봤자 깡패아이가.” 영화는 상택이 보는 범주 안에서 친구들과 상택이 볼 수 없는 구석에서 친구들로 나눌 수 있다. <친구>가 다루고 있는 폭은 어디까지나 친구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정작 상택의 시선은 극 종반에 이르러-면회실 씬-서야 먼 길을 돌아 자리를 잡는다. 감독의 반영체인 상택은 기억의 재구성 세계 안에서 어색한 자리를 면치 못한다. 이는 또 다른 친구인 중호(정운택)에 이르러서 같은 오류를 확인 시킨다.
@ 가족, 그 무거운 짐
준석, 동수, 중호와 상택은 열세살적부터 친구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지만 이들의 ‘열세살’시절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포르노 영화와 사진을 보고, 쌍절곤을 사러 가고, 수영을 하는, 아주 일상적인 그들의 어린시절을 장악하는 가볍지 않는 분위기의 정체는 바로 가족의 부재다. 열세살 시절에 보여지는 거세된 존재로서 부모님은 강요하지 않지만 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다.
준석의 아버지는 이제는 은퇴한 깡패 두목이다. 준석은 ‘불쌍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통해 마약에 빠져 있었지만, ‘날개를 접은 아버지’ 곁을 떠나 깡패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 친구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 항상 친구들은 감옥에 있거나 대학생이 되어 멀리 있을 뿐이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동수, 한명이다. 그 마저 준석이 “내는 이제 고아다”라 말할 때 준식이 떠나온 상대파, 상곤에게 가기로 했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친구>가 품고 있는‘친구’에 대한 정의는 곁에서 오랫동안 돈독히 쌓인 우정(友情)이 아닌 오래 전 선택을 통해 근근히 유지되는 맹목(盲目)이다. 자신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운 동수보다 돈 싸들고 와서 도망치지는 상택에게 여자친구를 빌려주는 준석의 호의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마약에 빠져 나중 개인택시 하나 사달라는 부탁도, 하와이로 떠나 달라는 부탁도 이미‘고아’인 준석에겐 그리 깊지 않다.
동수는 특이한 캐릭터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인물인 것에 기인한지도 모른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준석의 ‘시다바리’를 하고 있지만, 결별시 비친 것처럼 마음이 통해 있지는 않다. 동수는 질투하고 분노하는 욕망의 인물이다. 그의 본질은 말없는 방패였던 준석 아버지의 사망 시점에서 밖으로 드러난다. 그에게 두려운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염하는 싸늘한 한 구의 시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거세하려는 현실 자체다. 동수가 아버지의 직업을 거부하면서 뛰어든 깡패의 세계에서 성공을 위해 금기를 넘어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에서, 나이트 클럽 앞에서 습격을 받은 날, 내리는 비는 욕망의 과잉을 보이던 동수 자신처럼 넘쳐서 흘러 내린다. 문짝이 떨어지듯 소란한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아들의 죽음을 준석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였지만 끊임없이 인정 받지 못하는 아들과 꼬리를 같이한다. 표출의 유무에 대한 차이만 명백히 드러내면서 말이다.
@ 나눌 수 없는 승패
형두(기두봉)를 밀고 하고 돌아온 날, 부하에게 묻는다. “수영선수 조오련하고 바다거북이하고 헤엄을 치믄 누가 이기겠노?” 열세살시절 친구들과 했던 이 물음은 세번에 걸쳐 등장하고 덜컥이는 영화의 흐름을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처음 등장 했을 때는 갈등의 씨앗을 품고, 두번째는 혼란한 현재를, 극의 종말과 함께 등장하는 세번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화해를 이야기 한다.
영화는 고교시절, 롤라장에서 위기에 처한 상택 앞에 멋지게 등장하는 준석들처럼 인과성 없는 기억의 단편을 그대로 이어 놓고 있다. 또 발생한 사건으로 유발되는 사건에 있어서도 설명-40년전이었다면 ‘점프컷’으로 추앙받았을-이 생략되어 있지만, ‘상황을 통한 논리의 잠식’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이전 어린시절 장난감 칼 절도 미수사건, 동수의 유리창 사건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정작 ‘친구’영화라기보다 ‘깡패’영화의 인상이 드는 건 동수의 죽음을 전후로 한 ‘관계적인 편집’(relational editing)중 ‘대조’(contrast) 때문이다.
각본을 쓴 감독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하는 국제나이트클럽씬은 준석과 동수 사이에 남겨 있는 우정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극단의 정서적 충격을 유발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철저한 몸수색을 거쳐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준석과 하와이 도피 제안이 차가운 동수의 반응과 망설임을 통해 첫 번째 대조를 이룬다. 나이트클럽을 나선 준석의 신호, 떨어진 담배꽁초의 소등이 공항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동수의 건들거림과 습격으로 두 번째 대조를 보인다.
이 씬의 강렬한 인상은 <친구> 전편을 거쳐 감독의 일상적인 ‘상황을 통한 논리의 잠식’의 전후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상반응에 기인한다. 바로 준석의 부하들을 처치한 동수의 살상극에 대한 해결의 생략과 “쪽팔려서” 죽음을 택한 준석의 행동의 유사점은 모두 나이트클럽씬과 연결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면회용지에 ‘친구’를 적는 상택의 행동은 무게를 잃어 버린다. <친구>는 일어났던 일과 전해 들은 이야기사이에서 발생하는 틈을, 아직도 곁에 있는 친구에 대한 예우를 위해 비워놓고, 감독 스스로 이야기하는 대담한 방식을 택했다. 그들의 남은 현실은 가슴 아프지만, 또 다른 의도에 반응한 결과처럼 삶은 추억을 기반으로 승패를 가를 수 없는 진행형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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