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천국의 아이들]과 [선물] 울음과 웃음 그리고 사랑과 선물

열혈연구 2001. 3. 30. 00:40
천국의 아이들과 선물 (2001. 3. 27)

울음과 웃음 그리고 사랑과 선물

마자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랑의 이야기다. 오빠와 동생, 아버지와 아들이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아름다움. 시각에 집착하고 청각에 의존하는 영화의 본질을 잊게 만드는 이야기. 이 영화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초등학생 알리는 동생 자라의 구두를 수선하고 집에 오던 길, 감자를 사러 들어간 가게에서 구두를 잃어버린다. 걱정이 가득한 채로 돌아온 집은 신발을 잃어버린 사실을 말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집주인은 밀린 방세를 독촉하고, 엄마는 아픈 몸으로 카펫을 빨고, 아버지는 공장에서 힘들게 돌아온다. 알리와 자라는 부모님 몰래 신발을 나눠 신기로 한다. 지각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달리기는 시작된다.

오기한 감독의 데뷔작 <선물>은 용기(이정재)와 정연(이영애)의 사랑이야기다. 영화는 ‘웃음과 울음을 두 축’으로 삼은 감독의 의도만큼 충분히 웃기고, 무던히 울리는 성공한 멜로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립했던 용기와 정연은 지금 사이가 좋지 않다. 개그맨으로 살아간지도 벌써 5년째, 성공은 멀기만 한 남편 용기는 유아복 가게를 운영하는 아내 정연를 보는 게 껄끄럽다. 그러던 어느날 둘의 사이에 성공을 약속하는 사기꾼 등장한다. 그리고 어색한 둘의 사이에 담긴 비밀이 우연히 밝혀진다. 바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 것.

일주일을 터울로 개봉한 <천국의 아이들>과 <선물>은 어쩌면 일말의 감정적 연대나 장르적 교감이 없어 보인다. 어린이들의 천진함이 우리의 7,80년대 정도의 환경에 어우러지는 <천국의 아이들>은 어린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복고(復古) 영화다. 이란의 현재와 현실이 공간을 옮겨 멀리 한반도로 오면서 과거로 치환되것이다. 반면 <선물>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동시대성 소재인 TV, 개그, 사기, 청탁, 병, 죽음을 노골적으로 눈물에 매달리는 과거 신파극에 다르지 않다. 둘 다 과거에 매달려 있는 것. 또 두 영화는 ‘선물’과 ‘사랑’이란 아이콘으로 묶어 놓았을 때, 전화로 들으면 구별할 수 없는 한 식구의 목소리처럼 비슷함을 알아 챌수 있다.

<천국의 아이들>의 알라는 오전반인 자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골목 끝까지 신고온 슬리퍼와 자라 발에 걸쳐 돌아오는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바꿔 신어야 하기때문. 골목 저편에 자라의 모습이 보이자 마자 번개같이 신발을 받아 갈아 신고 달려간다.

알라는 신발을 잃어버린 사실을 자라가 부모님께 알리지 않도록 처음엔 기다란 연필을 나중엔 선생님께서 주신 멋진 볼펜을 넘겨준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비치는 알라의 손 끝, 표정에는 아쉬움이 없다. “네가 부모님께 이르면 다시 빚을 내서 신발을 사야 해”라는 알라의 말이 협박 아닌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영화 <선물>의 가장 멋진 선물은 “내게 있어 가장 큰 선물은 당신이었습니다”는 정연의 편지가 아니라 술 마시고 사 들고 온 용기의 약상자다. 정연의 시한부 삶을 뒤늦게 알게 된 용기는 이제껏 자존심처럼 거절했던 밤무대에 서기로 작정한다. 손님과 싸우고 코피를 터뜨린 그날 밤. 용기는 이름 모를 한약들을 사 집에 가지고 온다. “출연료 대신 주더라고, 당신이나 먹어”. 이미 약을 쓸 수 없는 때 임을 알면서도 이제껏 알지 못한 잘못의 사죄처럼 내미는 용기의 손. 이것은 방송국 출연 후에도 같은 대사를 써먹으며 술기운으로 말하는 용기의 모습에 덧입혀져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의 바위에 힘을 다해 던지는 계란처럼 처연히 폭발한다.

알라와 용기는 자라와 정연을 위해 마지막 선물을 준비한다. 어린이 마라톤 대회 3등 상품인 운동화와 토너먼트식 개그 대항전에서 우승이 바로 그것. 마라톤 대회 예선을 지나친 알리는 뒤늦게 상품이 운동화인 것을 알고 선생님을 조른다. 커다란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동생에게 건네 받은 신발로 지각하지 않으려 학교를 뛰어가던 실력으로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한 알리. 드디어 마라톤 대회 날. 수백명의 아이들과 함께 출발선에 선다.

결승선이 머지 않는 지점. 3등을 유지하던 알리는 뒤에서 달리던 한 아이가 밀쳐 넘어지고 만다. 영화는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이전까지 동생을 생각하며 열심히 달리던 알리는 넘어지는 순간 이겨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한다. 알리의 속도와는 반대로 카메라는 고속촬영으로 길게 시간을 늘리고, 이는 결과에 대한 궁금증과 해결 이후의 반응까지 효과적으로 정리한다.

용기의 결선 공연장을 찾은 정연. 마임을 하는 용기의 우스운 행동과 사라진 대사는 익숙한 방청객의 웃음과 어울려 80년대의 TV 개그형식, 최근 다시 불고 있는 콩트식 개그 공연방식으로 향수를 자극한다. 동시에 정연은 잦아드는 생명을 놓치지 않으려 손수건을 움켜쥐고, 그녀의 손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 용기는 푸치니의 ‘별은 빛나건만’을 열심히 립싱크하고 있다. 분명 남편의 코믹 마임과 관객 속 아내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맛물려 있지만 아쉽게도 감정의 변증법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유는 다름아닌 영화 속의 모든 개그공연상황이 영화 속의 일상보다 웃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줄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기쁘게 받아 주는 상대가 더욱 소중하다. <선물>의 용기와 정연은 충분한 선물을 주고 받았다. 굳이 정연의 과거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사족(蛇足)을 달아 확인 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봄의 어느 지점에서 발에 곱게 신겨진다면 한없이 기뻐할 알리와 자라의 신발처럼 기분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태복음 13 :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