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스포일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극장에 다녀와 읽으서야 마음이 편할 겁니다)
국내 최대 병원이 두개나 위치한 송파구. 어쩌다가 메르스의 진원지 중 하나가 되어 전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CGV가 위치한 가든 파이브 역시 마찬가지. 박원순 시장이 방문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한산한 극장가에서 마스크로 무장한 관객들과 함께 22년만에 돌아온 공룡들을 만났다.
우리나라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게 언제였던가. 2002년 월드컵 4강, 황우석 박사 사건 때만큼은 아니지만 연일 외신에서 북한이 아닌 한국을 다루고 있는 요즘, <아웃브레이크>, <콘테이젼>, <연가시>, <감기> 등 전염병을 다룬 영화들이 재조명 되고있다. 특히 <감기>는 정치인들에 대한 언급까지 더해져 새삼스레 IPTV구매율을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솔직히 영화 자체로서 <쥬라기 월드>는 크게 주목할만 하지 않다. 위대한 스필버그 선생의 전작들이 만들어낸 명성 위에 만들어졌다는 것만이 이 영화를 올려다보게 하는 유일한 이유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이름값이 크게 오른 오웬 역의 크리스 프랫, 인도 관객을 겨냥한 사이먼 역의 이르판 칸과 ‘인도’미누스 렉스를 포함하더라도 인물구성이 흥미롭진 않다. 배우보다 영화에 비중을 두었던 스필버그 초기작들과 유사하다.
주변 환경 때문인지 <쥬라기 월드>를 보는 내내 현 메르스 사태가 떠올랐다. 돌아와서 기사를 검색해보니 ‘쥬라기 월드 메르스 공포 깼다’는 글들만 잔뜩 올라와 있다. 내가 이상했던 걸까? 실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영화를 복기해보기로 했다.
잭과 그레이 형제는 쥬라기 월드에 놀러갈 예정이다.운영 책임자인 이모 클레어 덕분에 VIP 티켓도 손에 넣었다. 폐장된 쥬라기 공원 위에 세워진 쥬라기 월드는 유전자 조작으로 공룡들을 만든 대규모 놀이 공원이다. 들떠 있는 동생 잭, 여자친구와 애잔한 이별을 하는 그레이. 실은 이혼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에 형제를 멀리 떠나 보내려는 부모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여행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한 대립구조로 시작한다.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 엄마 카렌과 결혼도 아이들도 모른채 일만 하는 이모 클레어, 공룡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전직 군인 오웬과 공룡을 무기로 활용하려는 인젠사의 호스킨스, 공룡을 좋아하는 그레이와 또래 여자들만 바라보는 형 잭… 이들 사이에서 귀에 쏙 들려오는 첫번째 대사,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질 않아.”
<쥬라기 월드>는 <쥬라기 공원> 위에 보다 크고 보다 자극적인 형태로 만들어진다. 다소 멀어진 가족의 거리만 추가되었을 뿐, 거의 모든 것이 전편들과 똑같이 흘러간다. 특히 (스필버그가 1975년에 잡은 바 있는) 거대한 상어를 돌고래처럼 뛰어 올라 잡아채는 모사사우르스의 모습은 교훈 없이 만들어진 새로운 볼거리를 대변한다. 거대한 자본금이 투자되어 만들어진 <쥬라기 월드>는 막대한 수익을 목표로 한다. 영화 속의 쥬라기 월드도 관객들을 모으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크고 강력한 공룡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 이름이 인도미누스다.
사건은 야심차게 준비한 인도미누스가 울타리를 넘어 탈출하면서 시작한다. 이 공룡에 대한 두려움은 어떠한 유전자 조립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는 데서 발생한다. 메르스처럼 본질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할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쥬라기 월드의 소유주인 사이먼은 인도미누스의 행태를 애써 무시하려 한다. 그는 수만명의 관객들이 잠재적인 위험에 직면할 상황을 앞에 두고 아직 시간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눈 앞에서 관리자 한명이 잡아 먹힌 것을 목격한 오웬은 적극적인 도살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이먼이 내리는 첫번째 명령은 도수가 아닌 포획 작전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표면적으로 인도미누스가 관람객 운집지역까지 이동하는 데는 2마일이나 남아있다. 실제로는 이 공룡을 만드는데 3천만 달러가 투자되었다는 경제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이때까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즐기고 있다. 치료비와 사망시 보상금까지 줄테니 한국으로 놀러 오라고 말하는 문체부의 ‘메르스 관련 관광업계 지원 및 대응 방안’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사이먼은 처음 투입된 진압요원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꿈쩍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 그레이와 잭 형제는 레일 자동차가 발전한 자이로스페어를 타고 공룡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이로스페어에서는 새로운 장비의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반어법 형태로 만들어진 이 영상의 내용은 인도미누스의 등장으로 인해 사실로 판명된다. 뛰어난 안전성을 자랑한다던 자이로스페어는 동영상 속 엉터리 박사의 행동처럼 인도미누스의 공격에 산산조각 나고 만다. 3주일째 이번 주말이 고비라고 말하고 있는 정부의 발표와 무엇이 다른가.
관람객들에게 대피 명령이 떨어진다. 두 형제도 부숴진 자이로스페어를 떠나 도망친다. 아무런 설명도, 명확한 정보도 없으니 사람들은 우왕좌왕댈 수밖에 없다. “전 그냥 직원이에요.” 무슨 일인지 묻는 관객들에게 직원이 하는 말이다. 아직까지 피해의 규모는 명확하지 않다. 누군가는 불안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공포는 실존한다.
오웬은 인도미누스와 맞닥뜨리며 실체를 파악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룡이 두려운 점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변종동물이라는 것이다. 클레어 역시 조카들의 나이도 모르면서 오웬에게 찾는 것을 도와달라 한다. 피해야할 대상만 있을뿐, 구해야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2미터 이내 1시간 이상은 함께 있어야 감염된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한 감기 정도에 두려워하지 말자’ 처럼 국민을 안정시키려 했던 말들은 확진자들의 발생과 함께 공염불이 되었다. 외국의 전문가들도 이 병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안심하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물론 그레이와 잭 형제가 인도미누스에게 쫓기게 된 데에는 둘의 잘못도 있다. 운행을 중단할테니 어서 돌아오라는 공원측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최근 1번 환자의 비협조를 지적한 기사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메르스라는 질병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방역 당국의 책임이 우선이다. 개인이 메르스라는 질병에 대해, 증상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후에도 연달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원활하지 않은 소통 때문에 일어난 문제다. 쥬라기 공원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휴대전화도, 무전기도 잘 터지지 않는 지역이 허다하다. 한쪽에서 보낸 경고의 메시지를 상대쪽에서 받지 못하는 현상이다. 부족한 소통은 공포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같은 공포가 몇몇 사람의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원래 격양(擊壤)이란 단어는 천하가 태평했던 요임금 시절 노인들이 부른 노래에서 유래했다. «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日出而作 日入而息) 밭을 갈아 밥 먹고 우물을 파서 물 마시니(耕田而食 鑿井而飮)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으랴(帝力於我何有哉) » 어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시절에는 임금의 은덕은 물론이고 존재마저 느낄 수 없다는 노래다. 반대로 극단적인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필요성이 두드러지는 것이 지도력이다.
공룡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쥬라기 월드는 완벽한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문제가 발생한다. 인젠사의 호스킨스는 마치 쿠데타 세력처럼 용병들과 함께 통제실을 장악한다. 그리고 경제를 우선시하느라 관람객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던 사이먼도 뒤늦게나마 일어난다. 인도미누스 포획에 랩터들을 활용하자는 호스킨스의 의견에 ‘회사윤리 규정상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자신은 직접 헬리콥터를 몰고 인도미누스를 잡으러 떠난다. 이 지점에서 쥬라기 월드의 문제는 체제의 불안전성이 아니라, 지도력의 부족이었음이 드러난다. 사이먼은 이를 몸소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이틀 후에야 조정 면허를 따게 될 비자격 헬리콥터 조종사였다.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들었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아니 오히려 익룡들을 가둬둔 거대한 온실 벽을 온몸으로 부숴 문제를 확대시키고 만다.
인도미누스가 본격적인 만행을 저지르는 시점부터 대결구조를 보이던 인물들은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커다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정부도 국회도 지방자체단체도 병원들도 시민사회도 메르스 퇴치를 향해 힘을 합치자고 외치고 있다. <쥬라기 월드>는 준비되지 않은, 철저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씩 처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자신의 공을 내세우고 타인의 치적을 깔아 뭉개려는 이해타산만이 가득하다. 비극은 그들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점이다.
풀려난 익룡들이 몰려올 때, 경비원들은 멍하니 말한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위험 상황에 대한 대비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원을 운영하는 회장과 통제실, 안전을 지키는 경비원과 시설물들이 하나둘 무너지면서 관람객들은 위험에 직면한다. 익룡들은 사람들을 공격한다. 생존을 위한 혼란이 극에 달한다.
결국 호스킨스의 결정에 따라 랩터를 투입하는 작전이 실행된다. 오웬은 자신이 길들인 네마리의 렙터와 함께 사냥을 시작한다. 같은 시간 클레어는 두 조카들을 트럭 안에 두고 보호하고 있다. 두번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요원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도 그녀는 조카들을 안심시키려고 그저 괜찮다고 말한다. 그녀가 “안전하게 느끼게 하려는 거짓말은 괜찮아”라고 말하자마자, 배신한 랩터가 트럭을 공격한다. 클레어는 막연한 안심보다는 긴장 속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낫다는 진리를 목숨을 걸고 쫓기면서 깨닫게 된다.
오웬측이 역전의 빌미를 잡는 것도 새롭게 각성한 클레어의 행동 덕분이다. 그녀는 갇혀 있던 티렉스를 풀어낸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르는 작전이다.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던 통제실의 불을 끈다.
영화는 예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발견되는 요소와 사건을 조합해 재해석할 뿐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현실과 놀랄만큼 유사한 영화를 발견한다. 역사를 통해 배우려하지 않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부른 참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쥬라기 월드>는 <쥬라기 공원>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썩 멀지 않는 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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