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영화축제가 금새 막을 내렸습니다. 뭐, ‘축제’란 말이 무색하게, 즐기지도 그렇다고 만족스런 결과를 남기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결과보다 씁쓸한 건 ‘한국의 아카데미가 되어야 할’이라고 쓰여 있던 모 인쇄매체의 한 줄 기사였었습니다.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국에서만 통하는 ‘스타파워’에 의존한 영화들이 바로 그것이죠. 대체나 ‘짐 캐리’ 영화들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멕시칸>에 출연한 브래드 피트나 쥴리아 로버츠는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배우이긴 합니다. 이번 ‘누크의 사선에서’의 행간에는 ‘스타파워’의 허실을 담아 보았습니다.
멕시칸
-생생함이 익숙함에 가리우다 (01. 04. 28)
@보라고 있는 별
‘스타’ : 스포츠 연예계에서 유명해진 사람을 지칭하는 한시적 용어. 우리는 별의 지겨운 영어표현을 번번히 그렇게 생각한다. 한없이 멀리서 반짝이는 밤하늘 별처럼 내일 또 다시 그들이 눈앞에 떠오르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어린시절 방안을 가득히 메웠던 젊은 스타의 사진은 한두살 나이를 먹어가며 지갑 속 구석에 가족이나 연인의 사진으로 대체된다.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허를 알만한 나이쯤, 아니 그만큼 현실적인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로버츠를 보기위해 <멕시칸>을 찾는 관객들은 분명히 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두 스타의 핀업 스틸 같은 멋진 모습이 아니라 움직이고 살아 생생한 캐릭터 자체다. 낯선 배우들과 달리 관객이 스타와 동일시를 소망하는 경우 감독의 이야기하기는 그만큼 쉬어진다. 두시간을 넘는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먼지 가득한 사막의 두 지역, 라스베이거스와 멕시코를 넘나든다. 어리숙한 갱 제리(브래드 피트)는 곧 출소하는 보스의 ‘멕시코에 가서 멕시칸이란 총을 받아오라’는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애인 샘(줄리아 로버츠)은 제리가 라스베이거스로 가자고 했던 약속을 어기자 다짜고짜 대판 싸운다. 그리고 둘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떠난다. 제리와 샘의 문제는 영화를 통해 샘이 계속 고민하듯이 ‘서로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샘은 바꿔 생각하지 못하고 제리는 설득하지 못한다.
고어 버빈스키감독의 데뷔작은 <마우스 헌트>다. 이제 디지털 쥐의 역할은 제리가 떠맡고 부족한 자리들은 스타라는 이름으로 채워 놓는다. 잠시라도 이야기가 삐걱거릴라치면 쓰윽 하고 웃으며 얼굴을 들이미는 브래드와 줄리아 앞에선 웬만한 빈틈이 사라지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거다. 당연히 하나로 시작해 둘로 나뉘고 다시 하나로 뭉치는 플롯은 두 스타간의 배분문제로 종종 흐름을 깬다. 예를 들면, 멕시칸을 찾고 잃고를 반복하는 제리의 위기는 때론 샘의 위기와 교차되지만-이것이 일상적인 맞춤이라면, 이 영화에서는-우스운 탈출극과 상담극에도 똑같이 맞붙어있다. 차차 샘은 끊임없이 사고해가는 탐구자로 변해가고 제리는 막판 반전을 노리는 도박사가 되지만 여지없이 마지막 자락은 맞아 떨어진다. 스타들의 웃음을 기다리는 관객을 위해 말이다.
@여행과 이해
로드무비의 특성은 여정을 통해서 변해가는 인물과 동행한다는 데 있다. 때론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막다른 길에 이르기도 하면서 변화와 결정의 시간을 선물한다. <멕시칸>은 정확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가는 영화다. 그런 면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중 가장 과격한 여성로드무비인 <너스 베티>와 묘한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샘은 라스베이거스로 떠난다. 약속을 어긴 제리와는 ‘이제 끝이다’를 되뇌이면서 연애소개서나 읽으며 유흥의 도시를 숨쉬려 한다. 그러던 그녀는 갑작스런 사건에 말려들어 변화의 전기를 얻는다. 화장실에서 그녀를 쫓아온 킬러와 조우한 것이다. 샘은 두명의 킬러가 바톤을 이어 받듯 바꾸어 납치 당하고 만다. 답답한 일상의 베티는 마약을 빼돌린 남편이 두명의 킬러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자신을 드라마 인물로 여기게 된다. 그녀는 드라마 속의 옛 애인을 찾아 떠난다. <멕시칸>의 샘이 자신이 꾸었던 현실적인 꿈을 찾아 떠났다가 킬러를 만나 과거를 되짚어 가는 것에 비해 <너스 베티>의 베티는 끔찍한 현실을 목격함으로 인해 꿈꾸던 이상을 쫓아간다. 그리고 둘은 자신들이 꾸었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샘은 킬러(제임스 갠돌피니)에게 납치당한다. 제리가 멕시칸을 넘겨주면 교환한다는 조건. 허나 샘은 망설임 없이 살인을 하고 탈출을 번개같이 봉쇄하는 전문 킬러와 마음을 나누는 계기를 만든다. 바로 식당에서 건너편 남자를 바라보던 킬러의 눈을 알아차린 것이다. 케빈 스미스의 <체이싱 아미>는 성과 성애의 차에 대한 논의를 시종일관 유쾌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결론을 놓고 이성애의 승리 혹은 동성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시시한 일이다. 젊은 남녀들의 대결구조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의제들에 얼마나 명쾌하게 다가갔느냐가 보다 나은 접근법.
<멕시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소재로서 동성애는 이미 차별된 시선으로 상처 받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게이가 변태성욕과 멀지 않다는 고정관념과 남성성이 강요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샘에게 사랑에 대한 워크샵을 펼친다. 냉혹한 킬러가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잠자리에 드는 과정은 여느 남녀관계와 다를 바 없다. 다음날 아침 킬러가 눈물을 글썽이며 타올 속에 나온 권총을 이해해준 상대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서로를 인정해가는 과정으로서 사랑을 고스란히 설명한다. 그리고 샘은 킬러의 값비싼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그래서 제리와 만난 후 달리던 멕시코의 도로씬은 이 영화가 품은 명쾌한 반전의 절정(Climax of Anticlimax)이다.
@주고 받기
제리와 샘 그리고 킬러는 나란히 앉아 도로를 달려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제리와 샘 사이에 킬러가 앉아 있다. 영화의 처음과 비슷하게 달리자마자 시작된 둘의 말싸움은 난폭운전을 유발한다. 셋은 중앙선을 넘어 달리다 오는 트럭을 피하고 비껴 간신히 도로가에 멈췄을 때 타이어가 펑크난 것을 알아챈다.
샘과 킬러가 사랑 상담을 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 제리는 납치된 샘의 곁에 있는 킬러가 악수 한번으로 심성이 착한 것을 알 수 있던 그 사람임에 안심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듯 너무나 인간적인 킬러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기대에 호응한다. 샘과 제리가 만나 말싸움을 시작할 때도 가운데서 이리저리 활로를 뚫으려는 킬러의 모습은 우유를 마시고 화초를 키우던 레옹처럼 ‘Good Bad Guy’로서 자리를 다진다. 하지만 멈춰선 차와 떠나는 샘 그리고 타이어를 교체하러 나온 제리의 삼각구조가 한발의 총성에 무너진다. 이 순간은 <식스센스>의 치밀한 반전처럼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해 요약화면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제법 멋지다.
영화의 갈등구조는 크게 제리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중간 보스 세이먼과 멕시칸을 가지러 간 제리와 담보가 된 샘으로-킬러와 샘은 중간에 하나가 되었으니- 요약할 수 있다. 적당히 균형을 맞춰야 하는 갈등의 주체들을 살펴보면 샘은 감성에 접근하는 반면 제리는 엉뚱함에 호소하고 이에 맛서는 세이먼의 비열함은 둘에 가려 흐릿해진다. 감독의 실수는 바로 이곳 영화의 미스터리적 특성을 시트콤 방식으로 덮어버렸다는데 있다. 감독은 갈등구조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포기하고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관객들은 그저 멕시칸이 어느 손에 들어갈 것인지를 러시안 룰렛의 긴장감이 아니라 복권의 기대감처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또, 곳곳에 자리한 설정의 생략–길가에 무덤을 만드는 제리나 전당포서 사라지는 고참 등- 은 때론 의미 없이 소비된다. 멕시칸의 행방과 샘과 제리의 안전 주위에 연달아 등장하는 변수들이 그저 밋밋한 에피소드 나열에 머무른다. 그렇다고 <멕시칸>이 김빠진 콜라 같은 기분 나쁜 단물인 것만은 아니다.
@신호등은 길을 정리한다
영화에는 세편의 극중극이 나온다. 바로 멕시칸에 얽힌 사연이 그것인데 이는 각각 보스의 손자, 비리 경찰 그리고 보스를 통해 제리에게 전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서부영화 스타일을 갖고 있다. 총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악당과 사랑이 자리하고는 설정에서 총쏘는 순간의 긴장과 목표가 되는 상대, 쓰러지는 순간들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여기에다 이 모두를 쓸어 담는 설정샷까지 있다. 단지 이것 뿐이라면 일상적인 플래쉬백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극중극들은 현실과 겹치는 몇가지 복선과 멕시칸에 부여하는 의미의 다층화로 인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제리는 멕시칸에 대한 이야기를 긴장감 가득한 술집 한 구석에서 처음 듣는다. 이야기 속의 멕시칸은 제작자의 실수로 뒤로 발사되도록 장치된 비정상적인 총. 한 장인의 작품으로서 총과 사람들의 경외감은 첫 격발의 영예가 주어진 청년의 죽음으로 깨어진다. 제리가 멕시칸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은 보스의 손자는 엉뚱한 총알에 뒤통수가 깨져 죽는 때와 맛물린다. 제리가 경찰에게 듣는 두번째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귀족과 결혼 선물로 제작되었다는 멕시칸은 질투가 담겨 있다. 제작공의 딸을 사랑하는 조수가 뒤로 나가도록 장치했다는 것이다. 정작 처음 총을 쏘는 사람은 귀족 아닌 동네 겁많은 사내. 경찰이 제리를 체포한 것은 죽은 보스의 손자를 앉혀 놓았던 의자의 핏자국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의도완 다르게 멕시칸의 새로운 이야기를 제리는 듣게 되고 다시 멕시칸을 잃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멕시코에 등장한 보스를 통해서다. 멕시칸은 감정에 따라 격발을 선택하는 신비한 총이라는 사실.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 앞서 멕시칸과 함께 시작한 보스 손자의 죽음은 정리되고 동시에 세이먼과 샘의 대결을 복선으로 깔아 놓는다.
또 하나 영화의 흐름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요소로 신호등을 빼놓을 수 없다. <멕시칸>은 신호등의 고장으로 사고가 나는 충돌음에서 시작한다. 나중 이것은 보스가 감옥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또 계속해서 꼬이는 제리는 느긋이 공중에 매달려 빨간 빛을 내보이는 신호등에서 시작해 푸른 신호등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멕시칸>은 많은 복선과 모티브 그리고 반전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혀 있다. 이들이 배우의 힘을 입지 않고 자생하려 애를 썼다면 <앨 마리아치>나 <저수지의 개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들의 전례처럼 새로운 갱스터 로드 무비의 탄생을 알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스타들의 웃음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 : 2)
멕시칸
-생생함이 익숙함에 가리우다 (01. 04. 28)
@보라고 있는 별
‘스타’ : 스포츠 연예계에서 유명해진 사람을 지칭하는 한시적 용어. 우리는 별의 지겨운 영어표현을 번번히 그렇게 생각한다. 한없이 멀리서 반짝이는 밤하늘 별처럼 내일 또 다시 그들이 눈앞에 떠오르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어린시절 방안을 가득히 메웠던 젊은 스타의 사진은 한두살 나이를 먹어가며 지갑 속 구석에 가족이나 연인의 사진으로 대체된다.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허를 알만한 나이쯤, 아니 그만큼 현실적인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로버츠를 보기위해 <멕시칸>을 찾는 관객들은 분명히 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두 스타의 핀업 스틸 같은 멋진 모습이 아니라 움직이고 살아 생생한 캐릭터 자체다. 낯선 배우들과 달리 관객이 스타와 동일시를 소망하는 경우 감독의 이야기하기는 그만큼 쉬어진다. 두시간을 넘는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먼지 가득한 사막의 두 지역, 라스베이거스와 멕시코를 넘나든다. 어리숙한 갱 제리(브래드 피트)는 곧 출소하는 보스의 ‘멕시코에 가서 멕시칸이란 총을 받아오라’는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애인 샘(줄리아 로버츠)은 제리가 라스베이거스로 가자고 했던 약속을 어기자 다짜고짜 대판 싸운다. 그리고 둘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떠난다. 제리와 샘의 문제는 영화를 통해 샘이 계속 고민하듯이 ‘서로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샘은 바꿔 생각하지 못하고 제리는 설득하지 못한다.
고어 버빈스키감독의 데뷔작은 <마우스 헌트>다. 이제 디지털 쥐의 역할은 제리가 떠맡고 부족한 자리들은 스타라는 이름으로 채워 놓는다. 잠시라도 이야기가 삐걱거릴라치면 쓰윽 하고 웃으며 얼굴을 들이미는 브래드와 줄리아 앞에선 웬만한 빈틈이 사라지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거다. 당연히 하나로 시작해 둘로 나뉘고 다시 하나로 뭉치는 플롯은 두 스타간의 배분문제로 종종 흐름을 깬다. 예를 들면, 멕시칸을 찾고 잃고를 반복하는 제리의 위기는 때론 샘의 위기와 교차되지만-이것이 일상적인 맞춤이라면, 이 영화에서는-우스운 탈출극과 상담극에도 똑같이 맞붙어있다. 차차 샘은 끊임없이 사고해가는 탐구자로 변해가고 제리는 막판 반전을 노리는 도박사가 되지만 여지없이 마지막 자락은 맞아 떨어진다. 스타들의 웃음을 기다리는 관객을 위해 말이다.
@여행과 이해
로드무비의 특성은 여정을 통해서 변해가는 인물과 동행한다는 데 있다. 때론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막다른 길에 이르기도 하면서 변화와 결정의 시간을 선물한다. <멕시칸>은 정확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가는 영화다. 그런 면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중 가장 과격한 여성로드무비인 <너스 베티>와 묘한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샘은 라스베이거스로 떠난다. 약속을 어긴 제리와는 ‘이제 끝이다’를 되뇌이면서 연애소개서나 읽으며 유흥의 도시를 숨쉬려 한다. 그러던 그녀는 갑작스런 사건에 말려들어 변화의 전기를 얻는다. 화장실에서 그녀를 쫓아온 킬러와 조우한 것이다. 샘은 두명의 킬러가 바톤을 이어 받듯 바꾸어 납치 당하고 만다. 답답한 일상의 베티는 마약을 빼돌린 남편이 두명의 킬러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자신을 드라마 인물로 여기게 된다. 그녀는 드라마 속의 옛 애인을 찾아 떠난다. <멕시칸>의 샘이 자신이 꾸었던 현실적인 꿈을 찾아 떠났다가 킬러를 만나 과거를 되짚어 가는 것에 비해 <너스 베티>의 베티는 끔찍한 현실을 목격함으로 인해 꿈꾸던 이상을 쫓아간다. 그리고 둘은 자신들이 꾸었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샘은 킬러(제임스 갠돌피니)에게 납치당한다. 제리가 멕시칸을 넘겨주면 교환한다는 조건. 허나 샘은 망설임 없이 살인을 하고 탈출을 번개같이 봉쇄하는 전문 킬러와 마음을 나누는 계기를 만든다. 바로 식당에서 건너편 남자를 바라보던 킬러의 눈을 알아차린 것이다. 케빈 스미스의 <체이싱 아미>는 성과 성애의 차에 대한 논의를 시종일관 유쾌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결론을 놓고 이성애의 승리 혹은 동성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시시한 일이다. 젊은 남녀들의 대결구조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의제들에 얼마나 명쾌하게 다가갔느냐가 보다 나은 접근법.
<멕시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소재로서 동성애는 이미 차별된 시선으로 상처 받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게이가 변태성욕과 멀지 않다는 고정관념과 남성성이 강요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샘에게 사랑에 대한 워크샵을 펼친다. 냉혹한 킬러가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잠자리에 드는 과정은 여느 남녀관계와 다를 바 없다. 다음날 아침 킬러가 눈물을 글썽이며 타올 속에 나온 권총을 이해해준 상대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서로를 인정해가는 과정으로서 사랑을 고스란히 설명한다. 그리고 샘은 킬러의 값비싼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그래서 제리와 만난 후 달리던 멕시코의 도로씬은 이 영화가 품은 명쾌한 반전의 절정(Climax of Anticlimax)이다.
@주고 받기
제리와 샘 그리고 킬러는 나란히 앉아 도로를 달려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제리와 샘 사이에 킬러가 앉아 있다. 영화의 처음과 비슷하게 달리자마자 시작된 둘의 말싸움은 난폭운전을 유발한다. 셋은 중앙선을 넘어 달리다 오는 트럭을 피하고 비껴 간신히 도로가에 멈췄을 때 타이어가 펑크난 것을 알아챈다.
샘과 킬러가 사랑 상담을 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 제리는 납치된 샘의 곁에 있는 킬러가 악수 한번으로 심성이 착한 것을 알 수 있던 그 사람임에 안심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듯 너무나 인간적인 킬러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기대에 호응한다. 샘과 제리가 만나 말싸움을 시작할 때도 가운데서 이리저리 활로를 뚫으려는 킬러의 모습은 우유를 마시고 화초를 키우던 레옹처럼 ‘Good Bad Guy’로서 자리를 다진다. 하지만 멈춰선 차와 떠나는 샘 그리고 타이어를 교체하러 나온 제리의 삼각구조가 한발의 총성에 무너진다. 이 순간은 <식스센스>의 치밀한 반전처럼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해 요약화면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제법 멋지다.
영화의 갈등구조는 크게 제리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중간 보스 세이먼과 멕시칸을 가지러 간 제리와 담보가 된 샘으로-킬러와 샘은 중간에 하나가 되었으니- 요약할 수 있다. 적당히 균형을 맞춰야 하는 갈등의 주체들을 살펴보면 샘은 감성에 접근하는 반면 제리는 엉뚱함에 호소하고 이에 맛서는 세이먼의 비열함은 둘에 가려 흐릿해진다. 감독의 실수는 바로 이곳 영화의 미스터리적 특성을 시트콤 방식으로 덮어버렸다는데 있다. 감독은 갈등구조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포기하고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관객들은 그저 멕시칸이 어느 손에 들어갈 것인지를 러시안 룰렛의 긴장감이 아니라 복권의 기대감처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또, 곳곳에 자리한 설정의 생략–길가에 무덤을 만드는 제리나 전당포서 사라지는 고참 등- 은 때론 의미 없이 소비된다. 멕시칸의 행방과 샘과 제리의 안전 주위에 연달아 등장하는 변수들이 그저 밋밋한 에피소드 나열에 머무른다. 그렇다고 <멕시칸>이 김빠진 콜라 같은 기분 나쁜 단물인 것만은 아니다.
@신호등은 길을 정리한다
영화에는 세편의 극중극이 나온다. 바로 멕시칸에 얽힌 사연이 그것인데 이는 각각 보스의 손자, 비리 경찰 그리고 보스를 통해 제리에게 전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서부영화 스타일을 갖고 있다. 총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악당과 사랑이 자리하고는 설정에서 총쏘는 순간의 긴장과 목표가 되는 상대, 쓰러지는 순간들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여기에다 이 모두를 쓸어 담는 설정샷까지 있다. 단지 이것 뿐이라면 일상적인 플래쉬백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극중극들은 현실과 겹치는 몇가지 복선과 멕시칸에 부여하는 의미의 다층화로 인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제리는 멕시칸에 대한 이야기를 긴장감 가득한 술집 한 구석에서 처음 듣는다. 이야기 속의 멕시칸은 제작자의 실수로 뒤로 발사되도록 장치된 비정상적인 총. 한 장인의 작품으로서 총과 사람들의 경외감은 첫 격발의 영예가 주어진 청년의 죽음으로 깨어진다. 제리가 멕시칸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은 보스의 손자는 엉뚱한 총알에 뒤통수가 깨져 죽는 때와 맛물린다. 제리가 경찰에게 듣는 두번째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귀족과 결혼 선물로 제작되었다는 멕시칸은 질투가 담겨 있다. 제작공의 딸을 사랑하는 조수가 뒤로 나가도록 장치했다는 것이다. 정작 처음 총을 쏘는 사람은 귀족 아닌 동네 겁많은 사내. 경찰이 제리를 체포한 것은 죽은 보스의 손자를 앉혀 놓았던 의자의 핏자국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의도완 다르게 멕시칸의 새로운 이야기를 제리는 듣게 되고 다시 멕시칸을 잃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멕시코에 등장한 보스를 통해서다. 멕시칸은 감정에 따라 격발을 선택하는 신비한 총이라는 사실.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 앞서 멕시칸과 함께 시작한 보스 손자의 죽음은 정리되고 동시에 세이먼과 샘의 대결을 복선으로 깔아 놓는다.
또 하나 영화의 흐름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요소로 신호등을 빼놓을 수 없다. <멕시칸>은 신호등의 고장으로 사고가 나는 충돌음에서 시작한다. 나중 이것은 보스가 감옥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또 계속해서 꼬이는 제리는 느긋이 공중에 매달려 빨간 빛을 내보이는 신호등에서 시작해 푸른 신호등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멕시칸>은 많은 복선과 모티브 그리고 반전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혀 있다. 이들이 배우의 힘을 입지 않고 자생하려 애를 썼다면 <앨 마리아치>나 <저수지의 개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들의 전례처럼 새로운 갱스터 로드 무비의 탄생을 알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스타들의 웃음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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