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태극기 휘날리며> 아픈 가슴의 진원

열혈연구 2004. 2. 18. 00:41

태극기 휘날리며

-아픈 가슴의 진원

 

 

 한반도에 발을 딛고 지낸 것은 겨우 서른해를 웃돌 뿐이지만 피부에 와닿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는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좋고 싫음 같은 일차적인 감정의 표출뿐만 아니라 연대와 분열 같은 이차적인 감정의 흐름이 뚜렸하다는 말이다. 예전같으면 냄비의식이라고 비난했겠지만, 지난 월드컵을 치루며 얻은 국민적 자긍심은 이를 누리고 있는 듯 보인다. 인구 4800만의 나라에서 1000만 관객을 휘모는 영화가 등장할 수 있는 것도, 감정에 이끌리어 뭉치는 국민적 연대감이 적잖은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홍콩식 멜로귀신물을 우리문화와 접목시킨 <은행나무침대>로 신고식을 하고, 남북화해와 대치 상황을 가상으로 풀어낸 <쉬리>로 한국 영화에 산업이란 단어를 붙어놓은 장본인이었던 강제규 감독은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작의 요소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흡인력을 쫓아가는 본 글에서는 이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해본다. 그 첫번째는 영화에 깔려 있는 사상의 동질감이다. 영화의 바탕은 진태와 진석 형제의 50년 넘게 지속된 형재애이다. 그보다 근원적인 배경에는 군주, 신분제의 몰락으로 인해 생겨난 신분상승의 도구로써 공부와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가족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 부모의 품에 마지막 남은 아들을 돌려보내려 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가족의 안전을 위해 다시 총을 들고 일어선 <패트리어트> 같은 미국 영화와는 사뭇 다른 방향인 셈이다.

 

 진석이 서울대에 간다는 것은 남편을 잃고 실어증에 빠진, 노점에서 국수를 말며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의 꿈이자, 구두를 닦으며 멋진 구두 한 켤레 만든다며 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형 진석의 희망이다. 급속한 사회변화로 공부만이 유일한 상승의 돌파구였던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가 단순히 <태극기 휘날리며>를 반세기 지난 전쟁을 다룬 영화에 그치지 않게 하는 첫번째 열쇠이다.

 

 둘째로 진태와 진석 형제의 애증관계는 남북의 역사와 유사하게 겹친다. 오프닝을 지나 과거로 돌아간 첫번째 시퀀스는 구두를 닦는 형 진태와 학교에서 돌아온 진석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고 강제 징집된 진석을 살리기 위해 진태가 입대하는 에피소드와 잔인한 살상 병기로 변해가면서까지 동생을 제대시키려 무공 훈장에 연연하는 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유약한 휴머니스트 진석은 혁혁한 전과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진태의 잔인함에 가슴 아파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인 줄 알면서도 둘 사이에는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끝내 진태와 진석은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된다. 강대국들의 이해득실 하에서 불완전한 소통과 잘못된 정보가 비극을 양산했던 우리의 과거사처럼 진태과 진석 형제도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갈라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강제규 감독은 두 형제의 대립과 남한과 북한의 맞섬에 이데올로기가 아닌 민족애와 생존의 논리를 적용한다. 진태의 목숨을 구하려다 죽은 영만의 입을 통해, 목구멍에 풀칠하려 받은 보리쌀 두되에 사상범으로 몰린 영신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겪은 비극이 철학과 사상 같은 비장한 차원이 아니라 살려다 보니 끌려간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말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신의 전환은 이를 명백해 전달하고 있다. 광기에 휩싸여 총검을 휘두르던 진태는 진석이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진석의 형에 대한 호명은 가족이라는 고리를 통해서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태는 진석을 위해 아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사지에 남는다. 꿈이자 희망인 동생을 위해 살던 형의 모습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진태는 곧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총알의 무게에 쓰러지고 만다. 그런 채로 50년 넘게 흙 속에 묻혀 백골이 된 진태의 모습을 담은 두 신의 디졸브는 희망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형재애를 다소 거칠지만 화합의 꿈을 잃지 않는 민족애로 연결시킨다.

 

 마지막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극기 휘날리며>가 제공하는 재조명의 또 다른 측면이다. 얼마 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가 실화소설을 토대로 삼아 과거를 다루고 있는 것에 반해 <태극기 휘날리며>는 사건의 시발이 되는 6.25 전쟁 격전지 유적 발굴에서부터, 풀어나간 한 가족의 비극 전체를 가상의 기술로 구성했다. 가상의 사건을 통해 작가임의로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해내는 형태는 실제로 겪어 봄직한 사실성을 소유함으로써 어눌한 현실보다 생생한 가상현실로 변형가능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한반도 곳곳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보다 더한 피의 흔적이 여전히 선연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등장한 에피소드들처럼 가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광기에 휩싸여 살인을 자행하고, 끝내 그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이 땅에 서슬 퍼렇게 살아계신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뼛조각 하나로 백만년전 상황을 재구성해나가는 고고학처럼, 묘사의 사실성과 표현의 스펙타클함보다 논리적 고리의 연결로써 영화적 감동에 도달할 수 있다. 비록 여전히 치유중인 상처를 다시 후벼내는 진원이 상업적 가벼움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얽매어 있을지언정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고통과 향수 그리고 희망으로 버무린 <태극기 휘날리며>가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태복음 5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