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 리버 (2001-02-13)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진리에 대한 인류의 해답 찾기는 그 시작만큼이나 요원(遙遠)하다. 자연에서 시작해 신학을 거쳐 자아를 지나 관계를 넘어 과학과 상징을 통과하고 있지만 아무리 파 들어가도 나오지 않는 미지의 금맥처럼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여전히 탐구의 진행이다. 게르농 대학의 문턱에 ‘진리를 찾는 자는 기쁨을 얻으리라’ 쓰여있는 문구는 현시(現時)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완전한 만족을 은유적으로 내비친다. 그곳에 있는 그들 역시 그렇다.
마티유 카소비츠가 <증오>를 들고 칸느를 통해 지구를 날려버렸을 때 또 하나의 앙팡 테러블, 역류하는 프랑스의 젊음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스필버그를 모시고, 베스트셀러를 각색해 들고 온 <크림슨 리버>. 그런 의미에선 아쉬움에 틀림 없지만 애초 우리가 생각한 카소비츠는 자국의 젊은 감독을 애정어린 눈초리로 밀어올린 고명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이창동 감독의 우직함이 믿음직스러운 건, 홍상수 감독의 생생함이 기다려지는 건 우리 영화제의 선택을 계속해서 지켜 볼만한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하루면 수없이 살펴보는 육신이건만 언제나 충격적인 것 또한 사람의 신체다. <크림슨 리버>의 오프닝을 차갑게 식혀 놓은 시체 한 구는 숨죽인 듯 천천히 살피는 카메라의 근접사를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한다. 이른바 원 샷 미장센(one shot mise-en-scéne).
손목이 잘리고 두 눈이 뽑힌 채로, 늑골이 부러지고 심한 자상(刺傷)을 입은 한 구의 시체가 된 남자는 태아의 자세로 손발이 묶인 채 알프스 산 정상에서 발견된다. 사건을 해결하러 온 니먼(장 르노)은 경시청의 전설적인 베테랑 형사. 피해자가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사회, 게르농 대학의 교수 겸 사서임을 알아 낸 순간 깊게 맺어진 그들의 끈 속으로 한걸음씩 향해 간다.
제작사 고몽의 이름도 선명한 이 프랑스 영화는 우습게도 영어로 더빙되어 있다. 정확진 않겠지만 장 르노를 비롯한 몇몇만이 대사를 직접한 듯 하고 나머지는 유럽 악센트 가득한 영어로 배우들의 입을 입혀놓았다. 제목도 크레딧도 모두 영어로. 영화의 종주국이라 아무리 우겨도 문화적 자존심이 아무리 가득해도 그들 역시 거대 자본의 오락 영화 앞에선 단물을 발라 놓고 팔리길 기다리고 있는 형태. 지금 이순간 진리에 가장 접근한 것은 다름아닌 자본인지도 모른다.
@너희를
형사 아닌 경찰, 막스(벵상 카셀)는 기껏 공동묘지의 한 묘소에 하겐 크로이츠를 그려 놓은 훼손사건을 수사하러 왔을 뿐이다. 얼뜨기 경찰 두 명의 유치한 말싸움에 피식 거리면서 무덤의 주인인 소녀의 죽음을 찾으러 갈 때만해도 그랬다. 하지만 20년 전 차사고의 당사자에 대한 기록이 모두 도난 당한 것과 소녀의 정신 나간 어머니를 수녀원 깊은 곳에서 만난 막스는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사냥개처럼.
니먼과 막스는 모두 타자(他者)다. 대학과 마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지역 경찰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사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뿐. 카소비츠는 문화적 순수성을 포기하는 대신 홍세화씨의 말처럼 똘레랑스를 내세운다. 타자의 객관성을 인정하는 관대함은 사건해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든 이들이 니먼과 막스에게 끊임없는 지원을 베푸는 것으로 드러난다.
극중에서 번번히 등장하듯이-초반에 엉덩이를 흔들며 조롱하는 젊은 애들과 네오 나치들의 행동처럼- 프랑스에서 경찰의 위치는 형편 없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크림슨 리버>는 잘 포장된 수출용 문화상품이 틀림 없다. 집단으로서는 전형성밖에 남아있지 않을 지라도 변방의 집단 경찰은 선민의식의 집단으로 이미 알려진, 근친상간으로 인한 기형아가 속출한다고 보여지는 게르농 대학과 대립한다. 아니 그 대표들을 통해 대립의 형상만 남아있다. 당사자들의 입을 통한 결집력 이상은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는 형태로 말이다.
<증오>의 마지막만큼은 아니더라도 <크림슨 리버>의 초반부는 상당히 공들인 씬의 전환과 음악 배치에 대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들은 빙산에 숨겨진 변사체에 대한 의문과 베일에 쌓인 거대한 유사가족, 게르농 대학에 대한 소개에 적절한 효과를 보인다. 또 니먼과 막스를 오가며 사건의 병렬 진행이 접점을 찾는 방식과 그 안에서 언뜻 보이는 실마리로 인해 새로운 미스터리의 갈래를 알리는 듯 하다.
막스는 무덤을 훼손한 용의자의 집에 침입하려는 순간 니먼과 마주친다. 빙산 중턱 동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시체가 바로 그 집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연속해서 발견된 같은 방식의 살해는 모두 48시간 내에 일어난 근시점(近時點) 사건. 수사의 상당한 진척은 개들의 우량종을 실험한 흔적이 그대로 있는 이 집에서 이루어 진다.
아무런 설명을 생략한 채 태연히 나아가던 두 사건이 만나는 시점은 이미 시트콤에서도 사용될 만큼 흔해 그 이상의 부수효과를 낳진 않지만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하다. 게다가 이어지는 둘의 공동작업은 무뚝뚝한 베테랑 형사대 떠들썩한 신참 경찰의 불협화음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간다. 느와르의 옷을 입고서 말이다.
@자유케
<크림슨 리버>에서 가장 재기 발랄한 씬을 꼽으라면 단연 네오 나치들의 공간으로 쳐들어간 씬이다. 초반부터 계속 장면전환과 분위기를 조장하던 음악은 여기서 최전방, 바로 뮤지컬 액션에 도전한다.
막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샌드백과 당구대, 오락기를 마주한 채 놀고 있는 넷이 보인다. 모니터엔 당연히 격투기 게임이 언뜻 스쳐 지나가고 오히려 클리쉐에 가까운 ‘시비 거는 무리들과 권총 뺏지 내려 놓은 경찰의 대결’로 치닫는다. 여기서 음악은 격투 게임의 효과 음향을 토대로 질러대고 이들의 싸움은 게임의 동작을 그대로 연출한 듯 움직인다. 각각 두 번의 ‘게임 오버’를 외칠 때 까지.
카소비츠의 장난은 여기서 딱 멈춰 선다. 이후에 계속되는 막스의 행동은 이전까지 보였던 추진력 있는 탐문관에서 지시 받는 풋내기 경찰로 전락하고 니먼의 뒤를 종종 쫓는다. 멍청히 웃는 것과 많이 심각함, 졸리운 것과 무표정, 네 가지 밖에 없는 장 르노의 무게에 벵상 카셀이 묻혀버리는 식이다. 초반에 카셀이 가지고 있던 무게감은 촬영도중 빠지는 살과 사라진 주름과 자라지 않는 수염처럼 퇴행하고 만다. 자유로울 자는 자유로울진저.
<크림슨 리버>는 우생학을 기반으로 한 만큼 아니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음을 초반에 이미 다 알려준 만큼 주위에 숱한 인종 문제-하지만 이 세상에는 백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치의 가장 큰 적이 유태인이었던 것처럼 우생학을 다루는 그들에게 헴의 족속들이 자리할 곳은 음악을 빼곤 없다. 기획 당시 신참 흑인 형사였던 막스 자리를 벵상 카셀이 꿰어 찼다-를 늘어 놓지만 이것들은 코피 쏟고 총구 앞에서 우는 네오 나치녀석들처럼 장난에 가깝다.
사건이 발생하는 산악지대는 넓은 자연이지만 외부와 차단된 밀실에 가깝다. 대학의 구성원들, 아랫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빠져나가거나 변화를 주장하지 않아 왔고 않고 있다. 수녀원 안에 숨어 십칠년 째 살아가는 수녀가 된 소녀의 엄마처럼 상처로 얼룩진 영혼들은 어둠에 숨어 복수를 노리고 영주의 번듯한 자식들은 거짓으로 자신들을 가려 놓았을 뿐. 밀실에 갇혀 있는 모두는 조금의 소통도 보이질 않는다.
@하리라
딜레마는 둘을 뜻하는 그리스어 di와 가정을 의미하는 lemma의 합성어다. ‘두개의 가정’이라는 뜻. 두개의 가언명제를 제1전제로 하고 그것의 전건 둘을 선언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제2전제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추론을 말한다. 즉 서로 어긋나는 가정이 존재하는 경우 이 추론은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우생학 연구는 어느 선에서 이루어 졌는가?’와 ‘살인자는 누구인가?’라는 <크림슨 리버>의 두 가지 가정은 연구의 핵심부에 살인자의 칼날이 가해져야 하는 수순을 밟지 않고 그저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초반 탐정물에서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를 거쳐 재난 영화로 마무리 할 때까지 미스터리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는 ‘궁금해 한 모든 것의 명확한 해결’이라는 중요 과제를 충족하진 못한다. 미스터리 영화는 의문의 고리가 숱하게 꼬여 있을 지라도 해답을 알아낸 후에는 술술 풀리는 실타래 같아야 하는 것.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 것은 잘못된 구성을 내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이런 면에서 <크림슨 리버>는 감독이 의도한 미스터리 스릴러 보다 코미디를 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시리즈에 오히려 가깝다. 사건의 실마리를 니먼의 곁에서 제공하는 파니의 역할이 이런 생각을 확고하게 한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학교를 싫어하고 부모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니먼에게 단서를 흘려 자신을 이해하게 해달라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적어도 니먼이 곡향성(曲向性:contrivance)의 짐을 지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살리는 정도는 했어야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영웅의 구출로 마무리하는 고전 멜로드라마의 극적구출(last minute rescue)를 빼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파니의 존재는 유일하게 여성성을 지니고 있지만 철저히 소비되는 상업영화의 한계점이고 <투캅스>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점이다.
프랑스의 영화 혈통은 열성인자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외부 유전자 이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칸느의 일회용 수장을 맡아 본 뤽 베송 만큼 아직까지 카소비츠가 영악해지진 않았을 지라도 그것은 단지 나이의 차이일지 모른다. 그들의 등반경로 정상에 자리한 스필버그를 향하기 위해선 이런 발걸음을 앞으로도 계속 종종거릴 것으로 보인다. 문화의 자존심 마지막 보루에 근접한 프랑스의 갈 길도 그것이라면, 문화의 다양성 쟁취를 내세운 모순된 행동양식이 이것이라면 아니 우리도 그들처럼 걸어가고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 : 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진리에 대한 인류의 해답 찾기는 그 시작만큼이나 요원(遙遠)하다. 자연에서 시작해 신학을 거쳐 자아를 지나 관계를 넘어 과학과 상징을 통과하고 있지만 아무리 파 들어가도 나오지 않는 미지의 금맥처럼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여전히 탐구의 진행이다. 게르농 대학의 문턱에 ‘진리를 찾는 자는 기쁨을 얻으리라’ 쓰여있는 문구는 현시(現時)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완전한 만족을 은유적으로 내비친다. 그곳에 있는 그들 역시 그렇다.
마티유 카소비츠가 <증오>를 들고 칸느를 통해 지구를 날려버렸을 때 또 하나의 앙팡 테러블, 역류하는 프랑스의 젊음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스필버그를 모시고, 베스트셀러를 각색해 들고 온 <크림슨 리버>. 그런 의미에선 아쉬움에 틀림 없지만 애초 우리가 생각한 카소비츠는 자국의 젊은 감독을 애정어린 눈초리로 밀어올린 고명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이창동 감독의 우직함이 믿음직스러운 건, 홍상수 감독의 생생함이 기다려지는 건 우리 영화제의 선택을 계속해서 지켜 볼만한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하루면 수없이 살펴보는 육신이건만 언제나 충격적인 것 또한 사람의 신체다. <크림슨 리버>의 오프닝을 차갑게 식혀 놓은 시체 한 구는 숨죽인 듯 천천히 살피는 카메라의 근접사를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한다. 이른바 원 샷 미장센(one shot mise-en-scéne).
손목이 잘리고 두 눈이 뽑힌 채로, 늑골이 부러지고 심한 자상(刺傷)을 입은 한 구의 시체가 된 남자는 태아의 자세로 손발이 묶인 채 알프스 산 정상에서 발견된다. 사건을 해결하러 온 니먼(장 르노)은 경시청의 전설적인 베테랑 형사. 피해자가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사회, 게르농 대학의 교수 겸 사서임을 알아 낸 순간 깊게 맺어진 그들의 끈 속으로 한걸음씩 향해 간다.
제작사 고몽의 이름도 선명한 이 프랑스 영화는 우습게도 영어로 더빙되어 있다. 정확진 않겠지만 장 르노를 비롯한 몇몇만이 대사를 직접한 듯 하고 나머지는 유럽 악센트 가득한 영어로 배우들의 입을 입혀놓았다. 제목도 크레딧도 모두 영어로. 영화의 종주국이라 아무리 우겨도 문화적 자존심이 아무리 가득해도 그들 역시 거대 자본의 오락 영화 앞에선 단물을 발라 놓고 팔리길 기다리고 있는 형태. 지금 이순간 진리에 가장 접근한 것은 다름아닌 자본인지도 모른다.
@너희를
형사 아닌 경찰, 막스(벵상 카셀)는 기껏 공동묘지의 한 묘소에 하겐 크로이츠를 그려 놓은 훼손사건을 수사하러 왔을 뿐이다. 얼뜨기 경찰 두 명의 유치한 말싸움에 피식 거리면서 무덤의 주인인 소녀의 죽음을 찾으러 갈 때만해도 그랬다. 하지만 20년 전 차사고의 당사자에 대한 기록이 모두 도난 당한 것과 소녀의 정신 나간 어머니를 수녀원 깊은 곳에서 만난 막스는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사냥개처럼.
니먼과 막스는 모두 타자(他者)다. 대학과 마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지역 경찰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사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뿐. 카소비츠는 문화적 순수성을 포기하는 대신 홍세화씨의 말처럼 똘레랑스를 내세운다. 타자의 객관성을 인정하는 관대함은 사건해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든 이들이 니먼과 막스에게 끊임없는 지원을 베푸는 것으로 드러난다.
극중에서 번번히 등장하듯이-초반에 엉덩이를 흔들며 조롱하는 젊은 애들과 네오 나치들의 행동처럼- 프랑스에서 경찰의 위치는 형편 없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크림슨 리버>는 잘 포장된 수출용 문화상품이 틀림 없다. 집단으로서는 전형성밖에 남아있지 않을 지라도 변방의 집단 경찰은 선민의식의 집단으로 이미 알려진, 근친상간으로 인한 기형아가 속출한다고 보여지는 게르농 대학과 대립한다. 아니 그 대표들을 통해 대립의 형상만 남아있다. 당사자들의 입을 통한 결집력 이상은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는 형태로 말이다.
<증오>의 마지막만큼은 아니더라도 <크림슨 리버>의 초반부는 상당히 공들인 씬의 전환과 음악 배치에 대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들은 빙산에 숨겨진 변사체에 대한 의문과 베일에 쌓인 거대한 유사가족, 게르농 대학에 대한 소개에 적절한 효과를 보인다. 또 니먼과 막스를 오가며 사건의 병렬 진행이 접점을 찾는 방식과 그 안에서 언뜻 보이는 실마리로 인해 새로운 미스터리의 갈래를 알리는 듯 하다.
막스는 무덤을 훼손한 용의자의 집에 침입하려는 순간 니먼과 마주친다. 빙산 중턱 동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시체가 바로 그 집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연속해서 발견된 같은 방식의 살해는 모두 48시간 내에 일어난 근시점(近時點) 사건. 수사의 상당한 진척은 개들의 우량종을 실험한 흔적이 그대로 있는 이 집에서 이루어 진다.
아무런 설명을 생략한 채 태연히 나아가던 두 사건이 만나는 시점은 이미 시트콤에서도 사용될 만큼 흔해 그 이상의 부수효과를 낳진 않지만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하다. 게다가 이어지는 둘의 공동작업은 무뚝뚝한 베테랑 형사대 떠들썩한 신참 경찰의 불협화음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간다. 느와르의 옷을 입고서 말이다.
@자유케
<크림슨 리버>에서 가장 재기 발랄한 씬을 꼽으라면 단연 네오 나치들의 공간으로 쳐들어간 씬이다. 초반부터 계속 장면전환과 분위기를 조장하던 음악은 여기서 최전방, 바로 뮤지컬 액션에 도전한다.
막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샌드백과 당구대, 오락기를 마주한 채 놀고 있는 넷이 보인다. 모니터엔 당연히 격투기 게임이 언뜻 스쳐 지나가고 오히려 클리쉐에 가까운 ‘시비 거는 무리들과 권총 뺏지 내려 놓은 경찰의 대결’로 치닫는다. 여기서 음악은 격투 게임의 효과 음향을 토대로 질러대고 이들의 싸움은 게임의 동작을 그대로 연출한 듯 움직인다. 각각 두 번의 ‘게임 오버’를 외칠 때 까지.
카소비츠의 장난은 여기서 딱 멈춰 선다. 이후에 계속되는 막스의 행동은 이전까지 보였던 추진력 있는 탐문관에서 지시 받는 풋내기 경찰로 전락하고 니먼의 뒤를 종종 쫓는다. 멍청히 웃는 것과 많이 심각함, 졸리운 것과 무표정, 네 가지 밖에 없는 장 르노의 무게에 벵상 카셀이 묻혀버리는 식이다. 초반에 카셀이 가지고 있던 무게감은 촬영도중 빠지는 살과 사라진 주름과 자라지 않는 수염처럼 퇴행하고 만다. 자유로울 자는 자유로울진저.
<크림슨 리버>는 우생학을 기반으로 한 만큼 아니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음을 초반에 이미 다 알려준 만큼 주위에 숱한 인종 문제-하지만 이 세상에는 백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치의 가장 큰 적이 유태인이었던 것처럼 우생학을 다루는 그들에게 헴의 족속들이 자리할 곳은 음악을 빼곤 없다. 기획 당시 신참 흑인 형사였던 막스 자리를 벵상 카셀이 꿰어 찼다-를 늘어 놓지만 이것들은 코피 쏟고 총구 앞에서 우는 네오 나치녀석들처럼 장난에 가깝다.
사건이 발생하는 산악지대는 넓은 자연이지만 외부와 차단된 밀실에 가깝다. 대학의 구성원들, 아랫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빠져나가거나 변화를 주장하지 않아 왔고 않고 있다. 수녀원 안에 숨어 십칠년 째 살아가는 수녀가 된 소녀의 엄마처럼 상처로 얼룩진 영혼들은 어둠에 숨어 복수를 노리고 영주의 번듯한 자식들은 거짓으로 자신들을 가려 놓았을 뿐. 밀실에 갇혀 있는 모두는 조금의 소통도 보이질 않는다.
@하리라
딜레마는 둘을 뜻하는 그리스어 di와 가정을 의미하는 lemma의 합성어다. ‘두개의 가정’이라는 뜻. 두개의 가언명제를 제1전제로 하고 그것의 전건 둘을 선언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제2전제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추론을 말한다. 즉 서로 어긋나는 가정이 존재하는 경우 이 추론은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우생학 연구는 어느 선에서 이루어 졌는가?’와 ‘살인자는 누구인가?’라는 <크림슨 리버>의 두 가지 가정은 연구의 핵심부에 살인자의 칼날이 가해져야 하는 수순을 밟지 않고 그저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초반 탐정물에서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를 거쳐 재난 영화로 마무리 할 때까지 미스터리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는 ‘궁금해 한 모든 것의 명확한 해결’이라는 중요 과제를 충족하진 못한다. 미스터리 영화는 의문의 고리가 숱하게 꼬여 있을 지라도 해답을 알아낸 후에는 술술 풀리는 실타래 같아야 하는 것.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 것은 잘못된 구성을 내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이런 면에서 <크림슨 리버>는 감독이 의도한 미스터리 스릴러 보다 코미디를 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시리즈에 오히려 가깝다. 사건의 실마리를 니먼의 곁에서 제공하는 파니의 역할이 이런 생각을 확고하게 한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학교를 싫어하고 부모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니먼에게 단서를 흘려 자신을 이해하게 해달라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적어도 니먼이 곡향성(曲向性:contrivance)의 짐을 지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살리는 정도는 했어야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영웅의 구출로 마무리하는 고전 멜로드라마의 극적구출(last minute rescue)를 빼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파니의 존재는 유일하게 여성성을 지니고 있지만 철저히 소비되는 상업영화의 한계점이고 <투캅스>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점이다.
프랑스의 영화 혈통은 열성인자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외부 유전자 이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칸느의 일회용 수장을 맡아 본 뤽 베송 만큼 아직까지 카소비츠가 영악해지진 않았을 지라도 그것은 단지 나이의 차이일지 모른다. 그들의 등반경로 정상에 자리한 스필버그를 향하기 위해선 이런 발걸음을 앞으로도 계속 종종거릴 것으로 보인다. 문화의 자존심 마지막 보루에 근접한 프랑스의 갈 길도 그것이라면, 문화의 다양성 쟁취를 내세운 모순된 행동양식이 이것이라면 아니 우리도 그들처럼 걸어가고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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