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인랑] 실제로 사실처럼

열혈연구 2001. 1. 10. 11:27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인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각본과 제작을 맡은 오시이 마모루를 집고 넘어가자.
1995년 <공각기동대>로 SF 애니메이션으로도 철학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는 프로덕션 IG의 대표다.
유명한 <기동경찰 페트레이버>의 사실주의,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오가는 넓은 활동범위는 한 대수의 격랑을 한풀 접은 듯한 그의 모습과 함께 재패니메이션의 스펙트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가시광선이라면 파장이 작은 자외선 계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극찬 속에 명예의 전당에 올려진 <공각기동대>는 필자에게 시로우 마사무에의 원작보다 '쿨'하지 않다.
명랑으로 잔뜩 치우쳤다가도 두 번만 읽으면 혼란함이 길을 찾는 원작에 반해,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과 바트, 고스트와 인형사의 자아 찾기 싸움은 혼란하기 그지없다.
원작이 가진 최소한의 디제시스를 손상하면서 활동성을 통한 설정의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맹목이 진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성장으로 일어서던 1960년대 일본의 가상 역사. 도시 깊숙이 자리잡은 반군세력을 막기 위해 조직한 수도경의 특기대는 오랜 진압으로 대치가 소요상태에 이르자 무용론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반군세력은 지하로 잠입해 섹트를 조직하고 후방에서 시위조작과 폭탄테러를 실행한다.

<인랑>에서 다루는 가짜 역사 SF는 철저히 사실에 가까운 표현으로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실험한다. <그린치>류의 실사 애니메이션 영화의 반대에서 콘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처럼 실현 가능한 카메라 워크와 등신대에 초상화를 얹은 인물 묘사, 배경의 사실적 질감은 특수 필터를 씌운 채 찍은 실사 영화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적 표현이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질문이 이르면 명확한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선 새로운 방식이라고만 해두자.

섹트를 쫓아 지하도에서 작전을 펼치던 특기대 요원, 후세 가즈키는 폭탄 운반책인 어린소녀를 발견하고 사살을 망설이다 자살 폭발에 휘말린다. 징계 위원회를 통해 훈련학교로 강등된 현실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눈앞에서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폭사한 소녀의 환영이다. 정보국 동료를 통해 죽은 소녀의 정체를 쫓아가는 후세 앞에 소녀와 꼭 닮은 언니 아마미아 케이가 나타난다.

<인랑>은 이중 첩자로 살고있는 아마미아와 본래의 야성을 찾아낸 후세의 로맨스를 동화 「빨간 두건」을 소녀의 죽음으로 연결시킨 대입법과 함께 비슷한 비중에 담으려 노력한다.
허나 핏기 없는 살색과 무표정한 군상들처럼 로맨스는 불꽃이 없고, 죽음에서 시작한 대입법은 처절하지 않다.
한순간이나마 사랑했던 이의 절규를 등에 지고, 차갑게 친구의 가슴에 무수한 총구멍을 내어놓는 후세의 냉정함은, 아마미아의 가슴에 또 다른 구멍을 남겨 소원과 달리
가슴에 그녀를 묻을지라도, 그러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눈물이 흐를지라도 차갑기
만하다.

이와 비슷하게 엄마의 살과 피를 먹은 빨간두건소녀가 늑대와 한 침대에 누워 커다란 입 속으로 점점 옮아가며 하는 질문들과 후세, 아니 그가 속한 특기대 안의 비밀단체, 인랑의 환상이라 할 수 있는 늑대들에 살점을 내 맡기는 죽은 소녀 환영의 교차편집은 극중 인물의 심리는 흐릴 수 있을지언정 화면 밖으로 뛰쳐나오지는 못한다.

<인랑>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냉혹한 인물들의 심리극이 아니다. 이미 숱한 영화와 만화에서 다룬 맹수 조련사와 다름없는 후세의 교관 한나의 역할과 아귀가 맞지 않는 살인기계 인랑의 정신적 혼란은 로맨스, 대입법과 함께 극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일 뿐이다.


정작 전체를 이어가는 것은 영화초반 나레이션의 친절한 설명처럼 국가 내부를 지탱하는 공권력 단체들의 세력싸움이다.
이 안에서 결국 소모 당하는 이들이 98분 동안 줄지어 쓰러져 누워갈 뿐이며, 당연히 인물들의 혼란이나 결정은 가상의 역사를 흔들어 놓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물들의 감정 여하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인랑>은 그런 면에서 애니메이션 산업 그 자체를 반영한다.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흐름을 찾지 못한 채로도 스토리가 연결되고 콘티가 애니메이트하게 되는 힘없는 개인과 체제의 강력함을 특기대의 비밀단체 인랑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가끔 우리는 눈에 띠는 것들 때문에 착각을 하기도 한다. <쉰들러 리스트>의 빨간색 소녀처럼.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