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튜브> 슬픈 오락

열혈연구 2003. 6. 9. 21:08
튜브
-슬픈 오락



우여곡절 끝에 개봉관에 걸린 <튜브>는 몇 가지 이유로 기대를 자극했습니다. 실은 번번이 규모에 몰락하고 말던 우리 영화의 생존에 대한 염려가 앞섰습니다. 결과적으로 <튜브>는 제게 두 번의 한숨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나는 감독의 말처럼 “제작비가 고스란히 화면 안으로 옮겨 온 것”을 넘어서는 가능성으로 인한 안도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가 잊어가는 과거에 대한 애도의 한숨이었습니다. 터널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항상 행복한 일상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공항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선글라스와 검은 슈트차림의 강기택은 꽃다발 속에서 총을 꺼내 난사한다. 한바탕 총격전 후, 인질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특수부대의 포위 속을 빠져 나오는 강기택 일당. 그들 중 하나가 저격수를 향해 총쏘는 시늉을 하면 장착해둔 폭탄이 터진다. 또 다시 총격전. 이때 장도준 형사가 뛰어들어온다. 도준은 공항 안으로 뛰어든 벤을 타고 도망가는 강기택의 동료 등에 총알을 박아넣는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오랜 만에 찾아온 대 테러 액션 영화 <튜브>의 시작은 할리우드 이벤트 영화 공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쉬리>의 모양새와 꼭 닮아 있다. 초반 5분,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 잡는 전략은 공항 내 총격전으로 제 역할을 해낸다.

대규모 폭발로 시선을 끄는 이벤트 영화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순간은 살아 있는 캐릭터이다. <튜브>는 지하철 테러라는 큰 줄기 하에 중심인물을 구성하고, 주변의 가지를 뻗친 후 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배치함으로 인해 입체적인 스토리 형성에 노력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장도준을 진심으로 위하는 형사반장과 신부를 지하철에 태운 통제사 그리고 딱딱한 표정만으로 조폭 같은 정치인을 보여준 송총리가 그들이다. 반면 지하철에 탑승한 인물들은 희미한 존재감 만을 남긴다. 봉태규가 연기한 도준을 돕는 고딩, 권오중이 연기한 면도날, 공익요원, 비겁한 보좌관, 남포동이 연기한 초로의 승객 등은 배치라는 면에서는 적절했으나 결과적으로 송인경의 입체성을 위해 희생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간으로 우위를 가리자면 장도준, 송인경, 강기택에 이어 통제실의 권실장 정도가 상위권을 차지한다. 이들은 각각 테러 저지(혹은 강기택에 대한 복수), 사랑을 위한 헌신, 권력에 대한 복수, 상황 통제이라는 임무 수행을 위해 118분 동안 어두운 지하에서 질주한다.

먼저 강기택은 5공시절 특수부대였던 로두스 출신. 현재 총리인 송일권이 만들었으나 세계인권위의 압력으로 팀이 강제 해체되는 바람에 동료와 아내를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세 명의 동료와 시작한 테러전은 송총리 개인을 향한 것이다. 그는 수천 지하철 승객과 송총리의 목숨을 교환하고 싶어하나 총리는 이를 거절한다. 강기택의 대사는 일방적이다. 그는 상대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쏟아 놓는다. 소통하는 인간으로서 강기택은 이미 해체된 로두스와 함께 사라진 듯 보인다. 박상민이 연기한 강기택이 시종 딱딱한 표정과 대사를 유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140km/h로 질주하는 전철에서 떨어지면서도 무게를 잃지 않는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화염 속으로 들어가던 터미네이터처럼 굵은 목소리로 한마디 남길 뿐이다. “애송이 이게 끝이 아니야.”

강기택이 국가의 배신으로 테러를 시행한 인물이라면, 장도준은 강기택에 대한 분노로 국가에 헌신하고 있는 인물이다. 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과 독불장군식의 추진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역시 독백을 일삼는 도준의 모습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도준은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닌다. 강기택에게 살해당한 애인과 한 약속 때문이다. 방에 가득한 선인장, 인경이 왔다간 흔적에 그는 말한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마.”

소매치기인 송인경이 등장해 독백으로 채워가는 모든 씬은 <중경삼림>의 냄새를 풍긴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클로즈업, 원색이 풍부한 색감은 그녀가 하는 마술처럼 현실에서 한걸음 올라서 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연결 고리는 흐릿하고, 철저히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그녀의 영혼은 오직 도준을 향해 있을 뿐이다. 인경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 도준을 위해 움직인다. 이러한 설정은 흔히 신파적이기 쉬우나 백운학 감독은 그녀를 함정에서 건져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만신전(萬神殿) 에 올려 놓는다. 이는 상대적으로 획일화를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지하철 승객들 덕분인데, 백 감독의 선택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녀가 쏟아내는 말은 시처럼 반짝여서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보다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같은 대사도 전혀 닭살스럽지 않다.

통제실의 권실장은 놓치기 쉬운 <튜브>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고, 시민의 생명을 우선하며,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파악하고, 유사시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이상적인 공무원상이다. 어쩌면 목숨을 걸고 달리는 지하철 승하차를 반복하는 장형사보다 슈퍼맨에 근접한 인물이다. 권실장은 테러와 대 테러 그리고 이를 유발한 권력의 어두운 면을 헤드 셋 하나로 연결해 놓는다. 종종 균열할 위험에 처한 세가지 상황들은 권실장을 통해 고리를 맺고 안정을 찾는다. “가끔, 아주 가끔은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전동차도 있단 말일세.”는 그의 대사는 영화를 열고 닫는 문과도 같다.

연속된 폭발씬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연하는데 노력하는 <튜브>는 한편으로 누선(淚腺) 자극에 힘을 쏟는다. 이른바 한국식 흥행영화 공식인데, 코미디에서 액션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멜로 코드를 포함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장 형사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시퀀스는 적절한 촬영과 편집이 어울려 빛을 발한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감추고 싶어한 송총리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를 살리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하철 승객의 희생을 결정한다. 이에 반한 권실장은 지하철을 공사구역으로 몰고, 장 형사는 자신의 희생으로 남은 승객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보다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요”라던 인경의 말이 선로 저편에 묻히기도 전에 장 형사는 주전력 차단 스위치가 있는 운전칸으로 옮겨갈 것을 결정한다. 이제껏 죽도록 고생한 장형사가 죽음으로 뛰어드는 이 순간, 살기 위해 머뭇거리며 물러서는 사람들의 비겁함은 감정이입에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터전을 마련한다.

통제실에서는 반장이 “내 새끼가 목숨을 버리는 것 내가 다 알고 있다고!”하며 절규하고, 권실장은 마지막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헤드 셋을 올려 든다. 이때 잠깐 보이는 무표정한 송총리의 모습은 ‘흥분->절제->무감각’ 순으로 이어지며 줄어드는 노출 시간을 통해 감정선의 방향을 잡는다.

지하철에서는 인경이 도준에게 “못 가, 다른 사람 가라고 해!”라며 소리친다. 흔들리는 카메라는 둘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바스트에서 시작한 쇼트는 회전과 동시에 울고 있는 얼굴이 스크린을 채울 때까지 조금씩 인물에게 다가선다. 포옹하는 인경과 도준. 이때 카메라는 이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다 멈칫 돌아서 얼굴 클로즈업에서 멈춘다. 이어 수갑을 채우는 손, 운전칸으로 넘어서는 도준의 모습을 담는다. 도준의 희생을 막으려하는 인경과 이를 냉정히 떨쳐야 하는 도준의 심경을 회전하는 카메라와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이 씬은 다음에 연결된 이별 씬과 맛물려 빛을 발한다.

먼저 서로 다른 량에 서서 마주한 둘을 롱 쇼트로 측면에서 담는다. 두 량 사이로 바람처럼 지나가는 어두운 공간들은 다가섰으나 결코 넘을 수 없는 간극으로 자리한다. 도준과 인경은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전철을 멈추기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다. 인경의 얼굴은 곧이어 보여지는 전철의 이음새로 인해 사랑했던 도준을 손수 보내야 할 운명을 담아낸다. 배두나의 넘치지 않은 연기는 연인을 살리고 싶으나 희생을 인정해야 하는 인경의 배반적인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해낸다. 인경의 손에 의해 두 량은 서로 멀어진다. 카메라는 둘의 심정을 잡으려는 듯 고속촬영으로 시간을 늘리는데, 촬영하는 청년의 캠코더를 통해 다시 한번 당겨져 보여지는 도준의 마지막 모습은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는데 마침내 성공한다.


“할리우드의 공식을 연구하면서 영화를 구성했”다는 백 감독의 솔직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현실은 <튜브>가 가벼운 흥행영화로 잊혀지는 것을 방해한다. 하나는 영화 초반에 발생한 스탭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였다. 함께 영화를 만드는 동료가 다친 혼란한 상황에서도 촬영을 해야만 했던 백 감독의 결단은 슬프기 그지 없다.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거대한 슬픔의 실체는 대구에서 발생한 참사이다. 영화 중반 지하철이 강제로 멈춰 서자마자 바깥으로 뛰어 나오는 승객들의 모습은 그들이 느꼈을 공포보다 커다랗게 가슴을 찌른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현실은 허구를 장악한다. 인경은 생환의 기쁨만이 자리한 반쪽짜리 현실에 대고 “결국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그리고 기억만 남는다.”고 말한다. 그녀가 사탕을 꺼내 입에 넣으면서 “그가 내게 보여준 희미한 미소. 그 달콤한 기억 하나면 돼.”라고 되뇌면, 도준은 마술처럼 살아나 그녀에게 미소를 보낸다. 동시에 그를 작게 가두는 검은 공간이 어두운 기억을 후벼낸다. 슬픈 오락이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 4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