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피쉬
-거짓말쟁이 어른에 대한 가장 귀여운 변명
<빅 피쉬>에는 세 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어른이 나온다. 영화는 한 명의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무덤에 가기까지 전 과정을 보여주고, 또 다른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그를 이해해가며, 또 다른 어린이가 자라가는 것에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관계는 할아버지 아들 그리고 손자이다. 영화 속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허풍’으로 인해 발생하고 펼쳐진다.
<빅 피쉬>는 크게 두 개의 시간대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시간대가 존재한다. 하나는 아버지인 에드워드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현재이다. 파리 주재 뉴스위크 기자인 아들 윌은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이다. 아버지의 거듭되는 거짓말 때문이다. 지금 윌은 에드워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있다. 생이 얼마 남지 않는 아버지께 화해를 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또 하나는 에드워드의 유년기부터 장년기에 이르는 시간이다. 이 시간대는 주로 에드워드가 겪은 현실과 허풍이 뒤섞여 있는데, 그와 윌이 3년 전 다투고 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간대에 펼쳐진 이야기들 때문이다. 영화는 이곳에서 본연의 환상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윌이 에드워드에게 다가가려 하듯이 실제와 환상은 마지막에 이르러 결합을 시도한다. 두 개의 시간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시간대는 미묘하게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낸다.
제 삼의 시간대는 다름아닌 아들인 윌의 어린시절이다. 이야기는 수 십년 동안 같은 형태였을지언정 윌이 자라나면서 이야기들은 하나씩 말도 안 되는 허풍으로 변질되어 다가왔고 에드워드를 미워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에드워드가 윌에게 캠프와 침대 머리 맡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이 시간대가 극히 짧게 소개되는 것과는 반대로 일상생활에서 수 백번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팀 버튼은 현재에서 이야기 속의 과거로 뛰어드는 이 시간대를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부자간의 대립항을 극대화한다. 나아가 에드워드와 윌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가장 친근한 한 때였던 이 순간을 극히 짧은 시간으로 표현해 비루한 현재와 환상적인 과거의 대립을 명확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허풍으로 구축된 심리적 물리적 장벽이 놓여있다. 먼저 아버지의 허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들이 지구 반대편 파리로 떠났다는 것이 이를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다.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아들이 돌아온 지금, 둘의 사이에 놓여 있는 과제는 죽음까지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의 피를 나눈 부자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팀 버튼은 엉뚱한 방식을 택한다.
<빅 피쉬>는 미스터리물 형태의 진실을 찾아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거절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 속과 현실을 넘나드는 다소 번잡한 진행을 이룬다. 관객은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쳐낸 팀 버튼의 세계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해야만 한다. 그러다가 윌이 수영장의 물풀을 걷다가 커다란 물고기를 보면서 아버지의 이야기와 현실의 접점을 찾아가자 추리소설의 결말처럼 이야기는 매끄럽게 마무리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팀 버튼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시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버린다. 폭우 속을 달리던 에드워드의 자동차가 어느덧 물 속에 있고, 여인의 모습을 한 물고기가 그의 앞을 헤엄쳐간다. 이튿날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자동차와 옛 시절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것은 허풍의 필수 조건인 ‘정확히 꿰어맞추기’와 다를 바 없다. 즉 팀 버튼은 <빅 피쉬>를 이야기해나감에 있어 에드워드가 윌에게 들려주었던 것처럼 커다란 허풍 속에 자잘한 실재를 호두과자 속의 호두처럼 놓아 논 것이다.
<빅 피쉬>의 카메라는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초반 인물의 시점쇼트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양들의 침묵>에서 조디 포스터가 살인범의 지하 작업장을 다니던 쇼트처럼 종종 인물의 팔은 프레임의 좌우로 뻗쳐 나와 전방을 지향한다. 물 속에서 물고기가 뒤에서 앞으로 헤엄치는 오프닝 신에서부터 에드워드가 마녀집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신, 거인이 양을 잡아먹는 신, 에드워드가 뼈가 즐비한 거인의 굴을 찾아가는 신 등 영화의 초반 시점쇼트가 자주 보인다. 팀 버튼은 허풍과 환상 속으로 접근하는 영화의 초반부에 이러한 시점쇼트를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 인해 관객이 에드워드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탄생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윌이 아버지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꿈을 가진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정확한 시퀀스이다. 이미 윌은 냉정한 현실을 택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드가 꿈꾸는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해준다. 병원을 박차고 나가 에드워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환영에 가까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물고기로 변해 떠나가는 장면은 중환자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과 교차된다. 에드워드와 관련되어 펼쳐지던 앞의 이야기들이 철저히 사실처럼 포장된 허풍이었음에 반해, 이 시퀀스는 냉정한 물리적 죽음 앞에 있는 인물이 찬란한 심리적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윌의 이야기를 통해 에드워드의 허풍은 비로소 현실과 만나게 되고 완성을 이루는 셈이다.
에드워드의 일생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찾을 수 있는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평생을 꿈꾸며 살았고 또 그 꿈을 이루려 노력했으며 적어도 그것들을 이루었다고 여기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아내 산드라를 얻는 이야기는 여기에 가장 맞아 떨어진다.
서커스장에서 그녀를 본 에드워드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서커스 단장의 말에 보수도 없이 서커스 팀에 합류한다. 사자의 입에 머리를 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사이에 서 있으며, 표창이 날아와도 사랑에 빠진 그는 두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단장은 아주 작은 정보만을 넘겨준다. 그리고 그는 노예처럼 또 일을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란 인물 역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삼촌 라반 아래서 이십년을 봉사한다. 성경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인물로 표현되는 야곱은 실제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어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에드워드 역시 이미 친구의 약혼녀인 산드라를 얻기 위해 노력과 온 몸을 바친다. 노란 수선화 위에서 그녀의 확답을 받은 그의 표정은 영화의 마지막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짓는 웃음과 그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건네는 얼굴과 정확히 겹쳐진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에 꼭 필요한 것은 사랑과 가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팀 버튼이 내어놓은 어른 되는 과정에 대한 첫 번째 고백이다. 이제 세상에서 사라진 악동, 어른이 된 팀 버튼은 <빅 피쉬>를 통해 세상의 일을 풀어내는 데는 논리보다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가슴이 답답한 시대에 샘물처럼 다가오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세기 37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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