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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 어둡고 침침한 인물 열전

열혈연구 2015. 12. 7. 19:06


(본 글은 스포일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내부자들> 안에 담긴 사건들의 본말을 아는 게 두려우신 분들은 절대 읽지 마세요!)

 

 

 

여는 말

 

<내부자들>은 우민호의 전편들과 다르다. 벼르고 벼른 칼 같은 영화다. 최근 한국영화의 주류가 되어버린, 사회비판은 기본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배우들의 호흡과 차진 대사는 감탄을 자아낸다. 픽션인 극영화에 본 영화는 허구입니다라고 밝혀야 하는 아이러니도 그대로다.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90분을 추가한 감독판이 벌써부터 보고 싶을 정도다. 정치-경제-언론-검찰로 이어지는 유착은 끔찍하고, 결말은 통쾌하다. 재미있게 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찬사로 맺음하려던 의도가 갑자기 염려스러워졌다. <내부자들>이 품고 있는 퇴행이 보였기 때문이다.

 

 

 

손에서 입으로

2시간 넘는 한국영화를 숨가쁘게 지켜본 것도 오랜만이다. 최근에 개봉한 어떤 영화보다도 짙은 나쁜 남자 냄새도 흥미롭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남자들이 계획하고, 이루고, 운영하는 더러운 세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선과 악이 아닌 차악과 최악, 두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마치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 보이지만, 누구하나 깨끗하지 않다. 선의지의 발현은 흔적조차 없다.

 

차악에 속하는 인물에는 검사 우장훈(조승우)과 깡패 안상구(이병헌)가 있다. 이들의 적들이 최악에 해당한다. 조국일보 주간 이강희(백윤식), 거물 야당정치인 장필우(이경영) 그리고 미래그룹 회장 오현수(김홍파). 최악은 입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다. 입은 머릿속에 조합된 생각을 드러내는 기관이다. 직접 움직이기 보다는 명령한다. 반대로 손은 실행체다. 뇌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생각을 드러내기 보다는 있는 것들을 움켜쥐려 한다. 차악과 최악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장훈은 안상구와 방계장을, 안상구는 박사장과 주은혜를 조정한다. 손이 입으로 옮겨가는 형태다.

 

감독이 입이라면, 배우는 손이다. 영화제작에서 생각은 머리에 해당하는 감독이 담당한다. 배우는 그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실행하는 손에 가깝다. <내부자들>에서는 유독 영화 이야기, 그것도 연출과 관련한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각본을 담당한 감독의 자기반영적(self-reflexive)인 노출이다. 안상구는 영화는 개봉도 못했는데…”하고 잔금을 받으러 온 주은혜에게  말한다. “그게 배우 탓인가? 감독 잘못이지!” 실패한 계획에 대한 주은혜의 변명이다. 상업적으로 실패한 우민호의 자학유머 같기도 한 이 대사는 둘의 관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주은혜는 안상구에게 새 의수를 준다. 안상구는 이제 입이 아닌 손이 된다. 그는 망한 영화의 감독 자리에서 내려와 검사 우장훈의 배우가 된다.

 

<내부자들>은 관객의 사고력을 느슨하게 만든다.  않은 시간 구분도 그 방법 중 하나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대략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숫자가 작을수록 연대기적으로 앞부분에 해당한다).

 

안상구 기자회견(현재 1) –

안상구 팔의 절단(과거2) –

잘나가던 시절의 안상구(과거1, Flashback) + 안상구의 첫번째 반격(과거3)-

감옥에 갇힌 안상구(현재2)-

안상구의 두번째 반격(현재3)

 

미래그룹과 장필우의 정경유착을 고발하는 첫번째 기자회견 시퀀스는 안상구가 문일석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시퀀스와 연결되어 있다. 둘 사이에는 그 흔한 몇 달전이라는 자막도 없다. 방금 전에 없다고 한 상구의 오른손이 등장한다. ‘의수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나?’라는 착각을 유발한다. 물론 이 헛된 의심은 무섭게 몰아치는 사건들 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과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이 같은 고민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어진다.

 

<내부자들>은 관객의 이해력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충격적인 사건, 수많은 이름 그리고 끓임없이 이어지는 대사는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거나 아귀가 맞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입에 붙는 대사, 긴박한 흐름 그리고 친절한 음악 덕분이다. 대신 영화를 보며 사고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인물들의 똑똑한 머리싸움을 보면서 관객은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 그 바보됨의 흔적으로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쌍팔년도에나 어울림직한 성역할을 들 수 있다.

 

 

 

족보 없는 수컷들

<내부자들>의 남성은 독특하다. 이들은 한 가정의 가장, 아이들의 아버지 또는 한 여자의 남자가 아니다.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은 고독하고 외롭다. 우정도 사랑도 없다. 질펀한 술자리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나누는 대화는 없다. 이들은 욕망을 상징하는 유형에 가깝다. 오회장을 물욕의 상징으로 본다면, 조금씩 다른 의미로 장필우, 이강희, 우장훈, 안상구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장필우가 절대적 권력이면, 이강희는 그 이면에서 조정하는 권력이다. 우장훈은 정의실현이라는 표면적인 명분을 통해 출세라는 권력을 소유하려 한다. 안상구는 권력자들의 뒤치닥거리를 마치고 권력 다툼의 전면에 등장하고 싶어한다.

 

상징적인 인물설정은 곧바로 그림자나 거울에 해당하는 또 다른 인물들로 연결된다. 먼저 여론을 조작하는 이주간에게는 고기자가 있다. 미래그룹 오회장에게는 타락한 조양식 사장이 있다. 장필우는 검사출신 유력 대선후보다. 검찰 조직에서 성공하지 못한 그의 과거는 우검사의 현재와 겹친다. 조직이 버린 우검사는 안상구의 모습과 연결된다. 안상구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배신을 마다하지 않는 깡패 박사장과 겹친다.

 

<내부자들>은 가족애, , 의리, 사랑 등 한국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들과 거리를 둔다. 남자들은 서로 인간적인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모두가 서로를 등쳐먹으려고 안달이다. 이들 중 누구도 여성과 함께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도 없다. 물론 부자나 형제에 준하는 설정은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믿음은 없다.

 

먼저 장필우와 우검사는 아버지와 아들 같다. 족보없는 검사였던 장필우가 정계에 몸을 담게 된 이유는 진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 출신 우검사가 겪는 괴로움과 정확히 일치한다. 멀리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로 이어지는 외디푸스의 궤적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배신한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낙향한 아버지는 우검사의 뒷통수를 친다. 우검사는 자신을 받아들인 장필우의 권력에 칼을 꼽는다. 우검사가 푸념처럼 반복하는 족보 없는이라는 표현은 흙수저처럼 아버지의 무능함을 의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이 대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치는 부장검사 앞에 무릎을 꿇으며 조직을 위해 개처럼 살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족보 없는 놈의 행동에 가깝다.

 

족보 없기로는 이강희와 안상구도 만만치 않다. 둘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이주간은 장필우의 정치인생을 만들어준 아버지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그에게 의리란 없다. 오회장에게 장필우와 안상구를 팔아 넘기는 데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주간의 사무실에는 무괴아심이라고 적힌 액자가 있다.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이주간의 행동은 이 경구대로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다. 글로써 세상을 희롱하는, 곡학아세의 전형이다. 필력을 자부하는 그가 안상구와 마지막 대결시 사용하는 것도 연필이다. 흔히 언론의 책무를 감시견(watch dog) 같다고 한다. 시민의 부름을 받아 타락한 권력을 향해 날카롭게 짖어야 하는 게 언론이다. 그러나 이강희로 대표되는 <내부자들>의 언론은 슬프기 그지 없다. 성대가 잘려 짖지 못하고, 생식기능도 잃어 버린 반려견이다. 족보도 없어 비싸게 팔 수도 없다. 그저 주인에게 꼬리만 흔드는 게 전부다.

 

 

 

생산하지 못하는 암컷들

가족 없이 고독한, 족보 없는 수컷들에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남은 것은 욕망이 뿐이다. 특히 성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진다. 이강희, 장필우, 오회장 심지어 우검사까지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신다. 이들은 종종 벗은 여자들과 웃고 즐긴다. 성기를 휘둘러 폭탄주를 제조한다. 그렇게 추하게 나눈 폭탄주로 이들은 하나가 되고자 한다.

 

<결혼이야기> 이래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적잖은 발전을 거듭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인 여성이 영화 전면에 나서는 영화들도 적잖다. 그런데, <내부자들>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욕망에 철저한 남성들과 달리 그녀들은 온전히 사용된다. 입도 손도 아닌 오직 몸만 존재한다. 그것도 도시를 가득메운 성형외과 광고처럼 솟은 가슴과 다듬어 놓은 얼굴로만 등장한다.  그녀들은 지위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인 옷과 장신구를 벗어 제낀다. 후손을 만들어낼 수 없는 남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더러운 육체를 모시고 받아들인다. 그들의 입은 생각을 내어 놓는 발화의 매체가 아니라, 오로지 외부의 것, 타락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에 그친다.

 

그렇게 장식에 가까운 그녀들 사이에서 주은혜는 생명력이 있는 여자다. 그녀는 <내부자들>에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유일한 여성이다. 영화 속에서 배신하지 않은 단 한명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안상구의 손이다. 그의 부탁으로 장필우의 더러운 실체에 접근한다.

 

다른 남자 인물들과 달리 안상구는 여자를 탐하지 않는다. 성기 중심으로 형성된 족법 없는 남성의 카르텔의 경계에 위치한다. 그는 단 한번도 여자들을 소모하지 않는다. 젊은 여자들을 권력자들의 발 아래 보내주긴 하지만, 절대 강제하지 않는다. 그녀들도 스스로 원하는 듯 웃으며, 벌거벗은 술자리로 들어간다. 안상구는 군주를 섬기기 위해 남성성을 거세한 내시 같다. 대신 <사기>를 쓴 사마천처럼 자신의 목표를 위해 모든 좌절을 무시한다. 남아 있는 왼손으로 먹는 라면과 소주는 자기파괴적인 안상구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출세였던 그의 욕망은 사라진 오른손과 함께 복수로 변한다.

 

주은혜는 안상구에게 하나의 선물과 한가지 제안을 한다. ‘몰디브 가서 모히또나 한잔 하자는 제안은 한가하고 나른한 이미지다. 치열한 이들의 삶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히 이 제안에 대한 미래는 없다. 선물은 안상구가 오회장에게 빼앗긴 오른팔이다(이 의수는 나중 안상구의 목숨을 살린다!) 거세된 상구는 그녀의 선물은 받고, 제안은 거절한다. 주은혜는 그의 볼에 입맞추고 떠난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주은혜에게 몰디브와 모히토의 사치는 주어지지 않는다. 명예도 없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성매매 전직 아이돌 가수라는 오명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여성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순정녀/어머니로, 쌍팔년도 이전 대부분 영화를 장악했다. 같은 해 선보인 첫번째 할리우드직배영화는 <위험한 정사>였다. 전문적이고, 집요하며,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알렉스(글렌 클로즈)의 모습이 이후 한국영화 여성상을 대표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한국영화속 여성들은 남성들이 구축한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민호 감독은 주은혜 단 한 인물을 통해 그간 한국영화가 보여준 모든 여성상을 대변한다. 주은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몸을 바친다. 또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를 위해서 애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필름 누아르의 팜므파탈과 다를 바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부자들>의 여성상은 아마도, 최근 20년간 가장 후퇴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나가는 말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내부고발자 이다.  각각 재벌과 정계의 개노릇을 했던 깡패 안상구와 검사 우장훈이 주인공인 셈이다. 입이자 머리노릇을 하는 이강희, 장필우, 오현수는 이들을 위한 들러리다(감독보다 배우가 돋보이는 <내부자들>과 같은 형태다). 결국 영화는 다시 둘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안상구와 우장훈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고 여기는 순간, 다시 튕겨져 일어난다. 내부 고발은 조직이 가장 썩었을 때 일어난다. 이득이 고발자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 두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안상구와 우장훈은 결국 악의 고리들을 끊어낸다. 결과는 이들이 꿈꿨던 최초 욕망, 출세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족보 없는 이 둘에게 출세는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를 한잔해야 겠다는 안상구의 말처럼 결코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내부자들>이 논한 것은 정의가 아니다. 헐벗은 여자들을 소비하며 살아남은 두 수컷의 욕망이다. 멀리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나누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에는 회환도 아픔도 걱정도 없다. 결코 채워지지 않은 욕망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