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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 케이퍼무비의 숭고미

열혈연구 2015. 7. 31. 22:17

케이퍼 필름’, 본의 아니게 또 다시 감독의 영화사 이름을 언급한다. 의도와 상관 없이 맨 처음 뜬 크레디트라 눈에 띄었다. 최동훈은 자신의 영화사를 훔치거나 빼앗는 과정을 다루는 범죄영화의 하위장르로 이름지었다. 케이퍼무비, 하이스트(Heist:강탈) 필름이라고도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최동훈은 반사회적인물이 행하는 범죄를 다루는 재주가 탁월하다. 전작 모두가 그렇다. <범죄의 재구성>(2004)에서부터 3, 4년 간격으로 선보인 모든 영화들은 사기, 도박, 도둑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암살> 역시 케이퍼무비다. 제목이 주는 자극, 독립운동의 무게, 친일파에 대한 증오를 덜어내면, 범죄의 과정과 행위에 집중한 영화가 보인다. 주인공들이 우선 반사회적 인물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현행법상 범죄자다. 시대의 법과 체제를 거스르는 체제전복자다. 이들의 건너편엔 일본군과 친일파로 대표되는 체제지지자들이 있다. 특히 암살 대상인 친일파들은 동시대의 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회적인 인물들이다. 내러티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암살단의 암살작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제/친일파의 대결이다. 결국 체제와 규칙을 파괴하고 골탕먹이는 범법자들을 다룬 감독의 전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까닭은 설정 자체에 있다. 1911년에서 1949년을 가로지르는 시대의 엄중함은 관객의 섣부른 판단을 짓누른다. 특히 공들인 인물 설정은 곱씹을수록 맛이 드러난다. 안옥윤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거대한 나무의 가지들처럼 펼쳐 있는 형상이다.

 

결혼식날 아침, 옥윤은 삼면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은 참 의미심장하고 특이한 대상(objet). 보통 대상을 바라볼 때는 대상 자체가 시선의 목표다. 거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거울을 보기 위해 거울을 보지 않는다. 거울을 향한 시선은 대부분 그 안에 반사되어 있는 시선의 주체(subjet)를 보기 위해서다. 또 거울은 주체를 여럿으로 확장할 수 있다.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자아의 분열을 드러내는 데 이만한 오브제가 없다.

 

얼굴 좌우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삼면거울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원래 삼면거울은 삼면화(triptych)에서 온 것이다. 교회의 제단화에 사용된 이 양식은 중심 그림과 양쪽의 부가 그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름의 어원처럼 접을 수(ptyx : fold) 있는 그림이다. 접었을 때와 펼쳤을 때가 다르며, 중앙과 측면의 그림이 다르다.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표현이 가능한 것이 삼면화다.

 

삼면 거울 앞에서 옥윤은 분열된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어제의 옥윤과 오늘의 옥윤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물론, 일제에게 억울하게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자신의 유모임도 이제야 알았다. 창씨개명한 언니 미츠코보다 더 한 건 친일 사업가인 아버지다. 친어머니와 언니를 죽인 이다. 옥윤이 죽여야 할 암살의 대상이기도 하다. 옥윤은 웨딩드레스를 입을 예정이다. 암살하기 위해 미츠코의 결혼식장에 간다. 신랑은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인 장교, 시아버지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이다. 친아버지와 시아버지 그리고 신랑까지 죽여야 한다. 부케에 총을 숨겼다. 자신이 죽는 건 뻔한 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괴로운 상황인가!

 

칸트가 말한 숭고미(sublime)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두려움이 밀려나와 불쾌함을 느낀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쾌로 변한다. 경이로움과 외경으로 바뀌는 아름다움이 숭고미다. 영화 <암살>에 대해 숭고를 말하기엔 송구스런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영화가 다룬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를 탓하며, 겨우 88만원 밖에 없어 벌고, 일곱가지를 포기하는 우리네 젊음에 비하면, 그들의 삶은 숭고미에 근접한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조상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이 거대한 신념 앞에 경외로움을 느낀다.

 

특히 하와이 피스톨과 옥윤의 관계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유사하고,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다. 둘은 모두 친일파 아버지를 가졌고, 그들을 죽이려 했다. 둘 모두 아버지의 성()마저 버린 사람들이다. 하와이 피스톨은 옥윤에게 도망가라 제촉한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묻는다. 옥윤은 답한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되냐고? 그래도 알려줘야지. 계속 싸우고 있다고처참히 깨진 가족 대신 사라진 조국을 택한 윤옥의 말이다. 법과 인륜을 거스르는 그 신념의 크기는 비겁한 내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 또한 숭고미다.

 

관객에게 익숙한 장르영화의 형태로 이러한 경이로움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암살>은 소명을 다했다. 정의의 여신 디케의 눈은 가리워져 있다. 만인 앞에 평등하고자 가린 눈이지만, 실제로 법은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지 못한다. 독립운동가들은 눈먼 법이 밝히지 못한 정의를 실현코자 한 범법자다. 친일파는 여신의 눈을, 그녀의 칼날과 저울을 피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합법행위자다. <암살>은 영화 내내 불법의 숭고함과 합법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안중군은 테러리스트’,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의 망언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 같은 히틀러 암살 모의자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에 참여한 학생들도,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가도 모두 테러리스트다.  <암살>도 그냥 범죄영화다. 그것도 갱영화와 서부영화를 이리저리 뒤섞어 놓은 싸구려 케이퍼무비다.

 

 

 

 

사족 1.

최동훈은 임상수의 조감독 출신이다.  임상수는 휠므빠말에서 괜찮은영화를, 최동훈은 케이퍼필름에서는 범죄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감독의 제작사 이름은 옛 시절 별호(別號)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듯 보인다.

 

사족 2.

김구가 염대장을 의심하고 있을 때, 암살단은 경성역에 도착한다. 이때 일장기를 향한 국기에 대한 경례 의식이 진행된다. 시대정신에 기대어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같은 오락영화인 <국제시장> <암살>의 시선이 정확히 갈리는 지점이다. 배급사 쇼박스의 운명은 <암살>의 흥행성적과 희비쌍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