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전히 살고 있다. 적어도 부모님 앞에선 그런 척한다. 반대로 친구, 연인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척, 턱없이 강한 척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보여주고 싶은 나를 융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다.
또 혼자 있을 땐 끝없이 불안해 한다. 결정장애에 귀차니즘까지 한심하기 그지 없다. 감추고 싶은 그림자(shadow)에 가깝다. 삶을 취사선택하고 실행하는 자아의 실체는 친구나 연인에게 보여준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부모님께 ‘됐어’, ‘알아서 할게’, ‘뭘 안다고’, ‘왜 그래’… 말을 쏟아내는 잘난 자식의 모습도 진짜는 아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부터, 제법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 우리의 양면(페르소나와 그림자)을 가장 많이, 깊이 들여다 본 사람들이다. 우리의 사람됨(wholeness)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다.
피트 닥터가 사춘기를 맞은 자신의 딸을 보며 기획했다는 <인사이드 아웃>은 한 친절한 부모의 육아일기처럼 읽힌다. 내 자식 키우기도 힘든데 남의 자식 키우는 방법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세가지 측면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그렇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첫번째 장점을 단순의 미학이라 부르자. ‘이사와 전학이라는 외적 변화가 소녀 라일리에게 끼치는 내적 영향’. 조금 어렵게 정리한 영화의 주제다. 짧고 명료하다. 스토리도 간단하다. 고향과 옛 친구가 그리운 라일리의 하룻 저녁 이야기다. 복잡한 플롯도 없다. 영화는 오직 라일리가 겪는 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많이 들어본 심리학관련 지식들이 쏟아진다. 의식, 무의식, 전의식, 장/단기 기억, 꿈의 재료와 조작, 상상과 잠재의식, 사고와 생각, 인격형성 등 숱한 지식들이 등장한다.
‘쉬운 것을 쉽지 않게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인 것만은 아니다’ 참 불편한 문장이다.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긴 쉽다’는 뜻이다. 내가 타인이 아닌 이상 상대의 생각을 온전히 아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에 정리가 덜된 생각을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풀어내면 난감하기 그지 없다. 반대로 어려운 것을 쉽게 이해시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어려운 개념이니 스스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파악했더라도 쉬운 전달을 위해 내용을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인사이드 아웃>은 ‘사춘기 소녀의 심리변화에 대한 소고’라고 이름지어도 어색하지 않은 심리학 연구서 같은 영화다. 그런데 전혀 어렵지 않다. 이보다 쉽게 연구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피트 닥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을 기쁨, 슬픔, 분노, 혐오, 두려움으로 단순화한다. 여기에서 두번째 반짝이는 점이 보인다. 바로 슬픔의 미학이다. 부모님이 연습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건, 내가 아빠가 되고 나서였다. 모든 게 낯선, 새로운 순간들이 시작됐다. 온전히 준비된 척했을 뿐, 초짜 아빠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엔 두려움이 컸다. 말귀도 모르는 아이에게 자지 않는다고 화낸 적도 있다. 똥묻은 엉덩이를 손으로 닦아줘도 역겹지 않았다. 첫 출장지에서 아이가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칸영화제의 화려함도 슬픔으로 금새 바뀌었다. 아들은 둘이 되었고, 훌쩍 자랐다. 그렇게 9년 가까이 지난 시간을 한 단어로 정리하라면, 기쁨을 꼽겠다.
라일리의 마음 한 가운데에도 기쁨이 자리하고 있다. 차분한 슬픔이 중심에 있는 착한 엄마, 다혈질 버럭이가 가운데 있는 아빠와 다른 형태다. 라일리의 마음처럼 긍정주의가 세상을 이끌던 때가 있었다. 성장과 풍요가 핵심 가치였던 시절이다.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 사고 방식이 세상을 밝게 이끌어 간다고들 주장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며, 웃음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지내던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억지 웃음보다는 슬픔을 인정하는 태도라는 걸. 2400년을 지나 소크라테스에게로 돌아간 셈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의지도, 노력도, 긍정도 아닌 인정이다. 새로운 시작은 남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내가 아프다는 것을,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가능하다.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을 받아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색깔을 통해 이 감정의 뒤섞임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이 영화의 장점은 아름다움 그 자체에 있다. 특히 원색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한 디자인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전작인 <업>의 풍선들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감정 없는 예쁜 풍선보다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기쁨(노랑), 슬픔(파랑), 까칠(초록), 소심(보라) 특히 버럭이의 빨강색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해낸다.
감정이라는 존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정은 표현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의 박동,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땀, 얼굴근육의 수축과 이완작용처럼 신체의 내부에서 외부로, 스스로 드러나는 감정이 있다. 더불어 일기장에 써내려간 글, SNS에 사용하는 이모티콘,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처럼 도구를 활용해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감정도 있다. 이러한 감정들을 읽고, 해석하고, 대응하는 것이 소통이다. 소통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원색과 무채색,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소통 과정을 설명한다. 마음을 닫았던 라일리가 부모의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일어나는 외면과 내면의 상황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인사이드 아웃>은 부모들에게는 육아참고서로, 젊은이들에게는 교육지침서로, 아이들에게는 상상동화책으로 삼을 수 있다. 교육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관객의 이성이 아닌 감성에 접근한다. 감정을 다룬 영화인만큼 감정으로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청소년시기처럼, 논리가 아닌 감정으로 사람과 사건을 다룬다.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를 통해 이미 55년 전에 했던 일이다. 새롭지는 않다. 인간관계에 대한 감정 스위치를 잠시 꺼놓은 사람이라면, 슬픔이처럼 한없이 처지고 지루할 수도 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오락과 예술, 상업과 독립 외에 영화를 가르는 또 하나의 기준을 찾아낸다. 이제 영화는 머리에 호소하는 시네마 사피엔스와 마음에 매달리는 시네마 에모티오(emotio)로 갈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