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아멜리에> 흥미로운 퍼즐 맞추기

열혈연구 2001. 11. 26. 10:55
이번 주엔 때 지난 영화 <아멜리에>입니다. 혹시라도 보지 않은 신 분들에게 이 글을 부칩니다. 늦은 가을 따뜻한 그러면서도 깔끔한 기분을 누리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감독은 주네는 <델리카트슨 사람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로 기괴한 상상력을 보였던 프랑스의 감독입니다. <에일리언4>를 통해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의 영화는 단풍든 가을처럼 풍성한 색깔을 자랑합니다. 주네라는 이름이 낯설은 분들에게 <아멜리에>는 주네에게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지도 모릅니다.

시의 운율은 시인이 세심하게 골라낸 어휘에서 생겨난다. 그것이 일상어, 고어, 처음 듣는 조어이든 간에 시인의 심장을 지나면 하나의 물결이 된다. 장 자끄 주네의 <아멜리에>는 한편의 유쾌한 연애시 같다. 하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인과성으로 똘똘 뭉친 퍼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상황과 배경이 꼼꼼하게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지그소 퍼즐을 맞추는 방식은 대략 이렇다. ‘밑그림을 꼼꼼히 살펴본다.-> 모퉁이부터 조각들을 맞춰나간다.-> 그림을 완성하고 흐뭇해한다.’ 조각을 맞추고 있는 순간을 현재라 한다면 밑그림은 과거, 완성된 퍼즐은 미래라 할 수 있다. 밑그림을 파편화 한, 알 수 없는 모양의 조각들이 하나씩 관계를 형성해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처럼 <아멜리에>의 씬들은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배치해간다.

타이틀 씬을 살펴보자. 어린 아멜리는 색종이와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귀여운 장난은 다음 씬을 통해 재해석된다. 아버지의 오진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그녀가 친구 없이 쓸쓸히 놀던 모습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아멜리에>의 초반부는 아멜리에게 발생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함으로써 어린 시절에 대한 기본적인 조각을 제시한다. 영화는 그녀의 현재를 예측 가능할 즈음, 망설임 없이 25살의 아멜리로 훌쩍 넘어간다.

<아멜리에>는 동일시를 통해 관객이 이야기 구조에 직접 뛰어드는 영화들과는 다른 궤도를 택한다. 내레이션을 도입해 파리의 아멜리와 한국의 관객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내레이션은 많은 등장인물과 많은 사건들을 소개, 예견, 연결, 정리한다. 여기서 내레이션은 어릴 적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임을 알리듯 아멜리는 장난스레 종종 카메라를 바라본다. 나아가 아멜리는 취미, 행동을 통해 유아성(주: <아멜리에>의 내러티브는 2차 성징 이전의 여성에 발을 맞춘다. 이는 아멜리의 유아적 취향-물수제비 띄우기, 파이 껍질 부수기 등-에서 엿보인다. 나아가 섹스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서도 확연하다. 당연히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성적 요소들-카페화장실에서 섹스는 물론 니노가 다니는 섹스숍마저-은 피핑톰(Peeping Tom)이 걸린 병, 관음증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성적 환타지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아멜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수녀의 이미지와 같은 지향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소녀의 바람,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설레는 첫사랑일 뿐이다.)을 드러낸다. 이 내래이션의 전지성과 대립한다. 둘의 주도권 다툼은 전자를 극의 중반에 후자를 전후반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타협점을 마련한다. 반드시 해피엔딩이던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아멜리와 니노의 만남은 행복한 필연의 틀(주:아멜리는 다이애나의 죽음을 알리던 뉴스를 보다가 첫 번째 임무를 생각해낸다. 주네의 영화에서 죽음은 이처럼 시작과 동의어인 경우가 많다.-그런 측면에서 볼 때, <에일리언4>는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답게 가장 쉬운 주네의 재생관(再生觀)을 담고 있다.- 달리 말하면 '죽음-재생'의 고리는 필연성과 비슷하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 존재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아멜리에>의 필연적 낙관주의는 근거는 이곳에 있다.) 속에서 선연해진다.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던 아멜리와는 달리, 니노는 말썽꾸러기 친구들로 괴로워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니노는 놀이공원의 유령연기자, 포르노 숍의 점원이다. 그의 취미는 시멘트 위에 찍힌 발자국 사진찍기, 버려진 증명사진 모으기이다. 어린시절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입었던 니노는 청년이 되어서도 사람의 실체와 접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 니노의 취미가 사진과 관련되어 있는 점은 유념할만하다. “오직 사진만이 인간의 부재를 효과적으로 이용한다.”는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그의 사진첩은 사람들과 거리두기이자, 그들의 좌절을 모아놓은 죽은 박물관이다.

반면 아멜리의 직업은 사람을 잇는 장소인 카페의 종업원이다. 아멜리는 손님에게 주문한 커피를 건네듯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분주하다. 그녀는 자신을 매개(mediation)로 삼음과 동시에 비디오, 전화, 편지, 광고, 사진, 그림 같은 매체(media)들을 통해 상대의 꿈에 접근한다. 그렇게 아멜리는 니노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어색하지 않게 멀리서 조금씩 속내를 보이며 그의 과거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소통(communication)에 도달한다.

120분 동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아멜리에>의 운율은 충분히 자극적이다. 전작의 흔적이 남아있는 카메라와 상상력, 전작보다 밝아진 색감과 분위기는 자극을 관객 위에 연착륙시킨다. 주네는 필모그래피의 목록을 늘여가면서 ‘주네스러움’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진행형 감독이다. 그의 재능은 사람들의 소망을 알아내던 아멜리의 재능처럼 날카롭고 기발하다. 포복절도와는 다르게 관객에게 다가서며, 입주위를 서서히 귀에 걸어주는 행복한 재능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분하게 하려함이니라. (요한복음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