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달마야 놀자> 야단법석

열혈연구 2001. 11. 19. 13:31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린 것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모잡지에서 개최한 행사의 일환으로 특별시사회를 통해 본 것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올리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공개합니다.-풋, 무슨 머시기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군요. 하하.

저는 우리 영화 잘되는 게 하나도 배아프지 않답니다. ^^






달마야 놀자
- 야단법석(주:野壇法席, 惹端법석 혹은 惹端法席라고도 적는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야외에 마련한 불법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 ‘자리’는 특정한 날에 아녀자들까지 몰려와 법당이 비좁아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요즘은 주로 시끌벅쩍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깡패들이 사찰로 피신한다는 <달마야 놀자>의 설정은 경건한 자리와 시끄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야단법석의 중의성과 비슷하다. 철저하게 관객의 재미를 바라면서 깨달음과 화해를 절정에 올려놓은 것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사냥꾼 같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 야단법석에 모인 수가 300만이었다는데... )



편가르기는 아니지만, 코미디 영화를 둘로 나눠보자. 능동과 수동 코미디. 잣대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상황을 유발하느냐, 상황이 주인공을 끌어가느냐는 구분이다. 전자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에서 로완 아킨슨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성룡이나 짐 캐리로 조금 변형된 슬랩스틱 액션 코미디를 말한다. 능동 코미디의 성패는 스타에 달려있다. 후자는 TV 시트콤이 주를 차지한다. 영화에서 찾자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주유소 습격사건> 식의 캐릭터 영화가 가깝다 하겠다. 수동 코미디는 인물 소개와 상황제시가 있는 초반부가 관건이다.

박철관 감독의 데뷔작 <달마야 놀자>는 수동 코미디로서 첫걸음을 무난히 뗀다. 상대파를 습격하다 실패한 재규 일당이 절로 피신을 결정하는 씬의 앞 뒤 편집은 신인 감독의 재기가 돋보인다. 쫓기는 재규 일당의 위기 의식은 '형님'을 운(韻) 삼아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증폭된다. 이들의 정서가 봉고차라는 갇힌 공간을 통해 강박증에 이를 때, 툭하고 물꼬를 트는 것이 바로 날치의 한마디이다. "머리 깎고 중이나 되면 모를까, 인생 종친거라구요!" 순간 울리는 범종 소리에 이어 잠깐의 암전이 흐른 후, 재규 일당은 산사에 태연히 서있다.

절로 피신한 재규 일당은 곧바로 임무를 나눠 작업에 들어간다. 몇 안 되는 컷으로 상황을 설명한 것처럼, 열명이 넘는 주요 인물들을 깡패와 승려로 둘씩 짝지어 소개하는 것은 충분히 효과적이다. 카메라도 인물과 상황의 유쾌한 제시에 앞장선다. 힘의 논리에 따라 앙각에서 시작해 부감으로 향하는 카메라 각도는 인물들의 변화를 쉽게 드러낸다. 또 369게임이나 막내의 무용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을 공간이나 인물 뒤에 숨김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에 "스님, 습니까?" 식의 재치 있는 말장난도 한몫 거든다.

씬이나 시퀀스를 단기전이라고 한다면, 한편의 영화는 장기전이다. 박 감독은 단기전에서의 장점을 몇가지 이유로 극대화시키지 못한다. 먼저 적절하지 않는 플롯이 열심히 쌓아올린 공든 탑을 흔드는 오류를 범한다. "하기로 한 건 지킨다!"며 청명을 구하는 재규의 단호함은 날치와 막내의 에피소드로 인해 무너진다. 주먹싸움에서 지고 조직에게 배반당한 재규의 비장미가 청명의 포용력과 어울려 커다란 화해를 낳는 바로 그 지점에 엉뚱한 불순물이 들어간 셈이다. 또,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산중 패싸움 씬에서 엿보이는 연출력의 부족은 아쉽다. 감독은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담기 위해 각개 접근을 시도한다. 이는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않아서, 차례로 주먹을 날리는 배우들은 면접 순서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어색하다. 마지막으로 헛웃음을 강요하는 츄리닝과 기본적인 대사조차 웅얼거리는 동자승, 착한 미소만 흘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연화는 삐걱거리는 캐릭터 배분의 대표격이다.

그런 면에서 감추듯 살포시 내밀어 놓은 나무의 모티브는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자라서, 낳고, 죽어서, 불타는 나무의 일생은 동자승, 연화, 승려들, 주지승을 통해 그대로 반영된다. 입적한 주지승의 선방 앞에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는 재규의 모습이 시종 가벼운 분위기의 끄트머리에서 희화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1년을 아우르는 네편의 코미디 영화,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조폭 마누라>, <킬러들의 수다>가 품은 코드-희화화된 매개로서 폭력과, 상황을 놓칠세라 앞뒤에서 적절히 배치된 정리 씬-는 한동안 반복될 확률이 높다. <달마야 놀자> 역시, 알면서도 속아주고 지겨운 듯 보러가는 코미디의 흥행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재규 일당의 변화를 감격스레 지켜봐도, 그들의 웃음 보따리에 풍덩 들어가도 좋다.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은 걸작이냐 범작이냐는 구분보다 대박이냐 쪽박이냐 일 테니 말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로마서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