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A.I.] 찾을 수 있을 무언가에 대해 - 둘
열혈연구
2001. 8. 27. 15:31
A.I. (01. 8. 22)
-찾을 수 있을 무언가에 대해- 둘
@ 앙팡 테러블
어린이에 대한 관대함은 잃어버린 맹목에 대한 보상심리에 다름 아니다. 태어나 폐로 산소를 들이 마시는 순간부터 나이가 들어 명명됨을 벗을 때까지, 이 풋풋한 생명체는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 마틴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니카를 위해 헨리는 어린 로봇 하나를 데리고 온다. 그가 선물한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은 사랑 할 수 있는 감정을 부여 받은 로봇이다. 데이빗은 간유리 너머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그는 유리문을 연 후, 발의 클로즈업에서 가장 익숙한 크기인 웨이스트 샷으로 모니카에게 첫 인사를 한다. 그의 존재가 어색할 당시 데이빗은 부재하는 마틴의 사진 앞에 다가간다. 액자의 거울 속에 자신이 비춰보이고, 그 형체가 마틴의 모습에 딱 들어맞도록 조금씩 움직인다.
그가 소망하는 아들 되기에 대한 노력이 전해져 모니카는 7개의 코드 입력을 결정한다. ‘새털 구름, 소크라테스, 미립자, 데시벨, 허리케인, 돌고래, 튤립’ 그리고 ‘모니카 데이빗 모니카’. 그녀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은 ‘입력된 사랑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전제의 지속성과 더불어 어린이로 제작된 데이빗의 사랑 자체였다.
평생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듯 누워 있던 마틴은 어느날 갑자기 보조기를 찬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고난은 시작되는데, 모니카를 엄마로서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된 데이빗은 그에 의해 철저하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실존적 존재로서 데이빗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고리만으로 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데이빗은 이상적인 아이이다. 그는 부모를 부모보다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진짜 아이가 아닌 데이빗은 자신이 모니카의 아들이라는 입력된 정체성의 실재를 추구한다. 반면 실제 아이인 마틴의 행동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기반으로 ‘아들’ 혹은 ‘어린이’로 명명됨과 동시에 부여된 힘의 경과와 결과를 보여준다.
마틴은 데이빗의 경쟁심리를 부추겨 음식을 먹도록 만든다. 음식물이 안으로 들어간 데이빗은 얼굴이 늘어지며 고장나고 만다. 또 모니카의 머리를 잘라오라 해 살인 미수 혐의를 씌우기도 한다. 맥락과는 달리 생일파티에서 발생한 익사사건은 마틴이 한걸음 물러나 있지만, 역시 그의 친구들이 악역을 이어받음으로써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가학적 욕망의 분출을 보여준다.
@ 흔적과 분열의 경계
익히 알려진 대로 스필버그는 자신의 어린이에 대한 몽상적 낭만을 지상최고라 불리는 화술(話術)과 화법(畵法)을 통해-
정보 사회의 재치 있는 풍자인 Dr. Know의 방에서 얻은 힌트-하비교수가 흘려 놓은 단서이긴 하지만-를 통해 데이빗은 모든 꿈이 시작되는 하지만 지금은 물에 잠긴 도시를 찾아간다. 그가 맨 처음 하비교수의 방에 들어서 발견한 것은 자신과 꼭 닮은 액자 속의 어린이 사진이다.
마틴의 얼굴에 교차되었던 초반의 액자씬이 데이빗의 소망을 키우는 시작이었다면, 자신이 하비교수의 죽은 아들에 대한 기억으로 만들어졌음을 발견한 이 씬에서 데이빗의 심정은 보잘 것 없는 오즈의 실제 마법사를 발견한 도로시의 것과 유사하다. 다만 다른 것은 도로시가 실재를 인식하고 방향을 선회한 반면, 데이빗은 모니카를 통해 들은 피노키오의 푸른 요정에 대한 환상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큐브릭과 스필버그의 취향이 갈라서는 곳이다.
데이빗은 자신과 같은 로봇을 발견함에 이어 대량생산의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이 꿈꿨던 특별함(special), 실재(real),와 독창(unique)을 하비교수의 공간에서 상실하고 만다.-그에 대한 거부의 표현은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떠올리게 한다. 앞서 말한 낭만의 껍질을 벗은 어린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하비교수의 곁을 떠난다.
이에 대한 충격을 극단까지 몰아가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생생했던 시절의 큐브릭 방식이었다면 –유작 <와이즈 와이드 샷>에서 결말은 그의 힘이 빠졌다는 염려를 하게했고 실망에 다다르기 전에 그는 전설이 되었다- 동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몽환적인 스필버그의 태도라는 것이다.
@ 재구축의 들여다보기
큐브릭이 브라이언 앨디스의 ‘Supertoys Las All Summer Long’를 기반으로 세웠던 한 로봇소년의 정체성 문제는 이를 사랑이라는 소재의 귀납법적 진술을 시도한 스필버그를 통해 나름대로 독특하고 주관적인 재구축 단계를 거쳤다. 거기에는 사랑을 소재로 한 수많은 변주가 등장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몇 개만 들어도 이는 확연하다. 데이빗은 마틴의 병으로 아파하는 모니카에 대한 헨리의 사랑의 선물이었다. 데이빗은 입력자인 모니카를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고, 그 사랑의 본질은 하비교수가 잃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모니카와 데이빗 그리고 마틴을 오가는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비교 역시 분명하며 또 조를 통해 비교적 가볍게 다뤄진 매매춘까지 더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이루어진 성경의 4복음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던 예수의 생애가 담겨 있다. 그 중 요한복음 8장을 찾아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와서 성전 가운데 세우고 돌로 치려는 장면이 펼쳐진다. 감람산에 오르려다 들렀던 예수는 이를 보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만다.
데이빗을 처단하고자 하는 존슨은 재활용축제의 사회자이다. 염산 양동이를 데이빗과 조의 머리 위에 달아 놓고 “누가 먼저 돌을 던지겠느냐”고 외친다. 하지만 데이빗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존슨을 향해 토마토를 던지기 시작한다.
이 둘 사이에 간격에서 발생하는 연관작용은 들여다보자. 먼저 죄의 유무가 보인다. 성경의 여인은 간음죄를 저질렀다. 기원전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유부녀가 자기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간음은 십계명의 7번째 계명에 등장할만큼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를 행한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라”(레 2:10, 신 22:22)고 했다. 사형 방법은 화형(창 38:24), 돌로 쳐죽임(신22:23~24)이 대표적이었다.
반면 데이빗은 창조주인 하비교수가 가졌던 제작의도 외에는 별다른 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죄지음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는 크게 야단 맞지 않은 어린이들에게서 보이는 현상과 일치한다. 즉 이유없이 정죄 받은 데이빗의 무죄 방면은 예상된 결론이었다
둘째 징벌자로써 사람들의 일치와 중계자로써 존슨과 예수의 대비다. 여인을 징벌하려 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신분이나 율법적인 면에서 높거나 올바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로봇의 죽음을 즐기는 군중과는 사못 다른 사람들이다. 여인을 정죄하려 모여든 장소 또한 성전으로 축제장과는 딴판이다.
하지만, 둘 다 단지 하나의 돌멩이만으로도 넘친 후 걷잡을 수 없는 둑의 범람처럼 징벌의 손을 날렵하게 올렸을 긴장감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리고 징벌자와 피징벌자의 사이에 놓여있는 가해자로서 존슨과 교섭자로서 예수의 위치는 모두 ‘도발’이라는 화두를 던졌더라도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존슨의 실패는 어디에 있었을까. 성경의 한 구절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를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다음 행동을 잇기 전 두었던 짧은 시간의 여유가 인격적인 완성도와 더불어 복받치는 군중심리의 휴지를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데이빗의 여정기 뒤에 덧붙인 ‘2000년 후 이야기’ 엉뚱하면서도 흐뭇한 사족인 것도 예수의 죽음 후 지난 망각의 세월 만큼임을 비추어볼 때, 간음한 여인 이야기의 재구축이 허투루 사용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스필버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단정에 좀더 미묘한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 거기에 사족을
하비교수의 방을 나와 조와 헤어진 후 데이빗은 푸른 요정을 찾아 물속으로 잠수정을 몰아간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놀이공원 폐허였고, 푸른 요정상(像)을 눈앞에 둔 채 데이빗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잠시의 암전이 흐르고 나레이션이 깔리면, 2000년 후 극도로 발달된 로봇이 인류의 흔적에 대한 자료로써 데이빗을 발굴하려는 씬이 이어진다. 이것에 대해 빙하가 되어 있는 땅을 파고 들어가 데이빗을 발견치 못했거나, 어쩌다 그제서야 눈을 뜨는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스필버그는 크게 세 단락, 프롤로그 –데이빗의 모험-에필로그를 각각 암전을 통해 구분시키고 있다. 여기에 마지막 씨퀀스는 특별히 나레이션을 시종 덧붙여 데이빗의 모니카와 만나는 후일담이 ‘동화의 해피엔딩’ 만들기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모니카가 마틴을 품고 데이빗에게 들려 주었던 ‘피노키오’이야기와 같아야 한다 생각하는 스필버그식 결말이다. 카첸버그와 ‘한지붕 딴살림’ 전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동화 만들기에 대한 집착은 여전함을 알 수 있다.
두시간에 걸친 상영시간 동안 열심히 보여주었던 미래에 대한 예지와 가능성의 선보임은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다시 한번 재구축에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중요해 보였던-또, 우리가 함께 찾고자 했던- 로봇소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무너지고, 결국 입력된 사랑의 이행이 그의 욕망에 다를 바 없음을 어린이에 대한 면죄부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화면으로 선보인다.
스필버그는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한복음 8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