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A.I.] 찾을 수 있을 무언가에 대해 -하나

열혈연구 2001. 8. 22. 01:17
이번 글은 어리숙한 제 판단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실은 저는 스필버그를 애써 무시해 왔답니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한 기억 중에 를 집어 놓고 있으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 전부를 깡그리 내려 보고 있었던 거죠. 근데, 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생각이 정말 내 생각이었을까?’하고 말입니다. 먼저 반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나머지는 고만 고만한 글쓰기로 이전처럼 돌아갈겁니다. 하하.


A.I. (01. 8. 19)
-찾을 수 있을 무언가에 대해

@또렷한 잣대, 혹은 시금석을 구함

오랜 시간을 덧입으면서도 명작(名作)이란 푯말을 갈아 입지 않은 작품들을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굳이 ‘경외’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질투나 교만이 절대 아닙니다. 제가 하는 생각은 ‘어떻게 그들을 판단할 수 있었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오랜 세월을 견뎌왔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루브르의 커다란 방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의연히 앉아 있던 ‘모나리자’를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볼 줄 아는 눈이 부족해서 였겠죠.

스필버그의 신작 는 오직 큐브릭이 남긴 유산이라는 점만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적어도 나만큼은 변치 않고 ‘그저 그런’ 감독중의 하나라 외면하고 싶었던 스필버그였으니깐요. 별로 나쁘지도 않은 일상에 넉넉한 시간을 될 수 없는 핑계로 쪼개다 개봉일을 얼마 지나서 극장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끔 그렇지 못하지만 영화의 많은 것은 첫 씨퀀스에 담겨 있다 생각합니다. 의 시작 역시 감정 있는 ‘로봇의 생산과 그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다소 딱딱한 논쟁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스필버그 영화이니 만큼 이 질문은 가맣게 잊더라도 이어지는 본론으로 빠져드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에만 한정해서 생각해 봅시다. 마케팅의 재료로 쓰이는 ‘시기의 걸작’ 아니 ‘불후의 명작’따윈 잊어버립시다. 수많은 영화들 중 얼마나 작은 숫자가 월계관을 쓰고 있습니까? 헌데 그 왕관이 올리브가지처럼 오래지 않아 소리소문 없이 흩어지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사라졌으니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잠깐 머리를 흔들어도 숱하게 떠오릅니다.

이런 일은 몇 가지 원인들에 의해 발생합니다. 먼저 수많은 관객들이 봄으로 인해 재평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필버그의 초기 영화가 대부분 그렇고, <쉬리> <친구> 역시 평단의 붓바꿔쓰기를 우리는 지켜보았습니다.

두번째로는 적은 관객이나마 오랫동안 사랑하는 경우입니다. <록키호러 픽쳐쇼>의 경우처럼 수십 년 넘도록 심야상영 되고 한판의 축제 혹은 제전이 되는 경우 역시 없지 않고, <카사블랑카>처럼 점잖케 살아나 ‘위대한 영화’로 버젓이 올라 선 경우도 있습니다.

세번째론 평론가나 감독들에 의해 쌓인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 김기영감독의 재평가처럼 이는 주로 영화제의 회고전 그것도 깜짝 기획으로 인해 살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무덤에서 살아 올라온 많은 작품들이 있겠지만 거친 구분으로 관두겠습니다. 우리가 하려던 이야기 중 이건 작은 것이니깐요.

이제 세상을 등진 지도 십년이 지난 아이작 아시모프는 가전제품에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로봇공학 3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이미 들으셨을 수 있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관해서도 안 된다. 2.로봇은 첫번째 원칙에 위배되는 경우를 제이하면 인간이 내린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로봇은 첫번째 및 두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의 첫 씨퀀스에 등장하는 여자로봇은 자신의 실존을 실증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앉으라’ ‘입을 벌려라’ ‘옷을 벗어라’는 명령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움직이는가 하면 입력된 반응체계에 의해서 바늘로 팔을 찌르면 ‘아프다’라는 출력을 보여주는 자극과 반응 순서도를 그릴 뿐입니다. 그 모습은 평소 우리가 몇몇 감독들에게 선사한 ‘명감독’이라는 호칭과도 비슷합니다. 예전의 스필버그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확연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십년 전 스필버그는 ‘피터팬’을 변주한 <후크>라는 영화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제껏 피터팬의 상대역을 맡는 악당으로 기억되던 후크를 타이틀로 내세우는 대단한 실험을 감행한 듯 보였습니다만, 실상 내용은 여전히 변죽거리밖에 되지 않는, ‘늙은 피터팬’을 제외하고는 전과 다를 바 없는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때 평단의 반응들은 ‘유아기적 몽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류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이 주를 이뤘습니다.

스필버그의 과거를 되짚어 보자면, 카메라와 익숙하게 자란 어린시절을 지나, 74년 극장용 영화 <슈가랜드 특급>을 내어 놓으면서 베이비붐 세대 장악을 예고합니다. 이듬해 <죠스>는 ‘블록버스터’란 단어를 만들어 내며, ‘최대한의 스크린 장악’, ‘연관 상품의 판매’ 등 마케팅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습니다. 이어진 <미지와의 조우>, <인디아나 존스>, , <쥬라기 공원>으로 이어지는 그의 판타지 시리즈들은 세상 많은 사람들의 꿈을 자극하며 그가 손을 댄 영화 중 9편이 북미에서만 1억달러를 넘어서는 기록을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합니다. 신흥 메이저인 드림웍스의 3인방 중 하나이면서 실존하는 최대의 흥행사인 그는 말마따나 살아 있는 전설,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저평가 받아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칼라퍼플>을 선보였을 때나, <태양의 제국>을 내어 놓았을 때, 쏟아졌던 혹평의 행진은 굉장했습니다. 헌데, 우스운 것은 평론가들이 그렇게도 무시했던 미국의 아카데미상을 그가 움켜쥐자마자 비난의 화살이 애정의 표현으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쉰들러 리스트>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획득하자, 그저 그렇다고 평해왔던 유태계 흥행감독, 스필버그를 위해 ‘위대한 감독’의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영화가 한심하기 그지 없는 <잃어버린 세계>였거나, 덜 다듬어진 그래서 한없이 지루한 <아미스타드>였던 것을 눈감아 주더니, 이를 바 없이 잔인한 전쟁의 엉뚱한 국가적 가족주의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만들자 마자 쌍수를 들어 ‘명작의 재래, 명감독의 완성’을 외쳤습니다. 다시 한번 아카데미가 손을 들어준 것 역시 당연하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주저리 털어 놓는 이유를 독자 여러분들께서 아시겠죠. 저 역시 영화를 보고, 느끼고, 생각한 후 이야기 하는 나름의 잣대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정령 재능의 진의를 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갖을 순 없을까요? 결국 시행착오의 오차한도를 줄이기 위해 다시 또 연습을 시작할 뿐입니다. 이제껏 혹시라도 제 글에 상처를 받으신 독자분들 역시 걱정할 필요 하나 없었답니다. 우린 노력할 뿐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니깐요.


이러므로 우리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예레미야애가 5 :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