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소름] 내가 느낀 것은 정말 공포였을까?

열혈연구 2001. 8. 13. 04:46
때론 관객이 많은, 북적거리는 영화관이 좋을 때가 있답니다. 풍성한 반응을 느낄 수 있는 공포나 코메디를 보러 갈 때면 특히 그렇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즐거움은 일어서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 들려오는 관객들의 반응을 엿듣는 것입니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을 보러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구요. 세상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 재미있다 봅니다.



소름 (01. 8. 11)
-내가 느낀 것은 정말 공포였을까?

@ 이것은 정말 공포영화일까?
이제 공포영화의 여름 개봉이 자리잡은 듯 보인다. 비록 낮은 수치라도 끊임 없이 계속되는 개봉행렬은 잊혀지지 않는 옛 기억처럼 익숙하다. 필자는 공포영화의 재미를 극장이라는 공간에 함께 자리한 관객들의 움찔거리는 어깻짓에서 엿보이는 운명공동체적 느낌에서 찾는다. 긴장을 기대하고 들어가, 그것을 충분히 얻고, 나오며 안도하는 관람행위의 수순에다, 웃으며 돌아나와, 악몽에 시달리는 다음 차례를 내심 기대하기도 한다.

<가위>,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등을 비롯한 유래 없는 우리 공포영화의 연속 개봉은 작년 여름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관을 전반에 배치한 채, 무용론에서 진화론까지 우리 공포영화의 재래는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이 불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도 의심할 여지 없이 공포영화로 분류되는 것은 작년 여름에 벌어진 일련의 현상 때문이다. 이 영화는 몇 년 전 불었던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류의 십대 공포영화의 바람을 그대로 탔던 작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걷고 있음에 틀림 없다. 뜨거운 피를 자극하기 보단 살갗에 돋아나는 ‘소름’만큼의 무엇. 우리 공포영화의 전통에 근접한 ‘원혼’의 흐릿한 배경에다, 난도질과 심령현상 어느 한 곳에도 기울이지 않고서 담은 조용한 낡은 아파트에서 우리가 본 것은 정말 공포였을까.

<소름>을 굳이 공포영화의 틀에 끼워 넣으려면 공포영화가 갖는 기반사항을 잊어야 한다. 이 영화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없으며, ‘거대한 악령’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인물들의 가슴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사실이다. 개봉 시기가 겨울이었다면, ‘미스터리 스릴러’ 정도로 생각될 이 영화에서 공포스러움의 기반은 바로 아파트이다.


@ 아파트가 풍기는 냄새
영화는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아파트의 전경에서 시작한다. 엉뚱하게도 필자는 이 ‘아파트 풀샷’이 가장 재기 넘쳐 보인다. 오전의 아파트에서 밤의 아파트로 마무리하는 영화는 같은 샷의 변형을 통해-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밝힘에서 감춤으로-깔끔한 정리를 한다.

택시 운전을 하는 용현(김명민)은 504호에 막 이사 했다. 짐을 풀고 자장면을 시켜먹고 살림살이를 손보고 있는 첫날, 그는 전등위 천정이 까맣게 타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소름>의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은 아파트로 대표되는 어두운 실내, 즉 한정된 광원을 이용한 듯 꾸민 실사조명에서 비롯한다. 반대로 카메라가 실외로 나갈 때마다 덜컥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감독은 재개발의 문턱에 서있는 낡은 아파트, 그 안에 살고 있는 지난한 삶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가는 무언가를 복도에 켜있는 깜빡이는 전등과 창으로 비치는 어두운 햇살로 담아낸다. 인물들은 종종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불쑥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감독은 그 사이를 메우는 상상력의 자리를 관객에게 넘기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흔히 공포영화의 클리쉐 중, 배경은 빠질 수 없다. 등장인물들이 연달아 사라지고 살해되는 장소는 주로 캠프장, 고성, 호텔 등 일상적이지 않는 낯선 곳이다. 주로 신천지에 발을 딛는 인물들의 긴장과 흥분을 두려움의 존재가 공포로 바꾸어가는 수순을 밟는다. 반대로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가족과 집이 공포의 객체 아닌 주체로 나서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안전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림으로써 배반의 고통을 내세우는 식이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막연한 공포를 느낀 적 없는가. 스위치를 올리고, 가구들만이 지키고 있는 공간이 환하게 켜지기 전까지 두려움의 짧은 간격을 채우는 안도하기를 바라 듯 깜박이며 빛을 찾는 형광등의 소리를 의식한 적은 없는지...

<소름>에서는 이 두 가지-생활의 기반으로서 집과 일상을 채우는 소리-를 두려움의 기반으로 삼는다. 30년 전 발생했던 살인 사건의 자리에 얼마 전 소설가 지망생 병태가 불타 죽었고 그곳은 바로 용현이 이사 온 504호이다. 그가 밖으로 나온 첫날밤, 충분히 낡은 아파트는 자신의 불빛을 점멸시키며 배경음을 형성한다. 영화를 주도하는 몇 가지 소리,-병 깨지는 소리, 빗소리, 전등의 점멸음 등-는 촌스럽지 않는 공포의 배경을 형성한다.


@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밤늦게 출근하는 용현은 편의점에 들렀다가 옆집 사는 선영(장진영)을 만난다. 둘이 마주치는 바로 직전, 편의점에서 일하는 그녀는 빨간 주스병을 떨어뜨렸다. 병이 깨어지며 내는 커다란 파열음은 앞에 자리했던 씬의 고요함을 찢어 놓은 다음, 다시 태연하게 흔적을 지우는 것으로 선영이란 인물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아이를 잃어버린 과거가 있는 지금의 그녀는 도박에 빠져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과 함께 삶 같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종종 얼굴에 붉은 멍을 달고 부시시한 머리를 한 그녀의 눈은 아무런 두려움에도 빠지지 않을 만큼 항상 먼 곳을 응시한다.

세를 내준 아파트의 주인은 바람둥이 이발사. 이발소의 거울 위에는 30년도 넘은 옛날에 찍어 놓은 동네 사람들 사진이 있다. 그리고 사진 한 가운데에는 웃음을 품은 한 가족이 자리하고 있다. 훗날 바람이 나 아내를 죽인 후 아이를 두고 떠난 남자가 아무일 없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아이는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그 아이가 고아라고 몇 차례 반복해서 말하는 용현이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잘 보이진 않지만, 용현이 거울에 엉덩이의 화상을 비춰보는 샤워 씬이 이씨의 이야기와 그리 멀지 않게 놓여 있는 것을 봐서도 그렇다. 하지만 <소름>은 자신이 던져 놓은 이야기 고리의 호기심에 대해선 철저히 태연하다.

이러한 태도는 급작스런 해결로 달려가는 마지막 20분을 제외한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아파트를 중심으로한 사람들의 비루한 삶은-이러한 표현이 맞다면- 충분히 일상적이다. 복도에는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집 안에선 사람들이 싸우고 섹스를 한다. 늦은 밤 나가서 일을 하고, 몰래 데이트도 하며, 공짜표로 영화도 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아파트 사람들의 일상은 거대한 건물을 쪼개 개별공간을 만든 아파트 자신처럼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사이를 통하는 문의 자리에 ‘아파트의 과거’를 위치시킨다. 비록 자리했지만 당연히 공포는 일상의 출입구가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공하는 해결의 고리를 분절시켜 철저하게 갈라 놓게 된다.

또, 이미 영화를 잇는 고리들은 인물들에 의해서 끊어짐을 예고 하고 있다. 505호에 사는 소설가 이씨(기주봉)는 아파트에 얽힌 운명의 고리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그가 화장실에 있을 때 들리던 노트 넘기는 소리에서 의심을 품게 하고, 죽은 병태의 노트를 불태우는 순간 그의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병태의 애인이었던 은수의 입을 통해서 감정적으로 확인되면서 다시 사실 여부가 흩어지고, 마지막에 이르러 계약이 실패해 자포자기한 이씨의 모습에 의해 처음처럼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용현의 과거 역시 비슷한 모양을 띤다. 그를 조사하러 온 형사에게 말한 것처럼 옛 여자를 피해 그가 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냉장고 안에 담긴, 옛 여자에게 사주었다는 패물을 보면 그가 했던 일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취객이 떠들썩하게 달리는 배달부의 오토바이를 ‘받아버려’했을 때 반짝이는 그의 눈과 ‘고등학교 때 이길 수 없는 친구를 찔러 죽여버렸다’ 말하는 그의 입술을 통해 이상하게도 다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너무나 태연히 고백하는 용의자가 ‘정말 그랬을까?’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용현이 정말로 선영을 죽였을 때 역시 ‘정말로 죽였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여기에 감독은 선영 아들의 죽음에 대한 플래쉬 백과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연결시켜 관객의 그런 착각을 부추긴다.- 그가 비오는 흙을 파내어 그녀의 시체를 묻을 때에야 비로소 살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음과 동시에,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의 부재’를 실감할 수 있다.


@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법
<소름>이 관객의 가슴과 머리에서 공포를 혹은 사고를 끌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미장센을 통해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조명 역시 여기에 포함이 되므로 다시 이야기해 보자. 이 영화는 클로즈 업을 많이 사용한다. 헌데 이는 흔히 공포영화에서 사용되는, 즉 두려움에 싸여 도망치는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 도구로써가 아닌, 두려움에 싸이기를 소원하는 관객에 대한 응시처럼 보인다.

한 씬을 보자. 아파트에서 밖을 보고 있는 용현의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역광의 실루엣으로 담는다. 그런 다음 갑작스레 용현의 얼굴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아주 태연한 그의 얼굴을 말이다. 그의 눈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관객이 자리한 곳을 직시하고 있다.

하나는 주변의 활용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많은 포커스 인 아웃을 담고 있다. 초코바를 먹는 용현을 담은 자동차내 씬의 한 구석에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선영의 포커스 아웃된 모습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식이다.

비명소리에 끌려 서있는 용현의 복도 씬에서도 마찬가지의 방법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조명의 명암을 이용한 포커스 인이 사용되는데 다음과 같다. 용현은 선영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싸움 소리에 솔깃해 한다. 전등이 점멸되고 있는 너머로 저편을 바라보다 조용해진 사이 뒤로 돌아 서있는 상태. 그의 바스트 샷 뒤로는 어두운 복도가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서서히 뒤를 돌면 피 묻은 옷을 한 선영이 멍한 표정으로 서있다. 관객은 자신이 바라보고 믿어 의심치 않던 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안위감의 상실을 경험한는 것이다.

이 영화의 조명이 어두움만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씨가 광태의 노트를 태우던 씬에서는 빛을 적용하기도 한다. 노트가 페인트 통 안에서 타고 있을 때 광태의 애인이었던 은수가 나타난다. 그녀는 화재가 났을 당시 노트를 들고 나왔던 이씨가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 광태를 죽인게 아니냐고 소리친다. 그때 햇빛을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서서히 광도를 높였다가 다시 천천히 본래 상태로 돌아온다. 앞서 언급에서 그녀의 대사가 사실과 멀어지는 효과를 낳는다고 말했는데, 꼭 그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닌 이상효과였음을 짐작할 수는 사례로 보인다.


@ 떠나간 그들을 기리며 혹은 기다리며
고아인 용현은 선영의 “사랑하냐?”는 질문에 첫 여행에서 그녀가 신발끈을 매어주던 일을 언급한다. 그는 선영의 행동이 어머니 같았을 거라 말을 한다. 선영은 아들을 잃은 과거가 있다. 남편과 싸우다 캐비닛에 숨긴 아이가 뒤늦게 죽은 채로 발견된 깊은 상처로 말이다. 모성을 소망하는 용현과 모성의 회복을 두려워하는 선영의 파국은 롱 테이크로 이루어진 두 씬에서 결정난다.
두 씬에서 카메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앞의 저수지 씬은 둘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가면서 카메라가 천천히 왼쪽으로 트래킹한다. 그때 용현은 친구를 죽인 자신의 ‘세상을 편히 사는 법’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마주 보고 있던 둘의 위치가 인물의 동선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다음 이어지는 여관 씬에서는 앞 씬 마지막에 용현이 선영에게 건넨 팔찌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에서 시작했던 말은 금새 ‘불신’으로 이어지고 파국으로 향한다. 선영은 용현과 대화에서 아픈 상처가 되살아 나를 되살아 나고, 용현 역시 자신을 떠났던 여자들의 모습에 선영 대입시키며 결국 그녀의 목을 조른다.

이 씬은 눈높이 보다 약간 낮은 위치의 고정된 카메라로 찍어 냈다. 둘이 여관방에 들어서 대화를 시작하고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번질 때까지 카메라는 가만히 둘의 모습을 바라 보기만 한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긋나는 소통의 방식을 관조하는 이 씬은 관객의 훔쳐보기를 자극하면서 결국은 거리두기에 접근케 한다.

분명히 이 씬은 어머니를 바랬던 남자가 그리고 또 아이를 그리는 여자가 상대에게서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남자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자신의 어머니처럼 여자를 죽이고, 그 여자는 다름아닌 피를 나눈 동생이었음을 밝혀지는 극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쓰러진 선영의 얼굴과 과거를 교차편집 하면서 선영의 죽음에 감정을 실어 놓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용현의 암매장 씬으로 넘어가면서 감정을 접고 뒤로 물러서는 냉철함을 지속한다.

첫 영화를 들고 온 윤종찬 감독은 이미 세편의 단편-<플레이백>, <메멘토>, <풍경>-에서 이미 <소름>의 대부분을 이야기 해 놓았다. 아니 표현의 대부분을 선보였다는 게 옳겠다. 그리고 비슷한 감성으로 씬과 씨퀀스를 나누어 놓고 별개의 스토리가 하나로 맺어 지는 기적을 바랬음이 틀림없다.

<소름>은 한 아파트에서 30년을 터울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파국에 대한 유전을 이야기한다. 504호에 얽힌 30년 전 가족 붕괴와 용현의 이사 사이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광태라는 인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광태의 추리를 통해 진행되었고, 그와 연결된 은수라는 인물에 의해 지극히 주관적인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둘을 철저히 외부인으로 자리해 놓고 사기꾼에 가까운 이씨를 대신 적용시킴으로 인해 잘 짜맞출 수 있을 고리를 잃고 말았다. 해서 용현과 선영의 비극적인 근친상간과 친족살해의 반복을 보기 아닌 읽기에서 찾아가는 특이한 공포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공포의 수순이 즉시적인지 지연적인지에 대한 호오(好惡)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다만 윤종찬 감독이 들고 온 새로움의 여지가 주는 긴장은 아쉬웠고, 감각은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43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