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스파이 키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열혈연구 2001. 7. 14. 00:55
모험물 시리즈 제 3탄 <스파이 키드>입니다. 자녀들 혹은 조카들의 손을 잡고 가서 보기에 딱 어울리는 영화죠. 타란티노의 친구로 악동 기질을 충만히 보이던 로드리게즈 감독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만든 영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또 다시 부천영화제가 생각나는군요. 재작년쯤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바벨’ 머시기 하는 정도의 어린이 영화를 봤답니다. 한가한 좌석에 부모님 곁을 떠나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짜증이었을 시간이 돌이켜 보니 흐뭇하게 떠오릅니다. 진중하게 보는 것이 우스운 일일지 모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라면 말입니다.


스파이 키드 (01. 6. 22)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여왕 아닌 여왕에게

세상에는 사람 위에 군림하는 군주가 남아 있다. 자신들의 무혈 혁명에 ‘명예’라는 이름까지 붙여 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네들은 그녀를 ‘여왕’이라 이름한다. ‘Queen’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면 필자는 멀리 떠나간 두 명의 여왕이 생각난다. 하나는 ‘Made in Heaven’을 남긴 이고, 하나는 자파타와 조르바였고 콰지모도이자 아부타이였던 잠파노다. 뭐, 앤서니 퀸의 퀸이 ‘Quinn’인 것을 안게 조금 전이니 무지로 인한 연상을 굳이 막으려 하지 마시라. 실은 방금 전에 <구름속의 산책>이란 영화를 봤다. 필자의 자당께서 언젠가 보시고는 몇 년째 ‘곁에 두고 봤으면 좋겠다’하셨더랬다. <자이언트>에 이어 3년 만에 겨우 집을 찾아 온 고등학생이상 관람가 비디오 테이프 하나. 수없이 곁에서 듣던 낭만성의 실체를 확인하자는 생각에 시원한 여름비 소리를 들으며 전등을 껐다. 헌데… 그곳에 느닷없이 나타난 이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반가운 이여!(로드리게스의 <엘 마리아치>를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찾아 낸 것도 비슷한 경우였다. 100원짜리 코너에 쳐박혀 있던 곰팡내 나는 테이프를 꺼내 들었던,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이후였다. 어린시절 보았던 흑백의 서부영화들, 장고나 와이어트 어프 정도 될 영웅들이 몸을 휙 돌리며 쏘아대는 기타 총. 로드리게스의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였다. <데스페라도>에서도 등장하는 그것은 기대하지 않은 것의 발현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만해도 총으로 만드는 십자가로 만족해야 했지만 <패컬티>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기다리게 된 반가운 이여!)

<스파이 키드>는 정말 오랜만에 세상의 빛을 받은 모험물 영화다.(이 글은 <미이라2>와 <툼 레이더>이전에 썼습니다.) 뒤에 가족 영화임을 이야기 하겠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스필버그가 80년대 전성기를 이뤘던 것과 같은 뿌리를 하고 있다. <인디아나 죤스>와 이의 유아 버전 <구니스>를 거쳐 판타지 버젼 <후크>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어드벤쳐 영화는 007 같은 현대물이 보여주지 못한 통쾌함을 선물했다. 그렉(안토니오 반데라스)과 잉그릿(칼라 구기도)은 은퇴한 스파이 부부. 잠을 못 이루는 딸 카르멘(알렉사 베가)과 아들 주니(대릴 사바라)의 귀에 자신들의 옛 이야기를 각색해 들려주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일 뿐이다. 스파이의 임무보다 어려운 아이들 키우기가 계속되던 어느날, 실종된 옛 동료를 찾으라는 OSS의 명령이 떨어진다.

퀸의 이야기가 어슬렁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돌아가보자. <구름속의 산책>에 등장하는 퀸의 역은 멕시코 포도 농장 집안의 할아버지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가짜 손주 사위의 손을 이끌어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고, 포도주를 들이키며, 사랑 노래를 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둔탁한 목소리와 휘젓는 듯한 걸음은 그가 서있는 곁과 지나간 자리를 환하게 비춘다. 영화는 한심할 정도로 덜컥 거리는 이야기를 계속하지만, 퀸이 웃는 순간이 겹겹 둘러지며, 갈색의 화면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이 살갑게 다가옴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이것이 고인에 대한 예우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란 변명도 있지 않은가! 또 하나의 별이 하늘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 힘이 얼마나 중요할까

그렉과 잉그릿이 뛰어난 스파이였을 지라도, 자식들의 눈에는 나약한 부모일 뿐이다. 겁쟁이 주니는 괴롭히는 친구와 똑같은 그의 아버지에게 꼼짝도 못하는 그렉이 서운하기만 하다. 그래도 피는 못 속이는지 카르멘이 학교를 빠지며 하는 일은 다름 아닌 체력 단련이다. 임무는 시작되자 마자 뛰어난 전직 스파이 둘은 갇히고 만다. 남은 일은 안전하길 바란 아이들의 구원뿐이다. 카르멘과 주니가 부모를 구하는 임무에 착수하면, 영화는 첩보물에서 모험물로 변신한다. 영화광 출신답게 감독은 <미션 임파서블>, <007>시리즈 같은 첩보물에서 <스타워즈>, <딕 트레이시>, <더 월>을 스쳐 <인디아나 존스>, <구니스>같은 모험물을 인용한다. 이것들이 어린이의 행동을 통해 보여지는 ‘소형화’와 ‘어눌함’이 영화의 유일한 장기다. 인용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음악을 맡은 대니 앨프만이 또 한 몫을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들 즉, <가위손>에서 <굿윌 헌팅> <미션 임파서블>을 조각 조각 이어 붙여 감독의 의도에 맞장구를 친다.

계속해서 뒤죽박죽하고 있는 글을 용서하시라. <구름속의 산책>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자. 빅토리아의 아버지 돈 페드로는 자긍심 높은 농부다. 때로는 총을 들고 때로는 술잔을 높이며 자연과 가족의 진정함을 소리치는 당당한 가장이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뿌리를 알 수 없는 사위와 믿음직하지 않은 딸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었다고 고민한다. 자신의 농장을 모두 불태운 폐허에서 말이다. 지역의 실력자이자 정력가였던 그가 무릎을 꿇고 눈가를 적시는 것은 결국 자식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스파이 키드>에서 장난처럼 스쳐가던 자식 키우기의 어려움은 잘 자라고 있다 생각하는 자식들의 자만과는 한참 거리가 있나보다. 부모님의 걱정은 내리사랑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이다. 두 편 모두에서 잘 자라고 있는 자식에 대한 열변을 토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척하니 죄송할 뿐이다. 부모님께…

자식이 부모를 구한다는 설정이 이전의 것과 인물만 바꿔 놓은 것임을 볼 때 <스파이 키드>에서 새로운 인물은 플룹(알란 커밍) 뿐이다. 어린이 프로그램 ‘플룹 쇼’의 진행자인 그는 실제로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이다. 외톨이 주니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인 ‘플룹 쇼’에 등장하는 캐릭터 ‘푸글리’들 역시 개조 당한 특수요원들이다. 또 플룹은 전 세계 유명인사의 아이들을 복제한 로봇을 개발해 군대를 만들려 한다.-이 영화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유중의 하나는 멍청하기로 소문난 자국의 대통령이 비쳐 보이는 군수업자 Mr.리스프에 있지 않나 싶다. 거기에 손가락을 머리 삼아 가운데로 높이 세운 ‘엄지 로봇’이라니!- 플룹은 속이는 것만이 힘을 얻는 길인, 위선(僞善)의 결정체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 갇힌 그는 진심을 드러낸다. 자신의 욕망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 시청률의 정복이라는 사실이다.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악행을 저지르던 그의 꿈이 시청률 1위라니! 조니에게 ‘플룹 쇼’는 가족이 주지 못한 만족을 선물하고 있었다. <스파이 키드>가 내세운 ‘오락물들이 가족과 관계를 멀게 한다.’는 모토는 단 한명 전형성에서 벗어난 플룹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세뇌를 강요한다. 미디어의 폐해는 심지어 007 시리즈에서도 인용한 낯익은 것이다. 그들은 즐겁게 다가오지만 무섭게 장악한다. 가족을 지키려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줄다리기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려니 싶다. 그래 힘이구나.


@ 그래도 역시 가족

폴(키에누 리브스)는 정장에서 막 돌아온 귀환병이다. 하지만 그를 반겨주었어야 할 아내는 집에서 자기 개발법 레코드를 듣는 중이다. 4년 동안 보내온 편지는 바르게 정돈되어 다른 수많은 편지들과 함께 상자 안에서 봉인된 채로 있다. 그가 단지 며칠 동안 몸으로 배운 가족의 중요함은 아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덕에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눈을 감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꿈 속의 장면이다. 폴은 전장을 헤매는 꿈을 꾼다. 자신이 살았음 직한 고아원의 폐허에는 소년병이 아기곰을 안은 채로 죽어 있다. 이 꿈이 빅토리아와 결혼을 생각하는 순간 소년을 일으켜 세워 여인과 손잡는 것으로 변환한다. 폴이 표현적으로 실패한 가장 돈 페드로의 눈 앞에 아직 살아 있는 포도나무 뿌리를 들이밀 수 있는 것 역시 가족을 이루는 그의 꿈 때문이었다.

이것이 <구름속의 산책>에 대한 마지막 인용이 될 테다. <스파이 키드>에서는 복병 삼촌이 존재한다. 스파이 용품을 제작하는 삼촌은 악당쪽에도 물건을 팔아 그렉과 의절한 상태다. 그는 도와달라는 조카들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벨을 죽인 것은 형 가인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최초의 살인자는 동생을 죽인 형이었다. 그리고 가인을 이끈 것은 질투였다. 그렉 형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세계관의 차이만 있었을 뿐, 질투하지 않고 돕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카들의 절도를 유기하고, 일기당백(一騎當百)의 싸움에 끼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이 싫었니?”라는 질문에 그는 몸으로 단호하게 “아니”라는 답을 한다.

<스파이 키드>를 이루는 중요한 이미지는 변신(變身)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변신의 이미지는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를 펼친 이유와 카프카적 ‘변신’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소원하는 것에 이르는 것과 절대적인 것에 의해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렉과 잉그릿이 스파이에서 평범한 부모로 다시 스파이로 역할을 전환하는 것 그리고 카르멘과 주니가 문제아와 겁쟁이에서 스파이 키드로 옷을 갈아 입는 것이 전자에 속한다. 반대로 미디어의 힘에 장악 되어 있는 플룹 자신이나 플룹이 요원들을 개조해 만든 푸글리는 후자에 가깝다. 전자는 변신에 머무르고자 하고 후자는 변신에서 회귀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이 모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즉 일상으로 귀속된다. 오비디우스의 소원도 카프카의 변신도 결국은 특별한 일상의 부분집합이 되는 것이다. 손주들을 위해 <잭>을 만들었다던, 코폴라처럼 로드리게즈 역시 <스파이 키드>를 자신의 세 아이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스파이 키드>는 같이 갔다가 쓴 웃음을 짓고 나오는 디즈니표 애니메이션 보다 훨씬 안전한 부모의 선택이 될 것이다. 가족이 즐거울 수만 있다면야 2천100년을 뛰어넘는 가벼운 인용이야 어쩌랴! 그래도 역시 가족인 것을…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 이니라 (잠언 1 :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