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미스터리와 소통 -둘째 시간
열혈연구
2001. 5. 31. 01:47
영화는 관객과 소통을 희망한다 둘째 시간
-소통 측면에서 바라본 미스터리 영화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시간부터 다루는 내용은 미스터리 영화를 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먼저 ‘목적소통’은 (관객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훔쳐보는 것과 주인공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면소통’은 미스터리 영화의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래도 이번엔 <식스센스>가 나와 좀 읽으시기 수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긴 많은데, 제 혀가 너무 짧습니다. 이제 두 번 째 입니다.
미스터리 풀어내기, 하나 : 관음자와 동일시-목적소통
매체의 관점에서 볼 때 영화의 수용자인 관객은 다른 매체의 수용자보다 능동적(active audience)이다. 이들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와 욕망의 요구를 강요 받는다는 수동성을 극복한다. 관객의 능동적인 관람을 통해 텍스트인 영화는 고정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내재된 것이 아니라 관객 개인을 통해 수용, 즉 보는 순간에 각기 다르게 생성된다. 관객은 단순히 영화라는 매체의 소비자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의 생산자인 것이다. 목적소통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관객은 다른 장르보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그 위치가 확고하다.
미스터리 영화는 긴장과 의문을 기반으로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혹은 사건이 관음자인 관객의 심리에 접근하는 모습이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관객들은 여러 단계의 변위(變位)를 경험하게 된다. 미스터리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현상은 관객을 관음자로서 더 굳게 자리 매김 시키고 꼼짝없이 그 안에 갇히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에서 미스터리 영화는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한다.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소통의 틀에서 감정을 조정 받는 수신자의 위치에 선다. 비슷한 시기에 관객은 영화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리고 동일시한 인물에게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는 송신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반대로 자신이 동일시한 영화 속의 인물과 함께 미스터리가 겹겹이 쌓여가면서 오히려 바라봄을 당하는 자리에 던져진다. 결국 결말에 이르러 영화가 제시한 미로를 헤쳐 나온 관객은 불이 켜진 극장의 현실을 인식하고 각자가 생산한 의미를 지닌 채 현실에 복귀하는 절차를 거친다.
우리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에서 관객이 어두움 속에서 몰래 살펴보던 관음자에서 관객동일시로 명백한 전위를 살필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크로 부부가 집에서 자축연을 벌이고 있다. 아동심리학자인 크로가 어린이들을 위해 애쓴 공로상을 필라델피아 시장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때 카메라는 벽난로와 몇 개의 광원으로 어두운 집안을 비추고 있다. 관객은 그 어두움 한 구석에서 침실로 향하는 부부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본다. 그리고 표창 받은 크로의 업적에 자신을 대입한다. 크로 부부가 관음자에게 억압되어 있는 성적 욕망에 접근할 무렵, 영화는 새로운 인물을 끌어들인다. 욕실에 숨어있던 옛 환자 빈센트는 크로가 자신의 업적을 축하하는 순간을 역전시킨다. 빈센트는 자신의 인생이 크로의 잘못된 치료로 실패했다고 절규한다. 어린시절 크로를 찾았던 빈센트는 편모슬하의 심리불안증환자였다. 크로는 빈센트와 과거를 재빨리 기억하고 소통의 문을 두드린다. 빈센트는 이를 거절한 채 총으로 크로를 쏘고 자살한다. 크로가 총에 맞는 순간 카메라는 극부감(bird’s eye shot)으로 침대를 내려 담는다. 관객이 빈센트와 크로 그리고 이에 끼어 들 수 없던 아내의 엇갈린 소통을 관조하게 되는 순간이다. 카메라의 이동과 이어지는 암전의 순간을 통해 관객은 크로와 만족스러웠던 동일시를 서둘러 접는다. 잠시동안 자신들이 몰래 바라 봤던 상황의 충격을 정리하는 것이다.
미스터리 풀어내기, 둘 : 영화의 존재감-이면소통
관객은 모든 것이 미로를 향해 자리한 미스터리 영화 안에서 막힌 소통의 활로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나갈 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점점 의문의 덫에 빠져들고 좌절을 경험한다.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증가하는 것은 불만이지 불안감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스터리 영화에서 경험하는 불안감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미스터리 영화에서 인물의 등장만으로도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목적소통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관음자의 정체가 밝혀지거나 동일시의 분리를 경험하는 것은 미스터리 영화 전체를 휘감는 불안한 존재감을 위한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목적소통에 기인하지 않는 이러한 남은 부분은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완성도 높은 예술 작품들은 작가의 의도와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곳에서 수용자는 작가가 계획한 목적소통의 방향에 반응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것이 또 다른 소통의 실마리가 된다.
반백년의 철장을 넘어 금강산에 올랐던 최초의 몇 중 하나인 시인 고은은 만물상의 봉우리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미치겠구나! 이런 절경을 보고도 실성하지 않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 실성한 놈이다.” 그는 수만년 동안 스스로 있을 뿐인(自然) 금강산을 통해 소통의 체험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고의적인 행동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 존재 자체로부터 소통’이 미스터리 영화를 이루는 나머지 한 축이다. 소통하는 존재인 사람은 상영시간 내내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을 조작하고, 그 상징에 의존해서 두시간 전후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미스터리 영화의 힘은 목적소통의 이면(裏面), 즉 본래적인 속성을 통해 습득한 소통에 의해 증폭된다. 이러한 소통으로 인해 관객은 미스터리 영화 안에서 관음증이나 동일시의 틀을 넘어서 의문의 사건이 주는 아우라(aura)에 빠진다. 이것을 ‘이면소통(裏面疏通, background communication)’이라 하자.
이면소통은 의도나 목적을 넘어선 실존의 문제다. 자연 현상이 어떠한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관객의 입장에선 무의식적이고 불시적이다. 하지만 이면소통은 영화의 제작단계로 소급해 갈 때 목적소통과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하면 목적소통과 이면소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능동적인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 암실에서 이루는 소통은 이미 계획된 소통에 대한 수동적 반향에 가깝다. 이면소통의 의미는 수신자의 위치에 놓였던 관객이 송신자의 역할을 겸하면서 소통하는 목적소통과 달리 미스터리 영화를 이루는 정체성의 요소들을 통해 혹은 그 요소들간의 소통을 통해 수신자로서 반응한다는데 있다. 간단히 말하면 목적소통은 관객의 관람행위 자체에서 이면 소통은 관객이 느끼는 미스터리 영화의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3 : 8,9)
-소통 측면에서 바라본 미스터리 영화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시간부터 다루는 내용은 미스터리 영화를 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먼저 ‘목적소통’은 (관객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훔쳐보는 것과 주인공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면소통’은 미스터리 영화의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래도 이번엔 <식스센스>가 나와 좀 읽으시기 수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긴 많은데, 제 혀가 너무 짧습니다. 이제 두 번 째 입니다.
미스터리 풀어내기, 하나 : 관음자와 동일시-목적소통
매체의 관점에서 볼 때 영화의 수용자인 관객은 다른 매체의 수용자보다 능동적(active audience)이다. 이들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와 욕망의 요구를 강요 받는다는 수동성을 극복한다. 관객의 능동적인 관람을 통해 텍스트인 영화는 고정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내재된 것이 아니라 관객 개인을 통해 수용, 즉 보는 순간에 각기 다르게 생성된다. 관객은 단순히 영화라는 매체의 소비자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의 생산자인 것이다. 목적소통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관객은 다른 장르보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그 위치가 확고하다.
미스터리 영화는 긴장과 의문을 기반으로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혹은 사건이 관음자인 관객의 심리에 접근하는 모습이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관객들은 여러 단계의 변위(變位)를 경험하게 된다. 미스터리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현상은 관객을 관음자로서 더 굳게 자리 매김 시키고 꼼짝없이 그 안에 갇히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에서 미스터리 영화는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한다.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소통의 틀에서 감정을 조정 받는 수신자의 위치에 선다. 비슷한 시기에 관객은 영화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리고 동일시한 인물에게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는 송신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반대로 자신이 동일시한 영화 속의 인물과 함께 미스터리가 겹겹이 쌓여가면서 오히려 바라봄을 당하는 자리에 던져진다. 결국 결말에 이르러 영화가 제시한 미로를 헤쳐 나온 관객은 불이 켜진 극장의 현실을 인식하고 각자가 생산한 의미를 지닌 채 현실에 복귀하는 절차를 거친다.
우리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에서 관객이 어두움 속에서 몰래 살펴보던 관음자에서 관객동일시로 명백한 전위를 살필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크로 부부가 집에서 자축연을 벌이고 있다. 아동심리학자인 크로가 어린이들을 위해 애쓴 공로상을 필라델피아 시장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때 카메라는 벽난로와 몇 개의 광원으로 어두운 집안을 비추고 있다. 관객은 그 어두움 한 구석에서 침실로 향하는 부부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본다. 그리고 표창 받은 크로의 업적에 자신을 대입한다. 크로 부부가 관음자에게 억압되어 있는 성적 욕망에 접근할 무렵, 영화는 새로운 인물을 끌어들인다. 욕실에 숨어있던 옛 환자 빈센트는 크로가 자신의 업적을 축하하는 순간을 역전시킨다. 빈센트는 자신의 인생이 크로의 잘못된 치료로 실패했다고 절규한다. 어린시절 크로를 찾았던 빈센트는 편모슬하의 심리불안증환자였다. 크로는 빈센트와 과거를 재빨리 기억하고 소통의 문을 두드린다. 빈센트는 이를 거절한 채 총으로 크로를 쏘고 자살한다. 크로가 총에 맞는 순간 카메라는 극부감(bird’s eye shot)으로 침대를 내려 담는다. 관객이 빈센트와 크로 그리고 이에 끼어 들 수 없던 아내의 엇갈린 소통을 관조하게 되는 순간이다. 카메라의 이동과 이어지는 암전의 순간을 통해 관객은 크로와 만족스러웠던 동일시를 서둘러 접는다. 잠시동안 자신들이 몰래 바라 봤던 상황의 충격을 정리하는 것이다.
미스터리 풀어내기, 둘 : 영화의 존재감-이면소통
관객은 모든 것이 미로를 향해 자리한 미스터리 영화 안에서 막힌 소통의 활로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나갈 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점점 의문의 덫에 빠져들고 좌절을 경험한다.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증가하는 것은 불만이지 불안감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스터리 영화에서 경험하는 불안감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미스터리 영화에서 인물의 등장만으로도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목적소통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관음자의 정체가 밝혀지거나 동일시의 분리를 경험하는 것은 미스터리 영화 전체를 휘감는 불안한 존재감을 위한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목적소통에 기인하지 않는 이러한 남은 부분은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완성도 높은 예술 작품들은 작가의 의도와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곳에서 수용자는 작가가 계획한 목적소통의 방향에 반응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것이 또 다른 소통의 실마리가 된다.
반백년의 철장을 넘어 금강산에 올랐던 최초의 몇 중 하나인 시인 고은은 만물상의 봉우리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미치겠구나! 이런 절경을 보고도 실성하지 않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 실성한 놈이다.” 그는 수만년 동안 스스로 있을 뿐인(自然) 금강산을 통해 소통의 체험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고의적인 행동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 존재 자체로부터 소통’이 미스터리 영화를 이루는 나머지 한 축이다. 소통하는 존재인 사람은 상영시간 내내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을 조작하고, 그 상징에 의존해서 두시간 전후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미스터리 영화의 힘은 목적소통의 이면(裏面), 즉 본래적인 속성을 통해 습득한 소통에 의해 증폭된다. 이러한 소통으로 인해 관객은 미스터리 영화 안에서 관음증이나 동일시의 틀을 넘어서 의문의 사건이 주는 아우라(aura)에 빠진다. 이것을 ‘이면소통(裏面疏通, background communication)’이라 하자.
이면소통은 의도나 목적을 넘어선 실존의 문제다. 자연 현상이 어떠한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관객의 입장에선 무의식적이고 불시적이다. 하지만 이면소통은 영화의 제작단계로 소급해 갈 때 목적소통과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하면 목적소통과 이면소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능동적인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 암실에서 이루는 소통은 이미 계획된 소통에 대한 수동적 반향에 가깝다. 이면소통의 의미는 수신자의 위치에 놓였던 관객이 송신자의 역할을 겸하면서 소통하는 목적소통과 달리 미스터리 영화를 이루는 정체성의 요소들을 통해 혹은 그 요소들간의 소통을 통해 수신자로서 반응한다는데 있다. 간단히 말하면 목적소통은 관객의 관람행위 자체에서 이면 소통은 관객이 느끼는 미스터리 영화의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3 :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