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귀신이 온다] 붉은 눈

열혈연구 2001. 5. 17. 23:54
이번 주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한편 소개합니다. 실은 언제 개봉할지도 모르지만요. 지앙 원이라는 중국 감독의 <귀신이 온다>입니다. 이름은 낯설지만 아마 배우로 알고 계실지 모릅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멋지게 고량주를 뿜어내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으니깐요. 그의 전작 <햇빛 찬란한 나날들>은 비디오 가게에 있답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이 영화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귀신이 온다.
-붉은 눈

15세기경 항해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바다저편 진출은 본격적인 채비를 갖췄다.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의 발견자로 여전히 남겨있는 오해처럼, 역사는 오해와 정복의 기록을 갖는다. 서양의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에서 시작했지만 동양으로 흘러가며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었다. 신기술과 선교로 시장개방을 강요했던 그들은 끝내 일본이라는 동양의 한구석, 계급적 호전집단을 전도사 삼아 19세기 말엽 다시 부활을 맞는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겨울, 영화 <귀신이 온다>는 중국 북부 한 마을의 여염집에서 시작한다. 등잔불 흐릿한 아래에서 땀 흘리며 꿈틀거리던 남녀의 육신을 놀래키는 문 두드리는 소리. 마다산(지앙 원)의 떨리는 손끝이 열린 문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머리에 들이대는 ‘나’의 권총은 한가지 명령을 내린다. “짐 두 개를 다음달까지 일본군에게 들키지 말고 보관하라”

일본군의 야영지를 끼고 있는 동네에 가슴 뜨끔한 이 사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마다산의 정사처럼 평화를 깨뜨리는 불륜이 된다. 폭풍의 눈 속에 자리한 안정은 불안에 기초하고 있을 뿐 평안을 줄 수 없다. 여기에서 영화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실을 보이려 인물 속에 접근해 간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발국들은 민족적 우월성 주장의 공통점을 갖는다. 유럽 끝 쪽에서 시작한 비극의 불꽃은 동방의 끝에서 일본을 통해 연쇄반응을 했다. 그 결과 일본의 대동아 전쟁은 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 사람들의 가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일본의 지배를 경험한 중국에서 달려온 <귀신이 온다>가 정치에 타협해 명예보다 대우를 택한 서양 영화제 관계자들 가슴밖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잘 모른다.

장 위안 감독은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의 영화에서 번번이 얼굴을 찾을 수 있는 배우출신. <햇빛 찬란한 날들>에 이른 두 번째 연출작 <귀신이 온다>는 전작보다 역사의 중심에 다가선 용기가 풍겨난다. 덕분에 영화는 중국당국에서 가하는 갖은 고난을 받아야 했고 투사로써 남지는 못했을지라도 지앙 원 감독의 시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마다산에게 주어진 커다란 자루 둘 속에는 두 명의 군인이 들어있었다. 계속해서 ‘빠가야로’와 분노의 눈빛을 토하는 가미가제류의 일본인과 통역으로 삶을 연장하는 기회주의자류의 중국인이 그들이다.

상영시간이 160분에 이르는 길고 긴 영화는 크게 네 가지 단계를 갖는다. 먼저 ‘나’가 마다신의 집에 찾아와 짐짝을 맡기는 시작이 한단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각 마다산과 마을 주민들이 두 사람을 숨기려는 노력과 두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방법을 간구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은 두 사람의 일본군 복귀이후가 그것이다.

영화는 코미디의 코드를 깔아놓아 제국주의의 무게를 던 다음 소재의 비장함으로 관객의 감정을 마다산의 잘린 목에서 솟는 분수 같은 피처럼 마지막까지 몰아두었다가 터뜨리는 게 일품이다. 특히 마다산의 처형시 목에 기어올라온 개미는 단 두 편만에 자유로운 관객의 감정 조율 경지에 오른 지앙 원 감독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귀신이 온다>는 흔히 소재가 전쟁의 주변에 있는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가학과 피학 중심의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인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이는 대의를 부르짖어도 결국에는 생존을 위한 삶을 모두가 살아가고 있음을, 생산하는 자로서 농민들과 소멸시키는 자로서 군인들의 대조를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픈 과거는 굴욕과 광기의 일부였음을 바로 더욱 큰 힘으로 억압하는 체제였음을 영화는 잊지 않도록 도와준다. 바닥에 뒹군 마다산의 붉은 눈은 감겼더라도, 항상 새롭게 우리들의 눈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은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누가복음 3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