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파이란] 편지와 믿음의 상관관계

열혈연구 2001. 5. 9. 00:03
파이란 (01.05.07)
-편지와 믿음의 상관관계

@때 늦은 편지 한 통.
요즘 여러분의 우편함에는 어떤 우편물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메일 계정의 ‘받은 편지’ 말고 말입니다. 선전물 스티커에서 각종 청구서 정기구독하는 잡지 등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배달되는 우편물만 있지는 않은지요.

어느날 강재(최민식)는 부인의 사망통지를 받는다. 그는 별 감흥 없이 때묻은 점퍼차림으로 아내가 죽은 바닷가로 향한다. 대진행 기차 안에서 후배녀석이 아내가 쓴 편지 한 통을 건넨다. 송해성 감독의 절치부심 재기작 <파이란>은 자신을 찾는 매개로 편지를 이용한다. 연하장이 많이 줄었다는 기사 안 수치가 해를 거듭하며 퍼센티지를 올려가는 근래, 새삼스럽게 손으로 편지지에 쓴 편지 들고 나왔다. 주인공 강재는 아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아내의 시체를 확인하고 사망서를 작성하러 가는 길일 뿐이다. 그리고 지리멸렬한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줄 편지 한 통을 태연한 채 읽기 시작한다.

영화는 인천항의 입국심사대에서 시작한다. 심사관의 내려보는 눈초리를 지나 떠나는 택시 뒤통수에 인사를 꾸벅하는 중국인 파이란(장백지)은 친척을 찾아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갈 여비도 없는 그녀는 물에 빠진 이가 가랑잎을 잡듯 직업소개소를 찾아간다. 종이 위에 쓰여진 편지는 소식을 전하는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 안에는 쓰는 이의 필체가 있고 행간과 자간이 있다. 때로는 진하게 눌러쓴 때로는 흐느적 거리며, 쓰는 이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편지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소통체이다. 또 물리적 실재감과 더불어 편지에 다른 의미를 얹어 놓는 것은 시의성의 어긋남이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선 전화나 메일 같은 동시적 매체가 훨씬 유용하다. 편지는 글을 쓰던 당시의 쓰는 이의 심성을 얼마 후 받는 이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늦은 밤 썼다 아침에 찢어버리는 어색한 감상처럼 마음은 조금 간격을 두고 전해질 때 훨씬 간절한 법이다.

겨우 배운 한글로 써내려 간 파이란의 편지는 화장을 하고도 유골을 든 채 돌아오기까지 이틀동안 강재를 뿌리 채 흔들어 놓는다. 여기서 감상을 북돋는 것은 다름아닌 거리감이다. 파이란은 중국에서 건너온 여인이다. 동그란 얼굴 모양만큼 손짓 몸짓으로 이야길 나눌 수 밖에 없던 그녀는 뒷골목에서 욕설을 입에 물고 다니는 강재와 시작부터 멀리 서있다. 둘은 얼굴을 알 기회도 아니 의도도 갖지 않고서 지리적으로 떨어져 생활하게 된다. 거기에 얼마간의 시간을 더하고 편지는 썼던 시점의 한참 후에야 강재의 손에 전해진다. 영화에서 강재가 편지를 읽는 씬은 이렇다. 달려가는 열차 안, 후배가 전해준 파이란의 편지는 무심한 손길과 피식거리는 웃음으로 개봉된다. 카메라가 또박또박 흔들흔들 거리는 파이란의 필체를 담을 때 장백지의 어색한 편지 읽기가 곁들린다. 얼굴도 모르는 아내의 죽은 후 건네진 편지라는 강재와 파이란의 심리적 시간적 거리가 갓 한글을 배운 어린애의 필체와 혀가 말린 외국인 억양으로 표현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벌써 보름 전 일입니다. 아무도 없는 옆집 문을 두드리는 우체부 아저씨를 위해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답니다. 우편물을 대신 받아 놓으려 말입니다. 잠시 후 빨간 우편 상자가 달려 있는 모터사이클을 향해 그가 돌아가면서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우편함에 안 들어가서 문 뒤에 두었어요.’ 그의 말처럼 커다란 봉투가 놓여 있었습니다. 멀리 외국에서 날라온 봉투였습니다. 그 안에는 엽서 몇 장과 파란 일기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근 일년 전에 스쳐가듯 했던 이야길 보낸이는 잊지 않고 있었나 봅니다. 고마움에 글썽이며 애꿎은 봄 날씨의 꽃가루를 탓했답니다.


@믿음은 구원을 품는다
종교를 갖고 있다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종교가 우러름을 기반으로 하고 죄씻음과 선한일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공통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우러름(仰)이 아닌 믿음(信)입니다.

강재가 등장하는 첫 장면은 경품 게임장이다. 게임기 앞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그의 발 밑에는 빈 소주병이 굴러 다닌다. 그리고 토스터기 하나 타들고 오락실을 나서는 강재 앞에 두목 용식의 차가 멈춰선다. 강재는 밑바닥 인생의 밑바닥을 기어 다닌다. 뒷골목 행세는 하지만 깔끔하게 하는 일 하나 없고, 옛 동기였던 용식은 이제 두목이 되었다. 매번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고 맡았던 비디오 대여점마저 뺏긴 강재는 술집 삐끼로 내려 앉은 상태다. 그래도 집에선 포르노를 보고 라면과 맥주를 빨고 레슬링 흉내나 내는 게 전부다. 호적에 파이란을 처로 올린 것도 돈뭉치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일 뿐이다.

<파이란>에는 폼나는 뒷골목 세계가 없다. 최근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좋은 제목의 영화 <친구>에서 만큼 멋진 싸움도 깔끔한 양복도 비싼 유흥도 없다. 그들은 겨우 동네 슈퍼 아줌마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고 사무실에서 쭈그려 앉아 자장면이나 먹는 게 일상이다. 매상 떨어뜨린 마담을 쥐어패고 얼떨결에 죽인 죄를 뒤집어 씌우려 무릎을 꿇는 비겁함도 서슴지 않는다. 그 안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얻어맞고 상처 아물 날 없는 강재는 세상을 떠난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아내 파이란의 편지로 구원을 경험한다.

파이란은 세탁소 일을 하고 있다. 강재의 끔찍한 삶 뒤에 힘찬 표정으로 빨래를 밟아대는 그녀의 모습은 그래서 더 선연하다. 그녀의 자리가 생각보다 단단하지 못해 영화 속에선 별세계 인물처럼 부유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구원자로서 구별을 선명하게 하기도 한다. 파이란에게선 성녀의 이미지가 언뜻 언뜻 스쳐간다.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접대부의 자리를 피로써 모면하며 세탁소에 자리한다. 그녀가 가게에서 사 놓은 것은 찾아오지 않을 강재의 칫솔. 차곡 차곡 개어놓은 옷가지와 병상에서 써내려간 편지에는 원망을 숨기고 믿음을 드러낸다. 돈을 위해 결혼해준 강재, 술집에 팔려 했던 후배, 하루도 못 봐준다는 소개소 사람, 파이란의 병세조차 모르며 일을 시킨 주인아줌마까지 파이란의 편지 속 말처럼 주위 사람들이 절대로 ‘친절’한 것 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파이란은 모든 이들의 과오를 편지 속에 덮어버린다. 그 편지를 읽은 강재가 방파제에 앉아 쏟아내는 눈물의 깊이는 파이란의 믿음에 정확히 반응한다. 그리고 강재는 떠나간 그녀의 믿음처럼 가장 친절한 사람의 첫걸음을 걸으려 한다. 가벼운 세상에서 가볍지 않은 단 한 사람. 세상을 구원하는 영혼의 무게는 하나로도 충분하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은 상대의 살아감에 있어 구원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이렇게 만큼 지내고 있는 것도 우리를 믿어주신 부모님의 덕이 큽니다. 눈 앞에 놓인 달력의 ‘어버이 날’이 선명하군요.


@눈꺼풀에 콩깍지가
농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못생긴 두 사람이 사귄다면 이를 뭐하고 할까? 답은 ‘정말 사랑하는구나!’ 사랑은 상대의 좋은 점만을 보도록 강요합니다. 주위의 소리나 상대의 흠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죠. 이를 눈꺼풀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사랑하게 되니 상대가 뽀얗게 보이는거죠. 하지만 씌어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이란이 강재를 사랑한 게 그 예입니다.

<파이란>에 유난히도 많이 등장하는 사물이 있다. 바로 사진, 거울과 창이 그것이다. 흔히 사진은 시간을 붙들어 놓는데, 거울은 자아의 분열 심리적 이탈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또 창은 보통 프레임내의 프레임화로 대상을 객관화하거나 소통의 관문 혹은 관음증의 창구로 쓰인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진과 거울 그리고 창은 영화를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다. 강재는 파이란의 유골을 옆구리에 낀 채 세탁소에 붙어 있는 숙소를 찾아간다. 그의 눈에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액자에 꽂혀 책상에 놓여있는 자신의 증명사진이다. 사진 중에서도 증명사진은 보통 피사체가 되는 한인물의 가장 좋은 상태를 담는다. 특별한 목적이나 의미 없는 노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기회를 제공한 강재에게 감사를 표하는 파이란의 행동은 여기서 설명할 수 있다. 혈육이 없는 그녀는 유일한 가족이 된 강재에게 막연한 애정과 의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책상에 놓인 사진을 보며 ‘당신은 항상 웃고 있습니다.’라고 되뇌인 파이란의 자기최면과 어울려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남는 커다란 이유가 된다. 이어 강재는 서랍을 열어 손거울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에 이어 슬픔과 현실을 알아가는 가장 비참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또 하나의 장면을 보자. 파이란은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게 된 강재를 보기위해서 인천을 찾는다. 비디오 가게 앞에서 그녀는 바로 그 거울을 꺼내 자신을 비춰본다. 병약하지만 사랑의 기대에 차 있는 자신을 보던 파이란 앞에서 강재는 경찰에 의해 압송당한다. 유일한 희망이 꺾이는 파이란의 현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처럼 거울은 자신을 대상화 해 들여다보면 자각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번엔 창을 바라보자. <파이란>에서 창은 거울이 이상과 현실의 어긋남을 표현함과는 달리 현실 자체에 집중한다. 역시 한 장면을 짚어보면서 이야기하자. 강재가 용식의 사무실을 찾는 씬이다. 이를 카메라는 건물의 밖에서 뽀얗게 더러운 창문을 통해 담고 있다. 그리고 사운드는 창문 밖 세상과 단절된 채 창문 너머 사무실 안을 담는다. 사운드로 연결된 화면은 용식이 자신의 살인 혐의를 대신해달라고 부탁하는 실내씬으로 이어진다. 쓰레기로 살아가는 강재를 더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으려는 뒷 거래가 더러운 창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다. <파이란>에서 창은 주로 깨어져 있거나 더럽혀져 있다. 그 창들 너머에는 호기로운듯하지만 비참하고 씩씩한듯하지만 외로운 강재와 파이란의 현실이 담겨 있다. 그들의 삶은 더러운 창처럼 어렵더라도 깨어진 창처럼 부서지더라도 여전히 창틀에 끼워져 있을 뿐이다. 파이란이 세탁소에서 한 처음이 유리로 된 문을 닦는 일인 것과 남겨 놓은 거울이 강재의 마음을 돌리는 어귀에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한 난시인가 근시가 있다는 미국의 한 여배우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질문은 ‘시력이 좋지 않은데 렌즈나 안경을 안 쓰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정도였을 텝니다. 그녀의 답인 즉슨 ‘안경을 끼지 않은 채로 야경을 보면 얼마나 멋진 줄 아세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좋은 필터 같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이 통과한 후 아름다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 세상에서나마 강재와 파이란이 따뜻한 사랑을 이루길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