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캐스트 어웨이] 天上天下 唯我獨存
열혈연구
2001. 2. 8. 23:10
캐스트 어웨이
-天上天下 唯我獨存 (2001. 2. 4)
@요나 이야기 : 선택 받은 자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약속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 : 1~3)
요나가 살았던 시절은 여로보암 2세(B.C 793~753) 중엽이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던 솔로몬 시대의 판도에 가깝게 땅을 회복한 북조(北朝) 이스라엘 왕이었다. 이곳에 등장하는 요나는 ‘악독으로 가득찬 이방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지만 거절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절대신인 여호와에 대한 요나의 사랑은 선민의식(選民意識)의 잣대에 의해 가려지고 만다.
로버트 저멕키스 감독의 <캐스트 어웨이>의 밑바탕에는 외로움을 통한 자의식의 확인 이전에 철저한 선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이 만들어낸 체제의 견고함으로 모든 벽을 무너뜨린 먼 청도교 자손들의 피가 어느덧 황금과 약탈만 있던 무법(無法) 서부시대의 폭을 넓히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엉뚱한 고백의 장(場)이다.
영화는 미국 시골의 한 집에서 출발하는 소포의 경로를 따라 간다. 이미 8,90년대를 주도한 스필버그 사단의 일원답게 절묘한 편집과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같은 카메라 워크로 순식간에 러시아까지 날아간다. 소포가 바람둥이 고객의 손에 도착함과 동시에 또 다른 포장하나가 ‘Fedex’ 란 이름도 선명한 채 꼬마의 손에 들려 붉은 광장을 가로지른다.
요나가 탄 배가 바다에 들어서자 바다에는 폭풍이 불기 시작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사공은 각기 자신의 신을 부르기도 하고, 배에 가득한 물건을 바다에 던져 가볍게 하려는 등 살기 위한 애를 쓰고 있을 때. 모든 사건의 근원, 요나는 배 맨 밑층에 내려가 그저 자고 있을 뿐이다. 결국 뱃사람들은 재앙의 시작을 찾는 제비 뽑기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제비는 요나에게 당한다.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페덱스의 시스템 엔지니어. 지금은 모스크바에서 느려 터진 러시아인들의 분류작업과 배달체계를 손 보고 있는 중이다. 3시간 4분 안에 창고에 가득 쌓인 화물들을 공항에 옮기라고 그들을 다그치면서 멤피스에 있는 약혼녀 켈리(헬렌 헌트)에게 사랑한다는 위성전화 한 통도 있지 않는 현대인.
거대한 대립만 존재하던 냉전 시대는 지났다. 철과 죽의 장막도 개혁 개방의 물결에 무너진 지 오래다. 한때 소비에트 연방의 핵심이던 러시아는 겨우 자본주의의 돈 놀음에 배우기를 안갓힘 쓰고 있을 뿐이다. 아메리쿠스에서 콜롬부스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은 결국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자본의 선택을 받아 러시아인들을 교육시키고 귀환하는 척은 가족들이 모여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켈리와 결혼 발표를 하려한다. 하지만 눈치 없는 호출기는 울려대고 그를 12월 31일까지 빌려 쓰자 한다. 선민은 부름에 응해야 하는 법. 켈리에게 건넨 키스를 뒤로하고 또 다시 항공기에 올라탄다.
제비를 뽑은 요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인해 풍랑이 일었음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요나의 고백을 듣고 스스로 살고자 함께 힘써 보지만 점점 바다는 거칠어 진다. 끝내 요나는 재물이 되어 바다에 던져지고 거짓말같이 풍랑은 그친다. 커다란 물고기에게 먹힌 바 된 요나는 삼일삼야(三日三夜)를 커다란 물고기 배 안에 지낸다. 그리고 회심(回心)한다.
@요나 이야기 : 선택하는 자로
<캐스트 어웨이>는 삼단 구성을 하고 있다. 러시아와 멤피스를 오가는 척의 일상과 사랑, 조난 후 섬에서 4년간, 그리고 4주후. 시간과 돈을 최우선으로 하는 문명사회와 온기를 느낄 동물 하나 없는 고도(孤島)의 대조 사이에는 바다가 자리한다. 능률과 효율만 따지던 한 도시인이 비능률 비 효율적인 섬에서 사는 4년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의 변화를 142분 동안 너무 빠르지 않게 보여준다. 그는 선택된 게 아닌(被選擇) 선택해야 하는(要選擇) 존재였던 것.
요나의 뒷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결국 요나는 처음 여호와의 명령대로 니느웨성에 가 심판이 임박했음을 외치고, 그곳에서 온 성 전체가 회개하는 역사를 체험한다. 첫 단락에서 요나처럼 선택 받은 자로서 살고 있던 척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섬에서 요나를 넘어서 선택 하는 자로 진보한다. 저멕키스는 <포레스트 검프> 쯤에서 선보인 우연의 동기를 이용해 척의 변화를 영화 곳곳에 담아 차근차근 나아간다. 이에 대한 시퀀스 몇을 이어보며 이를 살펴보자. 먼저 척의 이전 모습이다.
하나 : 척은 켈리와 헤어진 크리스마스 날 출발하려는 비행기 앞 자동차에서 서로 선물을 나눈다. 척이 받은 선물은 켈리의 사진이 들어 있는 회중시계.
둘 : 이륙한 비행기는 험악한 기상조건 아래 태평양 가운데로 추락하던 찰나. 척은 손을 뻗어 뒹굴고 있는 시계를 움켜쥔다.
셋 : 폭풍 속을 떠다니던 척의 구명보트는 밤새 이름 모를 섬에 도달한다.
넷 : 날이 밝고 해변에서 눈을 뜬 그가 제일 먼저 꺼낸 것은 다름아닌 무선호출기. 그 다음이 켈리의 사진이 담긴 시계다. 결혼 날짜를 발표하자던 중요한 시점에서 일 때문에 헤어지게 되는 척과 켈리의 관계를 회중시계와 호출기를 통해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난 당한 시점에서 척은 사랑을 놓칠 순 없지만, 일이 우선인 이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하지만 섬을 탈출하고 사회로 복귀한 척의 모습은 달라져 있다. 계속 따라가 보자.
다시 하나 : 얼마 안 되는 무인도 생활 동안 이전까지 그를 지켜 주었던 문명의 이기들은 하나 둘 쓸모 없어진다. 전지 닳은 손전등, 물먹은 호출기처럼. 그렇게 4년 후.
다시 둘 : 멤피스로 돌아온 척은 회사와 동료들의 환대에 묻혀 지낸다. 조난 전 의사를 알아봐주마 했던 친구에게 아내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을 전할만큼 여유도 찾는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친구의 한마디. “내일이면 모든 게 돌아올 꺼야.”
다시 셋 : 늦은 밤 스위치로 점멸 되는 문명의 이기, 전등을 만지다 깨달은 척은 비오는 길을 달려 어느 집 앞에 이르자 택시에서 내린다. 켈리를 찾아 온 것.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지만 그새 벌어진 간격, 또 다시 낳을 상처를 마주하고 돌아선다.
다시 넷 : 척은 조난 기간 내내 들고 있던 날개 그려진 상자를 배달해 주고 떠날 길을 찾고 있다.
친구의 말대로 사회적 모든 위치로 복귀하기로 한 날. 그는 목적 없는 여정에 올라 갈 길을 고르고 있다. 피선민(被選民)에서 선택인(選擇人)으로 돌아 선 것.
@파리대왕 : 아이들과 대조법
윌리엄 골딩의 8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파리대왕]은 과거의 일로만 생각되던 표류기를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 놓았다. 누구나 익히 잘 아는 다니엘 데포의 18세기 로빈슨 크루소와도 그를 되짚은 투르니에의 1969년 작품에도 없는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들의 야만성(野蠻性)을 끔찍하리만큼 솔직히 드러내보인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순수한 영혼으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어린이를 통해. 무인도에 상륙한 것은 다름아닌 어린이들이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캐스트 어웨이>에서 보여주는 무인고도(無人孤島)의 삶은 작년 한해 미 대륙을 뜨겁게 달궜던 TV프로그램 ‘서바이벌’의 생생한 실제감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오락 프로그램의 한 꼭지로 담아 선보인 적 있다. 거기서 보여준 문명 없는 삶에 놓여진 현대인들의 모습은 개인의 이기심과 생존의 욕구사이에서 오는 갈등, 즉 야만이라고 무시하던 모든 생활 방식을 몇 안 되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카메라에 노출됨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볼 때 배구공 윌슨을 토템에서 카운셀러까지 역할 변경시켜 이성을 간직한 척의 섬은 ‘없는 곳’,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Harry Hook감독의 <파리대왕>은 바닷속에서 물 위로 올라가는 소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섬에 표류해 도착한 소년들-켈리의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위안하는 척처럼 이들도 이차성징(二次性徵) 이전의 억제된 성이다.-은 대장을 뽑는다. 소년단에서 대령으로 가장 높은 계급이면서 논리적이고 균형감 있는-달리 말하면 ‘가장 어린이 답지 않은’- 랄프가 이들을 이끌게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장 큰 무기, 나이가 많은 잭이 하나 둘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결국 둘의 대결은 구조를 요청할 불을 지피는 데서 첫 불꽃을 튀긴다.
척의 섬 생활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존 교본처럼 상세하게 설명된다. 그 중 야자열매를 따먹으려다 발견한 돌도끼와 나무를 이용한 불쏘시개는 상당한 성취감을 함께 느끼게 한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본 것처럼 처음 척은 손바닥 사이에 나무 막대를 놓고 돌려 바닥에 놓인 나무토막과 마찰을 일으키지만 밤새 하얀 연기조차 보지 못한다. 피를 본 후에야 그가 찾은 방법은 받침대의 깨진 틈새를 이용한 문지르기. 문명의 시작인 불을 ‘발견’한 그는 세상이 제 것인 양 소리치며 춤을 춘다.
소년 들은 섬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지피려 한다. 불 붙이기 대결은 피기라 불리는 소년의 돋보기 안경을 이용한 랄프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지만 정작 문제는 거기서 시작한다.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 잭 측으로 인해 장작들이 주변의 풀들에 불을 붙이는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일대는 불바다가 된다. 제어할 수 없는 문명의 시작.
자살을 하려 절벽위에 올라서기도 했던 척은 혼자 뿐인 섬생활을 무던하게 잘 해낸다. 윌슨을 내던져 놓고 금세 애절하게 찾는 것처럼 신기하리만치 이성을 잘 간수하며 말이다. 그에 반해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점차 야만과 광기에 접근해 간다. 규칙으로 답답한 랄프를 소년들은 하나 둘 떠난다. 그들은 날 세운 나무창에 홀려 소리를 치며 섬을 뛰어다닌다. 잭 일당은 불과 무기를 만들어내는 안경과 칼을 약탈해 손에 넣고 랄프와 피기를 압박한다. 이성으로 복귀를 외치던 피기가 돌덩이에 맞아 쓰러져 죽자 홀로 남은 랄프는 그들의 사냥감이 되어 숲속으로 쫓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보다 영화 <파리대왕>이 선보이는 이 마지막 시퀀스는 훨씬 강렬한 야만과 광기의 종말을 선물한다.
불타는 정글을 헤쳐 나오던 랄프는 숲의 끝에서 그만 넘어지고 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맛물려 지휘관의 앙각샷 (仰角:low angle shot)이 이어진다. 바짝 뒤를 쫓아오던 첫번째 소년부터 소리를 치며 연달아 오던 마지막 소년까지 멈춰 서 멀뚱해 하는 그룹샷과 울음을 터뜨리는 랄프의 부감샷(俯瞰:high angle shot) 그리고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무인도에서 이룬 소년들의 사회와 그들의 규칙이 어른이라는 기존권력-그것도 군인으로 대표되는 절대성-앞에서 한갓 ‘전쟁놀이’로 전락하면서 현시와 현실을 되찾는 빠른 전환을 한다.
<캐스터 어웨이>에는 전환의 자리에 커다란 고래를 캐스팅 해놓았다. 4월의 육풍과 조류 힘을 입어 탈출에 성공한 척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맞은 밤하늘. 그의 곁에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뿜으며 지나간다. 그리고 눈을 꿈뻑이며 그를 지켜본다. 그 후 바다에 사는 포유동물인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인간에 가장 가까운 바다생물로서 고래는 척의 사회로 복귀에 톡톡한 역할을 해낸다. 윌슨과 아쉬운이별의 순간을 척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좌절에 눌려 탈진한 채 쓰러져 있는 그을 깨워 지나가는 화물선을 보게도 만든다. 척은 그 다리를 건너 처음의 시간 아닌 위치로 돌아온다.
@처음과 끝 그 닮은 꼴.
저멕키스는 생각보다 꼼꼼한 바느질로 영화 곳곳을 빈틈없이 메워놓고 있다. 비록 이것이 위태로운 가족주위의 상처를 덮거나 답답한 자본주의의 빈틈을 가려 놓았더라도 그래서 물증(物證)은 있으나 심증(心證)이 없는 밋밋한 것일 지라도 말이다.
<캐스트 어웨이>는 첫 꼭지에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미국의 한 시골에서 시작한다. ‘OK 목장’정도라고 쓰여 있을 만한 솟을 대문에 ‘딕과 레베카의 집’이란 글이 선명하다. 딕은 러시아에 있던 그 바람둥이. 레베카는 날개를 만드는 조각가다. 척이 섬에 있는 내내 뜯지 않은 유일한 상자이자, 탈출의 모티브고 마지막 임무였던 날개를 만든 조각가다. 날개가 그려진 소포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척에 의해 ‘레베카의 집’ 문 앞에 놓여진다. 레베카의 날개처럼 물건, 딕은 사라져 버렸고 이 둘은 섬에서 뜯은 상자 속에 있던 이혼합의서를 주고 받은 채 척과 켈리의 관계처럼 단절되었음을, 집 입구를 보이는 한 것으로 모두 설명한다.
저멕키스 감독은 이런 장난을 영화 곳곳에서 눈에 보이도록 감춰놓는다. 섬에서 척의 절친한 벗이었던 배구공 윌슨은 제작회사이기도 하고 실제 톰 행크스의 부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또 척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찾아가 치료 받았어야 했던 치과의사와 꼬리를 물고 켈리와 결혼을 한 채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모두를 저멕키스를 통해 이야기하기엔 아무래도 톰 행크스에게 미안한 감이 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94년 한 TV 토크쇼에서 얻은 감상을 바탕으로 작가 윌리엄 보로일스 주니어를 끌어들여 기획을 했고 제작에다 일인극에 가까운 영화의 주연을 했으니 말이다.
그의 전적은 대충 이런 식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볼케이노>, <빅>에서 보여준 가벼운 코믹에서 <스플레쉬>를 통한 성장을 지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통해 연인으로 자리하더니 <필라델피아>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연기자로 자리를 굳히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그린 마일>같은 밟은 데 또 밟기를 하고 있는 톰의 갈 길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이미 TV 시리즈 연출에서 극영화 제작에 손을 댔으니 남은 것이라곤 스필버그의 왕좌를 나눠 앉는 일 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눈에 담긴 톰 행크스의 모습은 또 다른 톰, 크루즈와 사뭇 구별된 방향을 취하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벌써 꽤나 오래 ‘미국인’을 대표하는 이 둘을 ‘T2’라 하자.
톰 행크스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보여준 미국인은 어린이의 꿈을 간직하고 상처 받거나 그럴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는 이상적인 미국의 과거다. 스스로를 개척자라고 우기며 약탈을 일 삼았으면서도 선민으로서 자존심을 적들에 대한 거짓 비하(卑下)를 통해 나타냈던 자신들의 좁은 마음을 충분히 덮어줄 온화한 이미지의 투영체인 것이다. 그가 나오는 모든 영화들에서 대립자들과 화해하는 인물로 보여지는 것은 역사를 고쳐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표현이다.
반면 T2의 남은 하나 톰 크루즈는 미국인 자신들이 지향하는 미래, 이상형이다. <7월 3일생>을 기점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난 그는 <아웃사이더>의 브랫팩들 사이에 유일하게 건재한 사실 자체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톰 크루즈는 드라마 안에서 스토리를 좌지우지할 연기력까지 성장한 행크스와 달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지정의체(知情意體)가 완벽히 조화된-를 조합해 입지를 다져 놓았다. 최근 <매그놀리아>나 <와이즈 와이드 샷>같은 외도도 없진 않지만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로 돌아오는 그를 잊지 말라. 최근 이혼으로 아쉽게 그들의 꿈에 상처가 났지만, 영국에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미국인이다.
T2가 이룬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미국인상에서는 한 세대 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를 통해 보여 준 솔직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성추문으로 얼룩져도 청년시절 불장난도 최대 권력 접근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미국의 현실을 이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노시스(Gnosis : 靈知)적 지도자를 요구했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약함을 헐리우드에서도 그대로 반영했던 그들은 중세의 마녀 심판을 거쳐 자기 반성이 냉소로 변환했던 것처럼 이제는 자본에 의지(依支)를 의지(意志)로 삼고 있다.
어쨌든 저멕키스와 행크스는 <캐스트 어웨이>로 2001년의 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톰의 전혀 돋보이지 않은 연기도 ‘맛이 우러난 진짜’라고 판단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박스오피스 수입처럼 아카데미의 노인장들께서 손을 들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저멕키스는 예상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짚어 주는 친절한 이야기꾼의 흥행감각에 대한 확인과 규모에 의지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긴장을 불러 들이는 비행기 추락씬처럼 긴장감에 대한 도전을 표면에 드러냈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그런 면에서 <캐스트 어웨이>의 쉬는 시간에 찍은 습작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 : 10~11)
-天上天下 唯我獨存 (2001. 2. 4)
@요나 이야기 : 선택 받은 자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약속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 : 1~3)
요나가 살았던 시절은 여로보암 2세(B.C 793~753) 중엽이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던 솔로몬 시대의 판도에 가깝게 땅을 회복한 북조(北朝) 이스라엘 왕이었다. 이곳에 등장하는 요나는 ‘악독으로 가득찬 이방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지만 거절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절대신인 여호와에 대한 요나의 사랑은 선민의식(選民意識)의 잣대에 의해 가려지고 만다.
로버트 저멕키스 감독의 <캐스트 어웨이>의 밑바탕에는 외로움을 통한 자의식의 확인 이전에 철저한 선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이 만들어낸 체제의 견고함으로 모든 벽을 무너뜨린 먼 청도교 자손들의 피가 어느덧 황금과 약탈만 있던 무법(無法) 서부시대의 폭을 넓히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엉뚱한 고백의 장(場)이다.
영화는 미국 시골의 한 집에서 출발하는 소포의 경로를 따라 간다. 이미 8,90년대를 주도한 스필버그 사단의 일원답게 절묘한 편집과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같은 카메라 워크로 순식간에 러시아까지 날아간다. 소포가 바람둥이 고객의 손에 도착함과 동시에 또 다른 포장하나가 ‘Fedex’ 란 이름도 선명한 채 꼬마의 손에 들려 붉은 광장을 가로지른다.
요나가 탄 배가 바다에 들어서자 바다에는 폭풍이 불기 시작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사공은 각기 자신의 신을 부르기도 하고, 배에 가득한 물건을 바다에 던져 가볍게 하려는 등 살기 위한 애를 쓰고 있을 때. 모든 사건의 근원, 요나는 배 맨 밑층에 내려가 그저 자고 있을 뿐이다. 결국 뱃사람들은 재앙의 시작을 찾는 제비 뽑기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제비는 요나에게 당한다.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페덱스의 시스템 엔지니어. 지금은 모스크바에서 느려 터진 러시아인들의 분류작업과 배달체계를 손 보고 있는 중이다. 3시간 4분 안에 창고에 가득 쌓인 화물들을 공항에 옮기라고 그들을 다그치면서 멤피스에 있는 약혼녀 켈리(헬렌 헌트)에게 사랑한다는 위성전화 한 통도 있지 않는 현대인.
거대한 대립만 존재하던 냉전 시대는 지났다. 철과 죽의 장막도 개혁 개방의 물결에 무너진 지 오래다. 한때 소비에트 연방의 핵심이던 러시아는 겨우 자본주의의 돈 놀음에 배우기를 안갓힘 쓰고 있을 뿐이다. 아메리쿠스에서 콜롬부스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은 결국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자본의 선택을 받아 러시아인들을 교육시키고 귀환하는 척은 가족들이 모여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켈리와 결혼 발표를 하려한다. 하지만 눈치 없는 호출기는 울려대고 그를 12월 31일까지 빌려 쓰자 한다. 선민은 부름에 응해야 하는 법. 켈리에게 건넨 키스를 뒤로하고 또 다시 항공기에 올라탄다.
제비를 뽑은 요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인해 풍랑이 일었음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요나의 고백을 듣고 스스로 살고자 함께 힘써 보지만 점점 바다는 거칠어 진다. 끝내 요나는 재물이 되어 바다에 던져지고 거짓말같이 풍랑은 그친다. 커다란 물고기에게 먹힌 바 된 요나는 삼일삼야(三日三夜)를 커다란 물고기 배 안에 지낸다. 그리고 회심(回心)한다.
@요나 이야기 : 선택하는 자로
<캐스트 어웨이>는 삼단 구성을 하고 있다. 러시아와 멤피스를 오가는 척의 일상과 사랑, 조난 후 섬에서 4년간, 그리고 4주후. 시간과 돈을 최우선으로 하는 문명사회와 온기를 느낄 동물 하나 없는 고도(孤島)의 대조 사이에는 바다가 자리한다. 능률과 효율만 따지던 한 도시인이 비능률 비 효율적인 섬에서 사는 4년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의 변화를 142분 동안 너무 빠르지 않게 보여준다. 그는 선택된 게 아닌(被選擇) 선택해야 하는(要選擇) 존재였던 것.
요나의 뒷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결국 요나는 처음 여호와의 명령대로 니느웨성에 가 심판이 임박했음을 외치고, 그곳에서 온 성 전체가 회개하는 역사를 체험한다. 첫 단락에서 요나처럼 선택 받은 자로서 살고 있던 척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섬에서 요나를 넘어서 선택 하는 자로 진보한다. 저멕키스는 <포레스트 검프> 쯤에서 선보인 우연의 동기를 이용해 척의 변화를 영화 곳곳에 담아 차근차근 나아간다. 이에 대한 시퀀스 몇을 이어보며 이를 살펴보자. 먼저 척의 이전 모습이다.
하나 : 척은 켈리와 헤어진 크리스마스 날 출발하려는 비행기 앞 자동차에서 서로 선물을 나눈다. 척이 받은 선물은 켈리의 사진이 들어 있는 회중시계.
둘 : 이륙한 비행기는 험악한 기상조건 아래 태평양 가운데로 추락하던 찰나. 척은 손을 뻗어 뒹굴고 있는 시계를 움켜쥔다.
셋 : 폭풍 속을 떠다니던 척의 구명보트는 밤새 이름 모를 섬에 도달한다.
넷 : 날이 밝고 해변에서 눈을 뜬 그가 제일 먼저 꺼낸 것은 다름아닌 무선호출기. 그 다음이 켈리의 사진이 담긴 시계다. 결혼 날짜를 발표하자던 중요한 시점에서 일 때문에 헤어지게 되는 척과 켈리의 관계를 회중시계와 호출기를 통해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난 당한 시점에서 척은 사랑을 놓칠 순 없지만, 일이 우선인 이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하지만 섬을 탈출하고 사회로 복귀한 척의 모습은 달라져 있다. 계속 따라가 보자.
다시 하나 : 얼마 안 되는 무인도 생활 동안 이전까지 그를 지켜 주었던 문명의 이기들은 하나 둘 쓸모 없어진다. 전지 닳은 손전등, 물먹은 호출기처럼. 그렇게 4년 후.
다시 둘 : 멤피스로 돌아온 척은 회사와 동료들의 환대에 묻혀 지낸다. 조난 전 의사를 알아봐주마 했던 친구에게 아내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을 전할만큼 여유도 찾는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친구의 한마디. “내일이면 모든 게 돌아올 꺼야.”
다시 셋 : 늦은 밤 스위치로 점멸 되는 문명의 이기, 전등을 만지다 깨달은 척은 비오는 길을 달려 어느 집 앞에 이르자 택시에서 내린다. 켈리를 찾아 온 것.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지만 그새 벌어진 간격, 또 다시 낳을 상처를 마주하고 돌아선다.
다시 넷 : 척은 조난 기간 내내 들고 있던 날개 그려진 상자를 배달해 주고 떠날 길을 찾고 있다.
친구의 말대로 사회적 모든 위치로 복귀하기로 한 날. 그는 목적 없는 여정에 올라 갈 길을 고르고 있다. 피선민(被選民)에서 선택인(選擇人)으로 돌아 선 것.
@파리대왕 : 아이들과 대조법
윌리엄 골딩의 8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파리대왕]은 과거의 일로만 생각되던 표류기를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 놓았다. 누구나 익히 잘 아는 다니엘 데포의 18세기 로빈슨 크루소와도 그를 되짚은 투르니에의 1969년 작품에도 없는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들의 야만성(野蠻性)을 끔찍하리만큼 솔직히 드러내보인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순수한 영혼으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어린이를 통해. 무인도에 상륙한 것은 다름아닌 어린이들이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캐스트 어웨이>에서 보여주는 무인고도(無人孤島)의 삶은 작년 한해 미 대륙을 뜨겁게 달궜던 TV프로그램 ‘서바이벌’의 생생한 실제감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오락 프로그램의 한 꼭지로 담아 선보인 적 있다. 거기서 보여준 문명 없는 삶에 놓여진 현대인들의 모습은 개인의 이기심과 생존의 욕구사이에서 오는 갈등, 즉 야만이라고 무시하던 모든 생활 방식을 몇 안 되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카메라에 노출됨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볼 때 배구공 윌슨을 토템에서 카운셀러까지 역할 변경시켜 이성을 간직한 척의 섬은 ‘없는 곳’,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Harry Hook감독의 <파리대왕>은 바닷속에서 물 위로 올라가는 소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섬에 표류해 도착한 소년들-켈리의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위안하는 척처럼 이들도 이차성징(二次性徵) 이전의 억제된 성이다.-은 대장을 뽑는다. 소년단에서 대령으로 가장 높은 계급이면서 논리적이고 균형감 있는-달리 말하면 ‘가장 어린이 답지 않은’- 랄프가 이들을 이끌게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장 큰 무기, 나이가 많은 잭이 하나 둘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결국 둘의 대결은 구조를 요청할 불을 지피는 데서 첫 불꽃을 튀긴다.
척의 섬 생활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존 교본처럼 상세하게 설명된다. 그 중 야자열매를 따먹으려다 발견한 돌도끼와 나무를 이용한 불쏘시개는 상당한 성취감을 함께 느끼게 한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본 것처럼 처음 척은 손바닥 사이에 나무 막대를 놓고 돌려 바닥에 놓인 나무토막과 마찰을 일으키지만 밤새 하얀 연기조차 보지 못한다. 피를 본 후에야 그가 찾은 방법은 받침대의 깨진 틈새를 이용한 문지르기. 문명의 시작인 불을 ‘발견’한 그는 세상이 제 것인 양 소리치며 춤을 춘다.
소년 들은 섬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지피려 한다. 불 붙이기 대결은 피기라 불리는 소년의 돋보기 안경을 이용한 랄프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지만 정작 문제는 거기서 시작한다.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 잭 측으로 인해 장작들이 주변의 풀들에 불을 붙이는 걸 알지 못하게 하고 일대는 불바다가 된다. 제어할 수 없는 문명의 시작.
자살을 하려 절벽위에 올라서기도 했던 척은 혼자 뿐인 섬생활을 무던하게 잘 해낸다. 윌슨을 내던져 놓고 금세 애절하게 찾는 것처럼 신기하리만치 이성을 잘 간수하며 말이다. 그에 반해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점차 야만과 광기에 접근해 간다. 규칙으로 답답한 랄프를 소년들은 하나 둘 떠난다. 그들은 날 세운 나무창에 홀려 소리를 치며 섬을 뛰어다닌다. 잭 일당은 불과 무기를 만들어내는 안경과 칼을 약탈해 손에 넣고 랄프와 피기를 압박한다. 이성으로 복귀를 외치던 피기가 돌덩이에 맞아 쓰러져 죽자 홀로 남은 랄프는 그들의 사냥감이 되어 숲속으로 쫓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보다 영화 <파리대왕>이 선보이는 이 마지막 시퀀스는 훨씬 강렬한 야만과 광기의 종말을 선물한다.
불타는 정글을 헤쳐 나오던 랄프는 숲의 끝에서 그만 넘어지고 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맛물려 지휘관의 앙각샷 (仰角:low angle shot)이 이어진다. 바짝 뒤를 쫓아오던 첫번째 소년부터 소리를 치며 연달아 오던 마지막 소년까지 멈춰 서 멀뚱해 하는 그룹샷과 울음을 터뜨리는 랄프의 부감샷(俯瞰:high angle shot) 그리고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무인도에서 이룬 소년들의 사회와 그들의 규칙이 어른이라는 기존권력-그것도 군인으로 대표되는 절대성-앞에서 한갓 ‘전쟁놀이’로 전락하면서 현시와 현실을 되찾는 빠른 전환을 한다.
<캐스터 어웨이>에는 전환의 자리에 커다란 고래를 캐스팅 해놓았다. 4월의 육풍과 조류 힘을 입어 탈출에 성공한 척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맞은 밤하늘. 그의 곁에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뿜으며 지나간다. 그리고 눈을 꿈뻑이며 그를 지켜본다. 그 후 바다에 사는 포유동물인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인간에 가장 가까운 바다생물로서 고래는 척의 사회로 복귀에 톡톡한 역할을 해낸다. 윌슨과 아쉬운이별의 순간을 척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좌절에 눌려 탈진한 채 쓰러져 있는 그을 깨워 지나가는 화물선을 보게도 만든다. 척은 그 다리를 건너 처음의 시간 아닌 위치로 돌아온다.
@처음과 끝 그 닮은 꼴.
저멕키스는 생각보다 꼼꼼한 바느질로 영화 곳곳을 빈틈없이 메워놓고 있다. 비록 이것이 위태로운 가족주위의 상처를 덮거나 답답한 자본주의의 빈틈을 가려 놓았더라도 그래서 물증(物證)은 있으나 심증(心證)이 없는 밋밋한 것일 지라도 말이다.
<캐스트 어웨이>는 첫 꼭지에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미국의 한 시골에서 시작한다. ‘OK 목장’정도라고 쓰여 있을 만한 솟을 대문에 ‘딕과 레베카의 집’이란 글이 선명하다. 딕은 러시아에 있던 그 바람둥이. 레베카는 날개를 만드는 조각가다. 척이 섬에 있는 내내 뜯지 않은 유일한 상자이자, 탈출의 모티브고 마지막 임무였던 날개를 만든 조각가다. 날개가 그려진 소포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척에 의해 ‘레베카의 집’ 문 앞에 놓여진다. 레베카의 날개처럼 물건, 딕은 사라져 버렸고 이 둘은 섬에서 뜯은 상자 속에 있던 이혼합의서를 주고 받은 채 척과 켈리의 관계처럼 단절되었음을, 집 입구를 보이는 한 것으로 모두 설명한다.
저멕키스 감독은 이런 장난을 영화 곳곳에서 눈에 보이도록 감춰놓는다. 섬에서 척의 절친한 벗이었던 배구공 윌슨은 제작회사이기도 하고 실제 톰 행크스의 부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또 척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찾아가 치료 받았어야 했던 치과의사와 꼬리를 물고 켈리와 결혼을 한 채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모두를 저멕키스를 통해 이야기하기엔 아무래도 톰 행크스에게 미안한 감이 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94년 한 TV 토크쇼에서 얻은 감상을 바탕으로 작가 윌리엄 보로일스 주니어를 끌어들여 기획을 했고 제작에다 일인극에 가까운 영화의 주연을 했으니 말이다.
그의 전적은 대충 이런 식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볼케이노>, <빅>에서 보여준 가벼운 코믹에서 <스플레쉬>를 통한 성장을 지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통해 연인으로 자리하더니 <필라델피아>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연기자로 자리를 굳히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그린 마일>같은 밟은 데 또 밟기를 하고 있는 톰의 갈 길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이미 TV 시리즈 연출에서 극영화 제작에 손을 댔으니 남은 것이라곤 스필버그의 왕좌를 나눠 앉는 일 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눈에 담긴 톰 행크스의 모습은 또 다른 톰, 크루즈와 사뭇 구별된 방향을 취하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벌써 꽤나 오래 ‘미국인’을 대표하는 이 둘을 ‘T2’라 하자.
톰 행크스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보여준 미국인은 어린이의 꿈을 간직하고 상처 받거나 그럴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는 이상적인 미국의 과거다. 스스로를 개척자라고 우기며 약탈을 일 삼았으면서도 선민으로서 자존심을 적들에 대한 거짓 비하(卑下)를 통해 나타냈던 자신들의 좁은 마음을 충분히 덮어줄 온화한 이미지의 투영체인 것이다. 그가 나오는 모든 영화들에서 대립자들과 화해하는 인물로 보여지는 것은 역사를 고쳐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표현이다.
반면 T2의 남은 하나 톰 크루즈는 미국인 자신들이 지향하는 미래, 이상형이다. <7월 3일생>을 기점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난 그는 <아웃사이더>의 브랫팩들 사이에 유일하게 건재한 사실 자체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톰 크루즈는 드라마 안에서 스토리를 좌지우지할 연기력까지 성장한 행크스와 달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지정의체(知情意體)가 완벽히 조화된-를 조합해 입지를 다져 놓았다. 최근 <매그놀리아>나 <와이즈 와이드 샷>같은 외도도 없진 않지만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T2가 이룬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미국인상에서는 한 세대 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를 통해 보여 준 솔직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성추문으로 얼룩져도 청년시절 불장난도 최대 권력 접근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미국의 현실을 이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노시스(Gnosis : 靈知)적 지도자를 요구했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약함을 헐리우드에서도 그대로 반영했던 그들은 중세의 마녀 심판을 거쳐 자기 반성이 냉소로 변환했던 것처럼 이제는 자본에 의지(依支)를 의지(意志)로 삼고 있다.
어쨌든 저멕키스와 행크스는 <캐스트 어웨이>로 2001년의 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톰의 전혀 돋보이지 않은 연기도 ‘맛이 우러난 진짜’라고 판단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박스오피스 수입처럼 아카데미의 노인장들께서 손을 들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저멕키스는 예상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짚어 주는 친절한 이야기꾼의 흥행감각에 대한 확인과 규모에 의지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긴장을 불러 들이는 비행기 추락씬처럼 긴장감에 대한 도전을 표면에 드러냈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그런 면에서 <캐스트 어웨이>의 쉬는 시간에 찍은 습작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 :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