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헐크> 거칠기엔 너무 부드러운

열혈연구 2003. 7. 5. 13:29
헐크
-거칠기엔 너무 부드러운


<헐크>는 무엇보다 실험적인 영상이 돋보입니다. 이미 분할 화면은 마이클 윈터보텀, 데이빗 크로넨버그 그리고 최근의 죠엘 슈마허까지 익숙한 표현의 도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안은 하나의 스크린에 서너개의 프레임을 얹어 놓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수직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조절합니다. 물론 이는 원작의 장르인 만화의 양식을 본뜬 듯합니다만 원래 예술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지 않습니까.


공학 박사인 아들은 여생을 편히 보내드릴 요량으로 북경에 홀로 계신 아버지 주씨를 미국으로 초청한다. 그러나 소설가인 미국인 아내는 말이 통하지 않은 시아버지가 불편하기만 하다. 동양과 서양의 접점에서 풀어낸 이안 감독의 데뷔작 <쿵후선생>(1992)은 격렬한 표현 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을 가졌다. 그의 영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종과 계급의 갈등, 불안한 가족구조 문제는 대만 출신이면서 미국의 물을 마신 감독의 실체와도 유사하다. 어찌 보면 <헐크>는 사랑하면서도 아버지를 온전히 끌어 안을 수 없던 아들의 이야기, <쿵후 선생>을 12년 만에 돌아보는 변주곡 같기도 하다.

이안의 영화에서 흔히 아버지는 과거의 유산에 집착하는 비현실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변하는 세상을 인정하고 힘없는 손이나마 내미는 것이 일반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헐크>는 이안 영화의 새로운 전기이기도 하다. 과거 이안의 어떤 영화보다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모호한 형태를 하고 있다.

헐크가 등장하기 전 40분 가량은 다음과 같다. 세포 재생에 관한 연구를 하던 배너 박사는 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몸에 생체 실험을 한다. 그의 아들 데이빗에게서 돌연변이의 징후가 발견되고 배너 박사는 연구소 폭발과 함께 잠적한다. 입양되어 브루스가 된 데이빗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세포 재생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야릿한 감정을 가진 동료 베티의 아버지는 배너 박사를 감시했던 로스 장군이다. 브루스가 동료를 구하려다 감마선에 쏘이고 몸 안의 푸른 괴물, 헐크가 등장하면서 모두의 관계는 거미줄처럼 얽히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도플갱어 전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신탁처럼 운명을 이끌어 아버지를 살해하도록 몰아 가고, 자신의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는 의지를 거슬러 불쑥 등장한다. 모든 것에 중심에는 푸른 괴물 헐크이자 과학자인 브루스가 자리하고 있다.

우선 브루스의 또 다른 자아인 헐크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이래 구축한 ‘만들어진 욕망의 분출체’이다. 그는 지하에서 구름 위까지 능히 휩쓸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세상을 갈아 엎을 만큼 강력한 육신을 가진 헐크는 사랑 앞에 한없이 약한 과학자 브루스의 심장을 지님으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고 만다. 아니 단 한번의 기회는 있었다.

성층권까지 올라갔다가 전투기에서 떨어지던 헐크는 환상을 본다. 뿌연 거울 앞에서 면도하는 브루스 모습이다. 그가 거울에 낀 수증기를 손가락으로 닦으면 거울 저편 어둠에서 헐크가 노려보고 있다. 그러다 뻗어나온 헐크의 손이 브루스의 목을 조른다. “한심한 인간”. 순간 현실에서 헐크는 바다 위로 추락한다. 그 위에 전투기들이 미사일을 퍼붓는다. 갖은 공격에도 죽지 않은 헐크는 지하를 달려 도심을 뒤엎는다. 브루스 안에 감춰진 폭력적 자아가 제어를 벗어나 튀어나온 듯 헐크는 지상으로 솟아 오른다. 경찰과 군대는 그를 포위한다. 긴장의 침묵이 흐르는 이 장면은 헐크가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는 순간이 될 뻔했다.그러나 이안은 여기서 베티를 끌어들임으로써 다시 한번 사랑에 약한 브루스를 불러낸다.

여기서 <헐크>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약점이 표면에 부각한다. 헐크라는 존재의 모호성과 캐리라는 인물의 이중성이다. 먼저 헐크는 아버지인 배너 박사가 연구를 완성할 요량으로 자신에게 투여한 성분이 아들인 브루스가 개발하던 나노메드와 사고로 쏘인 감마선이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헐크로 변신은 브루스가 나쁜 감정을 가지고 흥분할 때 이루어지는데, 특이한 것은 헐크의 감정이 조절 가능하다는 점이다. 분노의 해결책으로 튀어나온 도플갱어는 상대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일반이다. <헐크>에서도 처음 변신에서 브루스가 그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점점 헐크는 브루스의 이성으로 조절 가능한 도구적 형태를 하고 앞서 언급한 단 하나의 전환점마저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브루스는 어두운 과거를 말끔히 씻고서 헐크라는 능력을 담은 슈퍼히어로에 안주하고 만다.

둘째로 브루스가 사랑하는 베티는 섣부른 판단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브루스의 사랑은 거부하고 능력은 이용하는 차가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베티는 종종 브루스가 자신을 죽이는 꿈을 꾼다. 장군인 아버지와 어색한 관계인 듯 하면서도 브루스의 정보를 건네주고 또 마지막에서는 혼잣말이나마 브루스를 사랑한다고 한다. 베티는 능력 있고 능동적인 여성인 듯 하다가도 원인 모르게 삭제된 과거와 아버지의 조종 그리고 헐크의 보호 하에 살아 남는 수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살리려 몸을 쓰고 무릎에 쓰러진 브루스의 힘없는 육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냉철하게 과학적 성과에 헐크를 이용하지도 않는다. 베티는 헐크와 브루스의 변신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할리우드 이벤트 영화의 수칙을 잊는 특이한 캐릭터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안은 브루스의 과거에 힌트를 남겨두었다. 브루스 어머니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녀는 실패한 실험체로서 다가올 불행한 미래를 막기 위해 브루스를 죽이려던 배너의 칼에 맞아 죽고 만다. 이는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지운 과거의 일부이다. 브루스에서 헐크에 이르는 상반된 감정의 진폭은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어머니와 실수였을지라도 그녀를 죽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배너가 변신했을 때 자신의 이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과 비교된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들을 살려냈지만, 그의 성장을 책임질 수 없는 어머니의 한계, 자신의 피로 헐크를 아들 안에 두었지만 ‘복수’라는 단세포 철학으로 인해 아들을 품을 수 없는 아버지의 현실은 베티와 그녀의 아버지인 로스 장군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이렇게 보면 헐크는 브루스의 다른 자아이고, 브루스는 베티의 또 다른 자아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한 해명은 크게 네 가지 이유를 들어 가능하다. 하나는 가족 구조이다. 브루스와 베티는 둘 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였고 오랫동안 아버지와 소원한 채 지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가 서로는 물론 상대의 자실까지 죽이려는 앙숙이다. 둘째는 똑같이 세포 재생 연구를 하고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탈봇을 미워하는 현재 상황이다.(탈봇과 관계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셋째는 같은 동네에 살아 알고 지냈으면서도 똑같이 잊어 버린 과거이며 마지막은 목졸라 서로를 죽이려 하는 환상의 공유이다.

이처럼 얽히고 설킨 <헐크>의 모호함은 한편으로 자신이 가진 급진성과 충돌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가족 살해의 급진성은 무정부 상태를 추진하는 배너의 야망과 자신의 실험실부터 부숴버리는 헐크의 욕망 속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모호함과 급진성이 <헐크>라는 하나의 틀에 짜맞춰 있는 모습은 마치 과거를 모른 채 혼란해 하는 브루스와 전능한 힘의 푸른 괴물 헐크가 하나 인 것과 같다. 그리고 이안은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명료한 보수성에 손을 들어준다. 도발적인 화면 분할과 만화 이미지의 직접 인용 같은 일말의 작가적 표현도구조차 극의 종반에 이르면 사라지고 만다.

할리우드는 모든 예술과 작가들에게서 상상력을 뽑아내고 그것을 산업으로 재생산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적어도 <헐크>의 결말은 <쿵후 선생>의 이안이 아닌 할리우드 시스템 자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