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다크니스> ~에 의하면

열혈연구 2003. 6. 7. 00:11
다크니스
-~에 의하면


이 글의 구성 방식은 딱딱한 글쓰기에 대한 장난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했던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은 인용으로 공포영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싶었습니다. (허나 성공한 듯 보이지는 않습니다. ^^;) 공포영화는 관객에 따라 평가가 극단을 오가는 상대적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는 잔인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유머로 읽히고, 혹자는 무섭다 하며 누군가는 우습다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우메 발라구에로의 <다크니스>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위기 만은 일품입니다.


프랭크 E. 비버에 의하면 장르는 “유사한 양식과 주제, 구조적 관심사를 가진 일군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보다 넓게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의 구분에도 쓰이는데, 전자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이다. 어떠한 영화가 장르 안에 편입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유사한 양식과 주제, 구조적 관심사’를 장르의 규칙이라 하겠는데, 공포 영화의 경우를 알고 싶다면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을 찾아보면 된다.

<스크림>이 알려주는 기본 공식 중 몇몇을 기억하자면 다음과 같다. “혼자 남겨지면 죽는다. 처녀가 아닌 여자는 죽는다. 갔다가 돌아오면 죽는다. 뒤를 돌아보면 죽는다.” 등이 그것이다. 공포 영화가 이런 식의 장르의 규칙을 갖게 된 것은 인물, 장소, 소재 등의 요소들이 영화사 속에서 필모그래피를 더해감에 따라 반복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의 시초로는 흔히 로베르트 비네의 1919년작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든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는 흡혈귀 영화의 효시로 손꼽힌다.(이들은 독일 표현주의와도 긴밀히 연결 지을 수 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미국에서는 유니버셜사를 중심으로 공포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미이라,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늑대인간 등 인기 캐릭터들이 자리를 잡은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들의 전성기는 동시상영 전용작이었던 B영화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창기 공포영화는 놀래키는 임무를 향해 질주하는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공포영화가 전형적인 오락 장르의 탈을 벗은 것은 영화학자들에 의해서다. 로빈 우드는 70년대 미국 공포영화에 대한 글에서 이 장르의 바탕은 ‘억압(repression)’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프로이드와 마르쿠제, 호로비츠 등이 제안하고 발전시킨 이 개념을 공포 영화에 대입하면서 ‘성적 에너지’, ‘양성애’, ‘여성과 성에 대한 억압’,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해석으로 연결지어 설명한다.

그가 구별하는 공포영화의 다섯 가지 하부장르는 이렇다. 1. 괴물이 정신병이나 정신분열증에 걸린 인간인 경우 : <사이코>, <증오>, 2. 자연의 복수 : <새>, <야수의 날>, 3. 사타니즘, 반 그리스도 : <로즈마리의 아기>, <엑소시스트>, 4. 끔찍한 아이 : <오멘>, <캐리>, 5. 식인주의 : <택사스 전기톱 대학살>, <살아 있는 시체의 밤>. 구분의 경계가 다소 모호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로빈 우드의 글은 공포영화를 미국의 사회학에 대입해 자세하고 명확한 해석을 이루어낸다.

이보다 편리한 구분은 박성학의 세가지 구분이다. 첫째는 흡혈귀나 유령, 악마 등이 등장하는 초자연적 공포영화, 둘째는 인간의 왜곡된 심리를 소재로 한 심리공포영화, 셋째는 신체에 대한 위해를 중심에 배치하는 살육영화(splatter movie)이다.

이에 따르면 자우메 발라구에로의 <다크니스>는 초자연적, 심리공포영화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더 헌팅>, <헌티드 힐>, <디 아더스>, <검은 물 밑에서> 등으로 90년대 말부터 잇따랐던 ‘유령의 집’ 혹은 ‘집에 남아 있는 유령’의 소재가 뒤섞여 있다.

영화는 한 소년의 심문 혹은 정신감정인 듯한 소리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끼어 드는 개들의 추적, 아이들의 모습. 이미지의 연속 너머에서 소년은 말한다 “아무 것도 기억 안나요.”

40년이 지난 어느날은 마크와 마리아, 그들의 딸과 아들인 레지나와 폴이 미국에서 스페인으로 이사 온지 3주째 되는 순간이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가족의 화합으로 이겨내려 하는 이들의 모습에는 원인 모를 불안이 엿보인다. 곧이어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아버지인 마크는 공격적으로 변하며 발작을 일으키는 불치병, 호팅튼 증후군에 결려 있었다. 아들인 폴은 아이들 유령이 있다고 말하고, 그의 목에는 멍자국이 남겨있다.

<다크니스>는 공포의 존재를 일찍 말해준다.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전반에 깔아 놓고 이의 파멸을 통해 공포를 증폭하는 기존 영화의 방식을 거절한다. 스페인으로 이민한 가정의 불행을 소개하는 것도, 색연필을 끌어당기는 유령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도 미쳐 15분이 지나기 전이다. 발라구에로는 기본적인 공포의 조건들을 표면에 드러내어 놓고, 40년 전에 발생한 7명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최대한 숨김으로 인해 미스터리의 방문을 굳게 닫아 놓는다.

<다크니스>의 공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은 폐쇄된 공간으로서 집과 사랑하는 자를 죽여야 하는 가족살해이다. 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오래된 집은 창과 문으로 구획을 나누고 어두움을 생산한다. 감독은 종종 인물을 롱 쇼트(long shot) 이상으로 잡아 어두운 집 안의 중심에 가둬놓고, 미닫이 문들의 세로축으로 빛을 차단한 후 관객과 가까운 쪽에 유령을 지나치게 함으로써 인물의 고립과 관객의 공포를 자극한다.

이보다 감정의 깊은 곳을 자극하는 것은 가족살해이다. 이미 <샤이닝>을 통해 아버지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광기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공포와 이를 꼬아놓는 것이다. 마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할아버지, 남편을 믿지 못하는 마리아,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레지나의 모습은 우리가 결코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가족의 어두운 면이다.

<다크니스>는 어두운 조명, 흔들리는 카메라, 갑자기 나타나는 유령, 분위기를 북돋는 효과음 등을 사용하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값싼 공포의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할리우드 배우를 데려오고, 공포물 제작사인 디멘션 필름스의 투자를 받은 영화는 장르의 공식을 이용하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는, 과거를 읽는 방법론인 플래쉬 백(flash back)에 있다.

수없이 반복되며 번쩍이는 플래쉬 백은 놀랄만큼 많은 씬을 소비한다. 오프닝에서부터 시작해 마크의 발작 때마다 반복되고, 의사인 할아버지와 집의 설계자였던 빌라로보스의 대사를 비롯해 레지나와 남자친구 카를로스의 조사 작업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플래쉬 백은 40년 전 사건과 현재의 거리를 당기는 작업을 매번 수행한다.

<다크니스>는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새로운 공포영화다. 엄청난 신전환과 교차편집, 플래쉬 백을 통해 혼란함을 느낄 때쯤이면 이 모든 것이 A->A’로 향하는 간단한 변주였음을 알게한다. 살의와 피범벅, 목숨을 건 사투 하나 없이 공포 영화를 만들어낸 발라구에로의 재능은 여기에 있다.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볼거리는 영원한 유혹이다. 세모(歲暮)마다 반복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게로 스멀스멀 모이는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마법처럼 말이다. 로버트 워쇼는 장르의 변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변주는 장르가 불모화하지 않도록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형식을 원할 뿐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