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매트릭스2: 리로디드> 내가 한 꿈을 꾸었도다
열혈연구
2003. 5. 27. 01:42
매트릭스2 리로디드
-내가 한 꿈을 꾸었도다
이 글은 오랜만에 쓴 실망의 글입니다. 이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는 홍보 문구를 믿었던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보면서 저는 2년 전 실패한 애니메이션 <파이널 환타지>가 떠올랐습니다. 너무 앞서나간 이 영화는 예언몽, 사랑과 희생 그리고 센티엘의 동선에 이르기까지 <애니 매트릭스> 9편 중 하나인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에 고스란히 인용됨으로써 이제야 자신의 진가를 인정 받은 듯 보입니다. 나아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배경과 표현 방식 역시 이 영화와 일맥상통합니다. 6월 2일, <애니매트릭스>와 함께 <파이널 환타지>를 다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로 <파이널 환타지>와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를 감독한 이는 앤디 존스(Andy Jones)입니다.
<매트릭스>는 꿈의 영화이다. 이는 네오의 일장춘몽일 수도, 감독이 지향하던 예언몽일 수도, 관객이 한낮에 꾼 백일몽일 수도 있다. 센티엘의 침공으로 파멸을 맞은 시온의 폐허를 바라보며 예언자였던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 꿈이 사라졌도다.”
인류 최후의 성지인 시온은 모두가 지켜야 할 보루이다. 네오 일행을 태운 느부갓네살호가 철저한 보안장치를 통해 시온 안으로 들어서면, 한번의 논쟁을 지나 지하에서 벌어지는 군중집회로 연결된다. 안타깝게도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한계점은 이곳에서 드러난다. 미래와 과거가 교차하는 시온의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두가지 사건은 엉뚱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예언의 실현으로 전쟁이 끝날 것입니다”라며 불안에 떨고 있는 군중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으려 기획된 예식은 교주처럼 등장하는 모피어스의 연설로 절정의 문턱에 도달한다. 이때 터져 나오는 강력한 드럼의 비트가 군중들의 가슴을 때리면 모두는 두려움을 떨치는 춤사위를 펼친다. 여기서 감독은 슬로모션, 카메라의 이동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이들의 몸짓을 담아내는데 아쉬울 손, 처절하면서 흥분된 그들의 엇갈린 감정이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이는 집회씬과 교차편집된 네오와 트리니티의 섹스씬 때문이다. 모두가 집회에서 전의를 다지는 순간, 핵심 전사 둘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 교차편집은 시온 사수에 대한 모두의 열망과 맞먹는 사랑의 위대함을 의도한 듯하나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와 함께 거세지는 군중들의 춤과 둘의 섹스는 관음증 외의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춤의 수위가 거세지면서 카메라는 감정의 분출구로서 얼굴을 외면하고 사람들의 몸에 집중한다. 가볍게 걸치고 있던 옷은 벗겨져 사라지거나 투명하게 비쳐 몸을 드러낸다. 그들의 몸은 섹스하는 네오와 트리니티의 몸처럼 땀에 젖어 번들거린다. 한편, 이들의 미래를 등에 짊어진 네오는 단지 연인이 된 트리니티가 죽는다는 자신의 예언몽을 떨쳐내려 애쓰며 그녀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이곳 어디에서도 시온의 운명에 대한 고민은 엿보이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수많은 군중들은 열광하며 목숨을 바칠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죽음의 춤을 추었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그들의 메시아 네오는 단지 연인의 운명만을 걱정하는 가벼움에 안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다. 관음증과 가벼움, 이것이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핵심이자 한계이다.
물론 전편과 마찬가지로 <매트릭스2: 리로디드> 역시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화이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양 기둥으로 하고 존재론을 바닥에 깔았으며 동양 무술, 뱀파이어의 전설로 주변을 장식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마무리한 이 영화를 단순화해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이 전편부터 집중해온 ‘선택’이라는 화두에 정확히 작용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지루한 변명을 하는 것은 맹목적인 물신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볼거리가 관객을 끌지라도 영화의 핵심은 결국 주제와 이를 풀어가는 방식인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 2, 3편을 함께 찍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조절’에 대한 야심을 펼쳐보이고 있다. 전편에서 선보인 불릿타임(Bullet Time 혹은 Flow mo)은 시간과 공간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슬로우모션이 단순히 한정된 시간을 늘려 페르마타(fermata : 늘임표)와 액센트(accent)의 효과를 주었다면 불릿타임은 여기에 카메라 시선의 이동을 포함시켜 전지적 관람을 가능케 했다. 120대 스틸 카메라 이미지의 연결은 2차원적인 스크린에서 원근법을 통해 추정했던 3차원을 눈앞에 실현시킨 백일몽의 현시였다.
나아가 ‘달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었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이에 대해 내어 놓은 가장 직설적인 대답은 메로빈지언과 대결이 벌어지는 건물의 문이다. 네오는 달아나는 그를 쫓아 닫힌 문을 연다. 그러나 문의 건너편은 건물의 일부가 아닌 눈 덮인 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큐브>, <다크시티>, <트루먼 쇼>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에서 많이 사용된 설정인데, ‘이공간문(異空間門 : The gate which open another world)’이라 이름할 수 있겠다.
‘이공간문’은 영화의 근본과도 일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관객이 자리하고 있는 세상과 다른 곳에 들어선다는 것과 같다. 영화 상영 직전 영화관의 불이 꺼지는 것은 단순히 스크린에 또렷한 환영을 비추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전 세계와 단절을 의미한다. 가장 이상적인 영화 관람은 한낮에 세상을 잊고 꿈꾸는 백일몽과 같다. 여기에는 바깥의 혼란한 세상도, 화려한 극장 장식도 관심의 바깥에 자리하며 오로지 스크린에 펼쳐진 이공간의 현재만이 중요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이공간을 제시할 뿐 ‘이공간문’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실패한다.
설득력 있는 캐릭터 구축의 실패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다. 전편에서 보여준 네오의 혼란한 정체성, 모피어스의 현명한 예언, 트리니티의 순결한 헌신, 스미스의 냉철한 공격 등은 이곳에 이르러서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너무나 단호한 네오는 종종 헛웃음을 자아낸다. 설계자와 대면한 곳에서 시온과 트리니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에 씩씩하게도 그녀를 구할 문으로 걸어가는 네오는 유머의 절정이다.
여기에 새로 등장한 페르세포네나 니오베, 메로빈지언 등은 3편에 본 모습을 보이려는지 쓰~윽 나왔다가 싹! 하고 사라진다. 특히 페르세포네는 자신이 가진 신화적 배경과 가장 근접함에도 불구하지만 엉뚱한 귀결에 다다른다. 네오를 도와주는 것이 강제력이 가동된 사랑(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유괴사건이다!)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인줄 알 무렵, 엉뚱하게 남편의 외도에 대한 복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식이다. 그녀의 실체를 알려거든 문 너머로 달아난 그녀가 돌아오는 3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엉뚱한 것은 바로 스미스 요원이다. 전편에서 슈퍼컴퓨터의 명령에 따라 네오를 공격했던 스미스는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개체이다. 네오와 연결되어 획득한 스미스의 독립성이라는 설정은 한편으로 그가 네오를 공격하는 데서 맹목성을 드러낸다. 스미스가 전편에서는 적대적 시스템을 대표하고 있었다면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는 단순히 네오의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과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가 자기 복제를 하며 열심히 네오 일행을 막아서는 씬들은 단순히 액션의 화려한 현신에 그칠 뿐 생명력이 없다. 슈퍼맨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네오를 멍하니 바라보다 뿔뿔이 흩어지는 100명의 스미스는 시스템과 떨어져 무뇌아가 되고 말았다.
단순히 다양한 액션을 위해 가동하는 스미스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빠진 함정을 가리킨다. 이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각적 쾌락에 도취되어 나아갈 길을 잘못 설정한 듯 보인다. 2,500 컷의 컴퓨터 그래픽을 첨가하고, 3.2 km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100대가 넘는 자동차를 파괴하고, 네오를 시속 750 km/sec로 날아오르게 한 것은 매트릭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도구여야만 했다. 워쇼스키 형제는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당위성을 상투성으로 전환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빈칸을 시각적 효과로 채우려 했다. 주춧돌을 빼고 건물을 지은 꼴이다.
앞서 언급한 섹스 이후, 네오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원로 의원인 하먼은 그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리고 시온의 심장인 보일러를 가리키며 말한다. “통제란 끌(turn off) 수 있는 능력이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전편의 중량(load)를 감당하지 못하고서 장전한 총알마저 빼내는(unload) 꼴을 하고 있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이번에 이루지 못한 재장전(reload)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11월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신들이 벌여놓은 ‘매트릭스 세계의 불을 어떻게 잘 끌 것이냐’ 이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다니엘 12 : 13)
덧붙임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건질만한 것이 없진 않다. 네오가 설계자와 대면하는 씬이 바로 그것이다. 이 씬은 영화의 주제인 예정론과 공간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우선 네오와 설계자가 마주하고 있는 공간은 하얀 원형 방을 작은 모니터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수없이 많은 모니터 화면들 속의 네오는 그가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움직이다가도 의견을 표현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모습이 됨을 볼 때, 네오에게 있어 선택은 이미 예측 가능한 예정론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이공간문’을 여는 주제와 표현 방식이 정확이 맞아떨어지는 사례이기도 하다. 모니터들은 설계자가 말하는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다양한 화면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네오가 말할 때는 다시 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네오가 말할 때이다. 카메라는 설계자의 말에 답하는 네오의 모습을 그냥 담지 않고 모니터 안에 있는 네오 중 하나를 선택해 들어간다(Zoom In). 이어 선택된 모니터 속의 네오를 중심으로 그와 설계자가 마주하고 있는 똑 같은 공간이 다시 설정된다. 즉 모니터 안의 공간이 현실이 되고, 또 다시 그것이 반복 되면서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트릭스>가 꿈꿨던 것 세상의 핵심이다.
-내가 한 꿈을 꾸었도다
이 글은 오랜만에 쓴 실망의 글입니다. 이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는 홍보 문구를 믿었던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보면서 저는 2년 전 실패한 애니메이션 <파이널 환타지>가 떠올랐습니다. 너무 앞서나간 이 영화는 예언몽, 사랑과 희생 그리고 센티엘의 동선에 이르기까지 <애니 매트릭스> 9편 중 하나인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에 고스란히 인용됨으로써 이제야 자신의 진가를 인정 받은 듯 보입니다. 나아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배경과 표현 방식 역시 이 영화와 일맥상통합니다. 6월 2일, <애니매트릭스>와 함께 <파이널 환타지>를 다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로 <파이널 환타지>와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를 감독한 이는 앤디 존스(Andy Jones)입니다.
<매트릭스>는 꿈의 영화이다. 이는 네오의 일장춘몽일 수도, 감독이 지향하던 예언몽일 수도, 관객이 한낮에 꾼 백일몽일 수도 있다. 센티엘의 침공으로 파멸을 맞은 시온의 폐허를 바라보며 예언자였던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 꿈이 사라졌도다.”
인류 최후의 성지인 시온은 모두가 지켜야 할 보루이다. 네오 일행을 태운 느부갓네살호가 철저한 보안장치를 통해 시온 안으로 들어서면, 한번의 논쟁을 지나 지하에서 벌어지는 군중집회로 연결된다. 안타깝게도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한계점은 이곳에서 드러난다. 미래와 과거가 교차하는 시온의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두가지 사건은 엉뚱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예언의 실현으로 전쟁이 끝날 것입니다”라며 불안에 떨고 있는 군중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으려 기획된 예식은 교주처럼 등장하는 모피어스의 연설로 절정의 문턱에 도달한다. 이때 터져 나오는 강력한 드럼의 비트가 군중들의 가슴을 때리면 모두는 두려움을 떨치는 춤사위를 펼친다. 여기서 감독은 슬로모션, 카메라의 이동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이들의 몸짓을 담아내는데 아쉬울 손, 처절하면서 흥분된 그들의 엇갈린 감정이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이는 집회씬과 교차편집된 네오와 트리니티의 섹스씬 때문이다. 모두가 집회에서 전의를 다지는 순간, 핵심 전사 둘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 교차편집은 시온 사수에 대한 모두의 열망과 맞먹는 사랑의 위대함을 의도한 듯하나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와 함께 거세지는 군중들의 춤과 둘의 섹스는 관음증 외의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춤의 수위가 거세지면서 카메라는 감정의 분출구로서 얼굴을 외면하고 사람들의 몸에 집중한다. 가볍게 걸치고 있던 옷은 벗겨져 사라지거나 투명하게 비쳐 몸을 드러낸다. 그들의 몸은 섹스하는 네오와 트리니티의 몸처럼 땀에 젖어 번들거린다. 한편, 이들의 미래를 등에 짊어진 네오는 단지 연인이 된 트리니티가 죽는다는 자신의 예언몽을 떨쳐내려 애쓰며 그녀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이곳 어디에서도 시온의 운명에 대한 고민은 엿보이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수많은 군중들은 열광하며 목숨을 바칠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죽음의 춤을 추었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그들의 메시아 네오는 단지 연인의 운명만을 걱정하는 가벼움에 안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다. 관음증과 가벼움, 이것이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핵심이자 한계이다.
물론 전편과 마찬가지로 <매트릭스2: 리로디드> 역시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화이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양 기둥으로 하고 존재론을 바닥에 깔았으며 동양 무술, 뱀파이어의 전설로 주변을 장식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마무리한 이 영화를 단순화해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이 전편부터 집중해온 ‘선택’이라는 화두에 정확히 작용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지루한 변명을 하는 것은 맹목적인 물신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볼거리가 관객을 끌지라도 영화의 핵심은 결국 주제와 이를 풀어가는 방식인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 2, 3편을 함께 찍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조절’에 대한 야심을 펼쳐보이고 있다. 전편에서 선보인 불릿타임(Bullet Time 혹은 Flow mo)은 시간과 공간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슬로우모션이 단순히 한정된 시간을 늘려 페르마타(fermata : 늘임표)와 액센트(accent)의 효과를 주었다면 불릿타임은 여기에 카메라 시선의 이동을 포함시켜 전지적 관람을 가능케 했다. 120대 스틸 카메라 이미지의 연결은 2차원적인 스크린에서 원근법을 통해 추정했던 3차원을 눈앞에 실현시킨 백일몽의 현시였다.
나아가 ‘달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었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이에 대해 내어 놓은 가장 직설적인 대답은 메로빈지언과 대결이 벌어지는 건물의 문이다. 네오는 달아나는 그를 쫓아 닫힌 문을 연다. 그러나 문의 건너편은 건물의 일부가 아닌 눈 덮인 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큐브>, <다크시티>, <트루먼 쇼>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에서 많이 사용된 설정인데, ‘이공간문(異空間門 : The gate which open another world)’이라 이름할 수 있겠다.
‘이공간문’은 영화의 근본과도 일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관객이 자리하고 있는 세상과 다른 곳에 들어선다는 것과 같다. 영화 상영 직전 영화관의 불이 꺼지는 것은 단순히 스크린에 또렷한 환영을 비추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전 세계와 단절을 의미한다. 가장 이상적인 영화 관람은 한낮에 세상을 잊고 꿈꾸는 백일몽과 같다. 여기에는 바깥의 혼란한 세상도, 화려한 극장 장식도 관심의 바깥에 자리하며 오로지 스크린에 펼쳐진 이공간의 현재만이 중요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이공간을 제시할 뿐 ‘이공간문’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실패한다.
설득력 있는 캐릭터 구축의 실패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다. 전편에서 보여준 네오의 혼란한 정체성, 모피어스의 현명한 예언, 트리니티의 순결한 헌신, 스미스의 냉철한 공격 등은 이곳에 이르러서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너무나 단호한 네오는 종종 헛웃음을 자아낸다. 설계자와 대면한 곳에서 시온과 트리니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에 씩씩하게도 그녀를 구할 문으로 걸어가는 네오는 유머의 절정이다.
여기에 새로 등장한 페르세포네나 니오베, 메로빈지언 등은 3편에 본 모습을 보이려는지 쓰~윽 나왔다가 싹! 하고 사라진다. 특히 페르세포네는 자신이 가진 신화적 배경과 가장 근접함에도 불구하지만 엉뚱한 귀결에 다다른다. 네오를 도와주는 것이 강제력이 가동된 사랑(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유괴사건이다!)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인줄 알 무렵, 엉뚱하게 남편의 외도에 대한 복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식이다. 그녀의 실체를 알려거든 문 너머로 달아난 그녀가 돌아오는 3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엉뚱한 것은 바로 스미스 요원이다. 전편에서 슈퍼컴퓨터의 명령에 따라 네오를 공격했던 스미스는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개체이다. 네오와 연결되어 획득한 스미스의 독립성이라는 설정은 한편으로 그가 네오를 공격하는 데서 맹목성을 드러낸다. 스미스가 전편에서는 적대적 시스템을 대표하고 있었다면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는 단순히 네오의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과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가 자기 복제를 하며 열심히 네오 일행을 막아서는 씬들은 단순히 액션의 화려한 현신에 그칠 뿐 생명력이 없다. 슈퍼맨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네오를 멍하니 바라보다 뿔뿔이 흩어지는 100명의 스미스는 시스템과 떨어져 무뇌아가 되고 말았다.
단순히 다양한 액션을 위해 가동하는 스미스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빠진 함정을 가리킨다. 이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각적 쾌락에 도취되어 나아갈 길을 잘못 설정한 듯 보인다. 2,500 컷의 컴퓨터 그래픽을 첨가하고, 3.2 km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100대가 넘는 자동차를 파괴하고, 네오를 시속 750 km/sec로 날아오르게 한 것은 매트릭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도구여야만 했다. 워쇼스키 형제는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당위성을 상투성으로 전환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빈칸을 시각적 효과로 채우려 했다. 주춧돌을 빼고 건물을 지은 꼴이다.
앞서 언급한 섹스 이후, 네오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원로 의원인 하먼은 그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리고 시온의 심장인 보일러를 가리키며 말한다. “통제란 끌(turn off) 수 있는 능력이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전편의 중량(load)를 감당하지 못하고서 장전한 총알마저 빼내는(unload) 꼴을 하고 있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이번에 이루지 못한 재장전(reload)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11월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신들이 벌여놓은 ‘매트릭스 세계의 불을 어떻게 잘 끌 것이냐’ 이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다니엘 12 : 13)
덧붙임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건질만한 것이 없진 않다. 네오가 설계자와 대면하는 씬이 바로 그것이다. 이 씬은 영화의 주제인 예정론과 공간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우선 네오와 설계자가 마주하고 있는 공간은 하얀 원형 방을 작은 모니터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수없이 많은 모니터 화면들 속의 네오는 그가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움직이다가도 의견을 표현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모습이 됨을 볼 때, 네오에게 있어 선택은 이미 예측 가능한 예정론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이공간문’을 여는 주제와 표현 방식이 정확이 맞아떨어지는 사례이기도 하다. 모니터들은 설계자가 말하는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다양한 화면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네오가 말할 때는 다시 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네오가 말할 때이다. 카메라는 설계자의 말에 답하는 네오의 모습을 그냥 담지 않고 모니터 안에 있는 네오 중 하나를 선택해 들어간다(Zoom In). 이어 선택된 모니터 속의 네오를 중심으로 그와 설계자가 마주하고 있는 똑 같은 공간이 다시 설정된다. 즉 모니터 안의 공간이 현실이 되고, 또 다시 그것이 반복 되면서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트릭스>가 꿈꿨던 것 세상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