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
열혈연구
2000. 11. 27. 22:35
원조(元祖)가 뤼미에르 형제이냐 아니냐는 영화의 시작을 1895년이라 확신하는데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우리 곁에 성큼 가까이 다가온 영화는 오락과 삶을 전달하는 매체다. 흔히 매체(media)라 부르는 것들의 모호한 개념 싸움은 그 사이 '개(介)'자를 넣으면 쉬어진다. '매개체', 즉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다수 다수와 다수를 이어주는 역할이 바로 매체의 커다란 부분이다.
기껏 서른살도 되지 않은 인터넷 같은 새로운 매체가 온통 주위를 덮은 요즘, 영화를 젊은 매체(new media)라 부르는 것은 좀 닭살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언론(言論)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 근대 인쇄매체의 400년에 이르는 역사에 비한다면 조금 젊어 보일까.
실상을 셀룰로이드 필름에 담고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스크린에 쏘아 올린 영화는 그 시작을 연 19세기 말, 이미 상업 매체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마 최초의 영화운동으로 기억되는 필름 다르(Film d'art)처럼 상업과 예술은 영화 역사의 초반부터 중요한 논제였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문학, 음악, 미술 어느 것이 생산자의 생계와 무관하였던가? 굶주림에 몸담을 관(棺) 하나 없이 공동묘지에 묻힌 모차르트에서 시간 죽이기 용 즐거움을 선사하던 보카치오까지 예술가의 인생은 베토벤의 자존심을 걸고도 결국 승화와 생존, 유희와 자족, 의지와 육신 사이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감정을 만드는 산업이자 힘들고 비싼 예술이다. 그것이 아무리 뻔뻔한 산업일지라도 보는 이의 감정을 흔들고, 제 아무리 고상한 예술이라 우겨도 커다란 자본의 덕을 입는다. 어느 한쪽에 서서 상대를 향해 흔드는 삿대질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일 뿐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고픈 배를 채우러 움직여야할 우리의 육체처럼 솔직해지자.
하지만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이나 산업보다 시대를 반영한다. 영화가 새로울 수 있는 것은 시절마다 새로 태어나는 정신과 표현 때문이다. 그것이 저항이건 순복이건 환상을 보이고 때로는 상처를 후비면서 보다 우리와 가까이 자리한다.
영화는 제작하는 시점의 앞뒤를 살펴 개봉 시기 관객의 관심을 잡으려 한다. 살아 남기 위해서 한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기까지 영악한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전쟁이 있던 시대를 지나서는 전쟁의 낭만주의나 영웅주의를 담은 영화들이 줄을 잇고 사고나 재난에도 옷을 입힌 영화들이 나오는가하면 영화가 시대의 불꽃이 되어 사상과 변화를 낳기도 한다. 또 어두운 시절의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결코 현실과 층이 다른, 다른 세상이 아닌 것. 관객은 주위와 전후를 연결시켜 중심에 놓고 시대를 표현하는 잣대인지 아닌지를 살펴볼 혜안을 소유해 가야한다.
극장에 혹은 방안에서 스크린이나 화면을 응시하며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는 여기에서 시작도 바로 여기서부터. 바로 여러분의 생각 끝자락을 자극하고 싶어하는 영화의 귀여운 몸짓을 찾아보도록 하자.
가끔은 철부지의 장난을 꾸짖기도 하고 노친네의 가르침에 눈물겹기도 하자. 우리의 감정은 마음을 연만큼 반응하도록 계산된 구조체다. 영화라는 자극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이다. 한번 주위를 둘러 당신을 찾는 영화의 부름에 따라가 보자. 빛과 어두움 사이 풍족함을 느껴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한 구석 어딘가에선 통속에서 빠져 나와 빛을 담는 필름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눈매를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