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영웅> 장이모의 무협과 시대정신
열혈연구
2003. 2. 6. 17:57
영웅
-장이모의 무협과 시대정신
<영웅>이 개봉 첫주 흥행 1위 자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결코 호의적이 아님을 봅니다. “너무 황당하다.”는 순진한 비난에서 “정치적으로 불손하다.”는 다소 투쟁적인 발언까지 그 층위는 다양합니다. 3년 전 <와호장룡>이 몰고 온 일진광풍은 결코 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서구의 영화계는 이 영화에 쌍수를 들어주었죠. 영화제, 흥행, 영화평의 삼박자에 멋지게 한판 놀아본 보기 드문 경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의 반응은 미지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필자는 이를 <와호장룡>이 ‘남방 무협’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민족의 시대를 서구의 모양으로 풀어낸 ‘애정 무술’영화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불법영화에 익숙한 중국인을 극장으로 끌어낸 <영웅>은 결코 <와호장룡>의 아류도 <라쇼몽>의 복사물도 아닌 것입니다.
무협소설의 전반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둘러싼 배경이 드러나는 순을 밟는다. 중반부는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밝혀지고 갈등은 고조되며 후반부에 이르면, 주인공의 뛰어난 무공과 깊은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깔끔히 정리된다. 미국의 페이퍼백 사이즈로 나왔던 대본소의 무협지에서부터 제법 작품으로 인정 받는 김용의 시리즈물까지 대하소설 분량에 이르는 무협소설들은 늘 한결같다. 이들은 장르의 규칙과 같은 최소한의 공유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5세대 감독인 장이모는 한때 정부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던 경력이 있다. 그러나 2003년 현재 그는 중국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만들어낸 관선 감독이다. 장이모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영화이다.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준 중국에 대한 시선의 변화는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장이모는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 이야기>, <인생>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아픈 과거 헤집기를 1995년 영화 <상하이 트라이어드>를 전환점으로 삼아 그만둔다. 그는 뮤지컬을 도용한 이 영화에서 이전과 구별되는 몽환적 과거를 내세운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를 연다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를 통해 보인 소박한 낭만은 이제 <영웅>에 이르러 화려함을 더해 절정에 달했다.
검은 깃발과 마차가 달린다. 진나라 왕인 영정을 배알하러 가는 검은 옷의 무사는 무명이다. 장천의 부러진 창, 비설과 파검의 검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영정 앞에 선 그는 시대를 풍미한 자객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영웅>을 한마디로 표현했을 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결정판’이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진(秦)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무(武)는 있으나 협(俠)은 없는 아류 무협영화의 종언이라는 점에서도, 이전까지 풀어내지 못한 무협소설의 상상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장이모는 <영웅>에서 자신의 영화 세계에 있어 또 다른 지점을 예고하는 지도 모른다.
영화는 크게 두가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영정이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이루는 과정 속에 무명이라는 자객이 영정을 살해하러 찾아오는 것이 첫번째이고, 영정과 무명이 대화를 나누는 현재와 플래쉬 백으로 등장하는 회상이 두번째이다. 후자는 또다시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무명이 살의를 숨기고 영정에게 들려주는 장천, 비설, 파검의 죽음에 관한 거짓 이야기이다. 둘은 영정이 무명의 살기를 읽어내고 앞서 한 이야기의 헛점을 짚어내는 것이며, 셋은 암살을 각오한 영정에게 무명이 들려주는 실제 이야기이다.
<영웅>의 내러티브는 한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진술이 거짓을 맴돌지 않고 정반합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변증법을 차용하고 있다. 플래쉬 백으로 다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사실로서 다가간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부정한다. 무명과 영정의 입을 거쳐가면서 거짓의 껍질은 벗겨지며, 진실의 속내는 드러난다.
처음 무명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장천, 비설, 파검은 영정이 알고 그들이 아니다. 영정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무명이 알고 있는 그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에 이르면 서로 상반되던 무명과 영정의 이야기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이었음이 드러난다. 영정과 무명은 모든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장천, 비설, 파검의 행동 속에 담긴 진실을 읽어내게 된다.
장이모는 둘에서 셋으로 분열된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일하는 방법론으로 적, 청, 백, 흑으로 구분한 미장셴과 현과 북을 이용한 음악 그리고 경극의 소리를 제시한다. 이는 꽤나 효과적인데, 원색의 의상과 배경을 변화하는 인물 묘사와 연결해 혼란을 막고 여기에 일관된 음악과 소리를 덧입힘으로써 암살의 위협에서 통일에 다다른 영정의 위업과 사랑과 대의를 위해 목숨과 명예를 바치는 무명, 비설, 파검, 장천의 업적에 힘을 더한다.
<영웅>의 핵심은 무협소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과장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天下)를 이루기 위해 뛰어든 영웅들의 협에 있다. 영화의 핵심을 이룬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 수천의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는 무명, 자객에게 자신의 칼을 건네며 등을 보이는 영정, 믿음을 이루기 위해 검을 떨어뜨리는 파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을 뚫는 비설 등 죽음을 직시하는 영웅들은 최근 등장한 어떠한 무협영화보다도 협에 근접하고 있다. 여기에 바둑과 창술, 서법과 검술을 동등하게 설정하는 문무의 접합과 눈을 감고 심리적 합 겨루는 것은 동양 무술이 추구하는 경지에 다름 아니다.
<영웅>의 핵심에는 파검이 자리하고 있다. 영정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무명의 변화는 파검의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먼저 파검은 무술의 근본 정신에 가장 근접해 있다. 침입한 대군의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서체를 완성하는 그의 행동은 상황에 대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신기능을 중지시켜 환경에 따라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맺어 반응하는 동양 무술의 근본을 실현한다.
파검이 단순한 무술인의 경지를 넘어서 정복자이자 천하인이 될 영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상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 호수에서의 싸움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파검과 무명은 상상 속에서 합을 겨룬다. 파검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누운 비설의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으려 싸움을 접는다. 이는 무명이 영정 앞에서 칼을 돌린 파검의 마음을 읽어냄과 동시에 영정이 무명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아낸 순간이 된다. 파검은 자신의 신념만으로 무명을 움직이며 영정을 깨우친다.
파검은 두 번 검을 되돌린다. 한번은 궁궐에 침입해 영정의 목 앞에 겨눴던 칼이고, 또 하나는 무명이 영정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비설과 다투던 칼이었다. 파검의 사랑과 목숨을 소진한 두 번의 회검(回劍)에는 <영웅>을 가로지르는 협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정이 이룩한 통일 왕국 진은 겨우 15년 지속되었을 뿐이다. 또 그 몰락에는 분서갱유, 아방궁, 불로초 등의 얼룩이 진하게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장이모 감독은 패왕(覇王), 영정에게 면죄부를 선물한다.
모든 이야기를 나눈 무명은 영정의 암살을 포기한다. 그는 영정에게 “검의 최고 경지는 평화이다.”라는 파검의 정신을 전하고 돌아서 바깥을 향한다. 그러자 검은 바퀴벌레 떼처럼 신하들은 몰려들어 영정을 둘러싸며, 군사들은 무명을 에워싼다. 이때 <영웅>의 가장 스펙터클한 순간이 이어지는데 “천하를 위해 법은 지켜져야 한다”며 영정에게 무명을 죽일 것을 독려하는 신하들의 합창과 이를 외면하듯 영정이 군사들에게 죽음의 표식을 던지자 날아가 꽂히는 화살이 그것이다.
카메라는 거대한 성 문에 박힌 화살들을 천천히 팬하다가 화살이 박히지 않은 무명이 서 있던 자리에서 멈춰선다. 평화를 위한 검과 질서를 위한 강요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죽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씨퀀스는 장이모가 현재의 중국에 바치는 단심가(丹心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패왕의 시대를 향한 출사표(出師表)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의 다음 목표는 양식을 내세운 고전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6 : 37)
-장이모의 무협과 시대정신
<영웅>이 개봉 첫주 흥행 1위 자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결코 호의적이 아님을 봅니다. “너무 황당하다.”는 순진한 비난에서 “정치적으로 불손하다.”는 다소 투쟁적인 발언까지 그 층위는 다양합니다. 3년 전 <와호장룡>이 몰고 온 일진광풍은 결코 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서구의 영화계는 이 영화에 쌍수를 들어주었죠. 영화제, 흥행, 영화평의 삼박자에 멋지게 한판 놀아본 보기 드문 경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의 반응은 미지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필자는 이를 <와호장룡>이 ‘남방 무협’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민족의 시대를 서구의 모양으로 풀어낸 ‘애정 무술’영화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불법영화에 익숙한 중국인을 극장으로 끌어낸 <영웅>은 결코 <와호장룡>의 아류도 <라쇼몽>의 복사물도 아닌 것입니다.
무협소설의 전반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둘러싼 배경이 드러나는 순을 밟는다. 중반부는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밝혀지고 갈등은 고조되며 후반부에 이르면, 주인공의 뛰어난 무공과 깊은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깔끔히 정리된다. 미국의 페이퍼백 사이즈로 나왔던 대본소의 무협지에서부터 제법 작품으로 인정 받는 김용의 시리즈물까지 대하소설 분량에 이르는 무협소설들은 늘 한결같다. 이들은 장르의 규칙과 같은 최소한의 공유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5세대 감독인 장이모는 한때 정부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던 경력이 있다. 그러나 2003년 현재 그는 중국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만들어낸 관선 감독이다. 장이모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영화이다.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준 중국에 대한 시선의 변화는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장이모는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 이야기>, <인생>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아픈 과거 헤집기를 1995년 영화 <상하이 트라이어드>를 전환점으로 삼아 그만둔다. 그는 뮤지컬을 도용한 이 영화에서 이전과 구별되는 몽환적 과거를 내세운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를 연다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를 통해 보인 소박한 낭만은 이제 <영웅>에 이르러 화려함을 더해 절정에 달했다.
검은 깃발과 마차가 달린다. 진나라 왕인 영정을 배알하러 가는 검은 옷의 무사는 무명이다. 장천의 부러진 창, 비설과 파검의 검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영정 앞에 선 그는 시대를 풍미한 자객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영웅>을 한마디로 표현했을 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결정판’이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진(秦)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무(武)는 있으나 협(俠)은 없는 아류 무협영화의 종언이라는 점에서도, 이전까지 풀어내지 못한 무협소설의 상상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장이모는 <영웅>에서 자신의 영화 세계에 있어 또 다른 지점을 예고하는 지도 모른다.
영화는 크게 두가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영정이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이루는 과정 속에 무명이라는 자객이 영정을 살해하러 찾아오는 것이 첫번째이고, 영정과 무명이 대화를 나누는 현재와 플래쉬 백으로 등장하는 회상이 두번째이다. 후자는 또다시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무명이 살의를 숨기고 영정에게 들려주는 장천, 비설, 파검의 죽음에 관한 거짓 이야기이다. 둘은 영정이 무명의 살기를 읽어내고 앞서 한 이야기의 헛점을 짚어내는 것이며, 셋은 암살을 각오한 영정에게 무명이 들려주는 실제 이야기이다.
<영웅>의 내러티브는 한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진술이 거짓을 맴돌지 않고 정반합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변증법을 차용하고 있다. 플래쉬 백으로 다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사실로서 다가간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부정한다. 무명과 영정의 입을 거쳐가면서 거짓의 껍질은 벗겨지며, 진실의 속내는 드러난다.
처음 무명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장천, 비설, 파검은 영정이 알고 그들이 아니다. 영정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무명이 알고 있는 그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에 이르면 서로 상반되던 무명과 영정의 이야기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이었음이 드러난다. 영정과 무명은 모든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장천, 비설, 파검의 행동 속에 담긴 진실을 읽어내게 된다.
장이모는 둘에서 셋으로 분열된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일하는 방법론으로 적, 청, 백, 흑으로 구분한 미장셴과 현과 북을 이용한 음악 그리고 경극의 소리를 제시한다. 이는 꽤나 효과적인데, 원색의 의상과 배경을 변화하는 인물 묘사와 연결해 혼란을 막고 여기에 일관된 음악과 소리를 덧입힘으로써 암살의 위협에서 통일에 다다른 영정의 위업과 사랑과 대의를 위해 목숨과 명예를 바치는 무명, 비설, 파검, 장천의 업적에 힘을 더한다.
<영웅>의 핵심은 무협소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과장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天下)를 이루기 위해 뛰어든 영웅들의 협에 있다. 영화의 핵심을 이룬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 수천의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는 무명, 자객에게 자신의 칼을 건네며 등을 보이는 영정, 믿음을 이루기 위해 검을 떨어뜨리는 파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을 뚫는 비설 등 죽음을 직시하는 영웅들은 최근 등장한 어떠한 무협영화보다도 협에 근접하고 있다. 여기에 바둑과 창술, 서법과 검술을 동등하게 설정하는 문무의 접합과 눈을 감고 심리적 합 겨루는 것은 동양 무술이 추구하는 경지에 다름 아니다.
<영웅>의 핵심에는 파검이 자리하고 있다. 영정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무명의 변화는 파검의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먼저 파검은 무술의 근본 정신에 가장 근접해 있다. 침입한 대군의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서체를 완성하는 그의 행동은 상황에 대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신기능을 중지시켜 환경에 따라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맺어 반응하는 동양 무술의 근본을 실현한다.
파검이 단순한 무술인의 경지를 넘어서 정복자이자 천하인이 될 영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상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 호수에서의 싸움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파검과 무명은 상상 속에서 합을 겨룬다. 파검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누운 비설의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으려 싸움을 접는다. 이는 무명이 영정 앞에서 칼을 돌린 파검의 마음을 읽어냄과 동시에 영정이 무명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아낸 순간이 된다. 파검은 자신의 신념만으로 무명을 움직이며 영정을 깨우친다.
파검은 두 번 검을 되돌린다. 한번은 궁궐에 침입해 영정의 목 앞에 겨눴던 칼이고, 또 하나는 무명이 영정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비설과 다투던 칼이었다. 파검의 사랑과 목숨을 소진한 두 번의 회검(回劍)에는 <영웅>을 가로지르는 협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정이 이룩한 통일 왕국 진은 겨우 15년 지속되었을 뿐이다. 또 그 몰락에는 분서갱유, 아방궁, 불로초 등의 얼룩이 진하게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장이모 감독은 패왕(覇王), 영정에게 면죄부를 선물한다.
모든 이야기를 나눈 무명은 영정의 암살을 포기한다. 그는 영정에게 “검의 최고 경지는 평화이다.”라는 파검의 정신을 전하고 돌아서 바깥을 향한다. 그러자 검은 바퀴벌레 떼처럼 신하들은 몰려들어 영정을 둘러싸며, 군사들은 무명을 에워싼다. 이때 <영웅>의 가장 스펙터클한 순간이 이어지는데 “천하를 위해 법은 지켜져야 한다”며 영정에게 무명을 죽일 것을 독려하는 신하들의 합창과 이를 외면하듯 영정이 군사들에게 죽음의 표식을 던지자 날아가 꽂히는 화살이 그것이다.
카메라는 거대한 성 문에 박힌 화살들을 천천히 팬하다가 화살이 박히지 않은 무명이 서 있던 자리에서 멈춰선다. 평화를 위한 검과 질서를 위한 강요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죽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씨퀀스는 장이모가 현재의 중국에 바치는 단심가(丹心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패왕의 시대를 향한 출사표(出師表)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의 다음 목표는 양식을 내세운 고전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6 : 37)